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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형상없는 관음진신 해조음에 실려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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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0 년 10 월 [통권 제90호]  /     /  작성일20-10-21 10:50  /   조회7,03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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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然尋牛逍遙1] 양양 낙산사

 

觀音眞身無形象

海潮音中亦無存

 

낙산사에 와 본지도 여러 번이다. 젊은 날 동해 바다로 유람하러 왔다가 처음 들렀고, 그 이후 강릉이나 속초로 오는 기회가 있을 때 몇 차례 들렀다. 그때마다 계절이 달랐던 듯하다. 요즘은 양양에 국제공항까지 생겨나 이곳으로 오는 길은 육로와 함께 바닷길과 하늘길이 모두 열려 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오봉산 기슭에 자리한 산사의 빼어난 경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최승경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된 풍광이다. 신라 이래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실 사람들과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이곡(李穀, 1298-1351), 허균(許筠, 1569-1618), 윤휴(尹鑴, 1617-1680), 윤증(尹拯, 1629-1714),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 당대 거유巨儒들과 기라성 같은 현인 문사들, 정선(鄭敾, 1676-1759), 허필(許佖, 1709-1761), 김홍도(金弘道, 1745-1806?) 등과 같은 화사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아 예배를 올리고 글을 짓고 그림을 남겨 전해지는 것이 여럿이다. 낙산사에 와 본지도 여러 번이라고 하고나니, 문득 당나라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끽다거喫茶去’ 화두가 떠올라 머쓱하기는 하다. 절에 한번 왔든 여러 번 왔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 여전히 몇 번 왔느냐 하는 분별심을 내는 미망迷妄에 빠져있는 것이 난망難望이거늘 낙산사에 여러 번 와본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하는 말이다. 

 


사진1. 낙산사 원통보전. 

 

 2005년 대화재로 원통보전(圓通寶殿, 사진 1)과 1469년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하여 조성한 동종까지 화마에 사라지는 비극을 보면서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낙산사의 역사를 보면, 창건이후 신라시대에도 두 번이나 전소되다시피 했고, 고려 때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고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을 위시하여 몇 번의 화재로 당우들이 거의 소실되는 비극을 반복했다.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의 참화를 입었다. 지금도 산불이 나면 불길이 산사로 옮겨 붙지 않을까 늘 걱정되는 형편이다. 2005년의 대화재는 엄청나 잿더미가 된 낙산사가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정념正念 화상이 폐허에도 살아남은 의상대, 홍련암, 보타전, 칠층석탑, 공중사리탑, 원통보전 담장 등에 의지하여 복원의 원을 세우고 일념으로 힘써 이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운 전각들이 갖추어진 낙산사를 재탄생시켜 놓았다. 만화방창萬化方暢한 아름다운 화엄세계와 같다. 

 

 의상대義湘臺의 일출과 관음송(사진 2), 관음굴觀音窟의 홍련암(紅蓮庵, 사진 3)과 파랑새, 홍예문紅蜺門에서 범종루梵鐘樓, 사천왕문四天王門, 응향각凝香閣, 빈일루賓日樓, 대성문大聖門을 지나 원통보전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칠층석탑에 이르는 길은 실로 환희와 경탄의 공간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홍예문과 창천으로 날아갈 듯한 누각은 그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세조가 낙산사를 중건할 때 처음 쌓은 원통보전의 따뜻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담장은 안쪽에는 기와로 쌓고 바깥쪽에는 막돌로 쌓은 아름다운 양식인데,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사진2. 의상대와 관음송. 

 

 칠층석탑은 원래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3층탑을 조성하고 세조때 중건 당시 학열(學悅, ?-1484) 화상이 9층으로 다시 쌓았다고 전한다. 손상 하나 없이 완전한 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경봉(鏡峰, 1892-1982) 대화상의 글씨로 현액을 건 원통보전에는 조선시대 장지壯紙로 만들고 옻칠을 입힌 관음건칠좌상觀音乾漆坐像이 모셔져 있다. 대화재 때에 정념 화상이 몇몇 스님들과 목숨을 걸고 화마 속으로 뛰어들어 안고 나온 보물이다. 관음지觀音池와 이를 내려다보는 보타락寶陀洛의 높은 누각과 천수관음과 1500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는 웅대한 보타전寶陀殿이 만들어낸 공간은 그야말로 하나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대관음의 공간이다.  

 

 이런 아름다운 낙산사는 국내 제일의 관음성지가 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고, 종교가 무엇이건 문화유산을 찾아오는 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나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름다운 누각과 소나무의 어울림을 풍경으로 담기에 바쁘다. 그러나 유럽의 오랜 수도원들이 오늘날 관광코스와 사진 배경이 되는 것으로 전락하고 수도원이 비어 가는 것과 같이 사원이 건축과 정원을 구경하는 자리가 되고 사진의 배경으로 남는 것이라면, 인류가 찾아낸 고등철학인 불교의 진리체계의 공간으로 가지는 진면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 될 것이다. 

 


사진3. 관음굴과 홍련암. 

 

 낙산사는 이 절을 처음 창건한 의상(義湘, 625-702) 대사와 그의 가르침의 처음이자 끝이다. 인간이 발전하고 문명이 형성되고 고도화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로 시작한다. 진리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실현에 이르는 길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삼라만상과 함께 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가는 길이다. 탐욕과 폭력이 만들어내는 비극과 전쟁과 온갖 고통으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라면 축생과 다름이 없다. 그렇지 않으려면 인간이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진실로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를 알 수 있는지, 진리의 온전한 모습을 알았다면 이를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등등 이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진리이고 이 진리를 실현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존엄하게 평화롭게 자기의 삶을 자유로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온 세상과 우주의 존재도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와 인식의 문제이다. 존재와 인식에서 올바른 지식을 얻어야 그 다음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를 실현하는 지식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의상 대사도 죽고 죽이는 전쟁의 고통, 지배와 피지배의 인간 차별, 각자 자기의 몫을 정의롭게 가지는 것이 어려운 실상, 질병과 애증 속에 빚어지는 비극 등 이러한 고苦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벗어 날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자연과 우주와 함께 하는 물아일체의 환희의 삶을 어떻게 살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의문 앞에서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는 신라에서 홀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당시 모든 지식이 모여드는 당 나라로 공부하러 갔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한漢, 위진魏晉, 수隨의 시대를 거쳐 유교, 불교, 도교의 지식체계가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천재 현장(玄奘, 602-664) 법사는 고승의 평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629년 목숨을 건 천국구법행天竺求法行에 나서 10여 년간 인도의 대덕, 철인들에게 불교철학을 공부하였다. 645년 귀국하여 장안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657부의 불경을 본격적으로 번역하면서 불교철학의 새 지평을 열어 나가고 있었다. 

 


사진4. 화엄연기-백화발원문. 

 

 이미 신라 왕손 원측(圓測, 613-696)도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로 가서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하면서 유식학, 소승 대승 경론을 종횡무진 넘나들고 현장의 역경불사에도 함께하여 천하에 뛰어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여러 경을 번역하는 중심에 있었을 뿐 아니라 695년 지금의 화전和田인 우전국于闐國에서 온 실차난타(實叉難陀, Śiksānanda, 652-710)가 『화엄경』을 번역할 때도 함께 하였다. 19세에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한 의상도 661년 38세의 나이로 드디어 당나라로 건너갔다. 화엄학을 정립한 당대 화엄 2조 지엄(智儼, 602-668) 화상 문하에서 공부한 후 스승의 인증印證을 받고 지엄 화상의 대를 이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당이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리고자 문무왕 11년 671년에 급히 귀국한 뒤 신라에서 화엄이론을 펼쳐나갔다. 지엄을 이은 3조 현수(賢首, 643-712) 화상도 의상 대사와 계속 지적 교유를 이어갔다.

 

 의상 대사는 귀국한 해 황복사에 머물던 중 계시를 얻어 동해안 관음굴을 찾아 지금의 의상대 절벽 위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기도를 올리고 드디어 관음보살의 현현을 보게 되었다. 그 가르침에 따라 관음굴 위에 홍련암을 짓고 오봉산 기슭에 낙산사를 지었다. 그때 의상대사가 기도하면서 올린 발원문은 실로 불교의 정수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구도자로서 간절함이 절절이 넘치는 천하의 명문이다. 사실 이 발원문만 제대로 이해해도 많은 경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이해해야 이 발원문을 제대로 해득할 수 있다. 이해가 있은 다음이라야 실천이 따를 수 있다. 이름 하여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사진 4)이다.  

 

 “관음 보살을 본사本師로 모시겠다.”는 등의 발원을 하고 의상대에서 간절히 기도를 한 끝에 바다 위에 붉은 연꽃이 솟아나면서 현현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그리하여 관음보살이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곳에 절을 세우라고 한 계시를 받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 補陀落迦山)에서 이름을 따 낙산사라고 하였다. 보타낙가산은 고대 인도어로 보타락Botarak을 한자로 음역한 것인데,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는 산을 말한다. 소백화小白華, 백화(白樺, 白花, 白華), 백화수白華樹, 백화수산白華樹山 등으로 의역意譯되므로, 백화도량은 곧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는 보타락의 절을 말하며, 이를 다시 이름 짓되, 백화白華를 낙산洛山으로 도량道場을 사寺라고 지었다.    

  

 관음성지인 낙산사로 많은 참배객들이 순례의 걸음을 멈추지 않지만, 그 기도가 개인의 복이나 소원을 비는 것이라면 본령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리라. 의상 대사와 같이 성불 이전에 먼저 『화엄경華嚴經』에 있듯이 「십지품十地品」의 십지보살十地菩薩 즉 세속에서 남아서라도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이 되게 해달라는 비원悲願이야말로 진정한 관음도량의 기도가 아닐까. 낙산사에서는 오로지 이 의상대사의 발원문을 송하고 증득하여 비원의 기도를 올리는 도량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요즘 낙산사에는 불교대학을 두어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화엄경』과 관음기도를 중점으로 행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낙산사의 역사를 보면, 의상 대사가 창건한 이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에 들어서면서 불교가 위축되어 위기에 처했으나, 이성계부터 이방원까지 내적으로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실에서는 낙산사를 중히 여겼다. 그러다가 세조가 친히 낙산사를 방문하고 대대적으로 중건하도록 하여 학열 화상이 총책임을 맡아 중창하고 홍예문, 칠층석탑, 원통보전 담장 등을 조성하였고, 아들 예종도 동종을 조성하고, 성종도 교지를 내려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요역을 감면시키는 등 각종 혜택을 베풀었다.

 


사진5. 세조가 하사한 벼루. 

 

 

 불교 측에서 보면, 유교국가 조선에서 세조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경을 간행하고 낙산사를 대대적으로 지원한 것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자기 조카인 단종을 제거하여 부당하게 권력을 찬탈한 자신의 정통성의 허약함이나 아니면 피의 업보를 씻어내려는 콤플렉스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역사에서 보면,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거치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려한 의지는 퇴색되고 국가권력의 사유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권력을 찬탈하는 불의한 살육과 이러한 왕위찬탈에 부역한 공신집단들은 공으로 차지한 사전私田을 확대시켜가고 거대한 장원을 경영하면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더해갔다. 결국 토지제도는 왜곡되어 나라를 망가뜨려가고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이게 된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후 2대 정종, 3대 태종, 4대 세종은 장자가 아니어서 왕위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왕위 찬탈을 놓고 혈육까지 도륙을 한 이방원의 피의 향연은 이미 역사에 낭자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행히 장자 승계한 5대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13세 장자인 단종이 승계하였다. 이때 어린 조카를 1년 만에 축출하고 세종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왕 자리를 빼앗아 세조가 되었다. 이때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조수량 형제, 이양 등 국가 동량들을 살육하고 혈육인 안평 대군도 죽였다. 반면 왕위찬탈에 같이 행동한 정인지, 한확, 한명회, 이사철, 이계전, 권람, 최항 등 37명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어 공신전功臣田을 두둑이 받고 거대한 기득권세력을 형성하였다. 조선 창건 이후 나라 땅을 이렇게 나누어가진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진6. 두꺼비 연적. 

 

 이후 조선의 역사는 지극히 왜곡되고 파행을 거듭한다. 1456년 세조의 잘못을 탄핵하고 단종을 다시 세워 왕조의 정통성을 바로 잡으려 하다가 세상을 떠난 충신을 역사에서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이때 정의를 위해 일어선 70여명이 모반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세조의 불의에 저항하여 관직을 던지고 초야에 묻힌 인재들을 역사는 생육신生六臣이라고 기록한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키운 국가동량지재國家棟梁之材들을 이렇게 없애 버렸다. 그 이후에도 음모와 살육의 정치는 계속 반복되었다. 아무튼 낙산사에는 세조가 하사한 것으로 전해오는 대형 벼루(사진 5)와 두꺼비 연적(사진 6)이 전해오는데, 이를 보는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낙산사에는 의상기념관을 신축하여 의상 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여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있어 과거에 비하여 더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의상 대사와 원효 대사에 관하여 얘기하자면, 청사晴師 안광석安光碩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은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에게서 서예와 전각을 배우고 범어사 동산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 수계한 후 나중에 환속하였지만, 평생 의상 대사와 원효 대사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두 분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는 갑골학, 서예, 전각, 서각, 다도에서 큰 길을 열어 가는 일대 선생으로 활동하셨는데, 의상 대사에 관하여는 일본의 자료까지 모아 「화엄연기華嚴緣起」라는 제하의 작품을 남기셨고, ‘화엄일승법계도’를 쓰고 전각과 서각으로 새겨 전무후무한 「법계인유法界印留」(사진 7, 사진 8)의 작품을 남기셨다. 위비魏碑의 높은 풍격을 지닌 선생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정신을 고양시켜준다. 나는 젊은 날 화엄학을 배우고자 선생의 ‘우린각羽麟閣’을 출입하며 자상한 아낌 속에서 서예와 전각 등에 대해서도 눈을 키울 수 있었다.

 

사진7. 법계인유 실물

 

 



.사진8. 무량겁 인영. 

 

 법인法仁 화상은 감회에 젖어 있는 나에게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의 비석 글을 보여주며, 얼마나 격이 높은 글이냐고 하셨다. 글은 당시 강원도 방어사 겸 춘천도호부사로 있은 이현석(李玄錫, 1647-1703) 선생이 1693년에 지은 글이었다. 그는 방대한 「유재선생집游齋先生集」을 남겼는데, 이수광(李晬光, 1563-1627) 선생이 그의 증조부다. 낙산사의 관음굴에는 영험한 일이 자주 있어 굴 앞에 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1683년 관음상에 개금불사를 할 때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과 향기를 품은 신비한 구슬 한 개가 떨어졌다. 이에 사람들은 이를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탑을 조성하고 구슬을 봉안하는 불사가 1693년에 완성되었다. 이 당시 탑을 건립함과 동시에 ‘해수관음공중사리비명海水觀音空中舍利碑銘’을 두전頭篆으로 쓴 비를 세우면서 쓴 비문이었다. 현재는 홍련암 옆에 서 있다. 그 비문을 읽던 중 비명碑銘이 눈에 확 띄었다. 

 

“佛本無言 現珠著玄 珠亦藏光 借文以宣 文之懼泯 鑱石壽傳 

珠耶石耶 誰幻誰眞 辭乎道乎 奚主奚賓 於焉得之象罔有神

 

부처님은 본시 말이 없어 구슬 들어 현묘한 법 보이네. 구슬도 빛을 함장 하니 글로 뜻을 밝히거니. 글이 없어질까 걱정되어 돌에 새겨 전한다. 구슬과 돌이라, 어느 것이 헛것이고 어느 것이 참이며, 말과 도道라,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이던고. 그 사이 벌써 형상은 없어지고 마음 있음 깨달았네.”

 

 이현석 춘천부사가 유학에서 높은 경지에 도달했고 문장 또한 높았지만 유가와 불가의 이치가 둘이 아니니 실로 진리의 이치를 터득하고 이 탑비를 쓸 때 그 경지를 드러내 보인 절창의 문장이다. 비석에 쓴 그의 글씨 또한 뛰어나다.

 

 저녁 햇살을 뒤로 하고 솔바람 속으로 산사를 내려오는 길, 해수관음상을 앙망하며 정례頂禮하고 내려가는 길이지만 푸른 물속에 달은 보이지 않는다. 중생의 발걸음 소리에 나뭇가지에 앉았던 파랑새가 숲속으로 날아간다. 부드러운 햇살 속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보는 우리들 뒤에서 원효 스님의 빙그레 웃는 미소가 느껴진다. ‘자네도 관음을 보지 못하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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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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