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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도]
다도의 시조 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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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  2020 년 10 월 [통권 제90호]  /     /  작성일20-10-21 14:40  /   조회7,0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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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서는 일본 다도를 이해하는 첫 길잡이로 일본 다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회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다회가 일본 다도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두 번째 이야기는 그러한 다도를 만들어 낸 다인茶人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본 다도 역사에서 가장 주요한 3대 다인을 꼽자면 다음의 세 인물을 들 수 있겠다.일본 다도의 시조인 슈코(珠光, 1423-1502), 중흥조인 다케노조오(武野紹鷗, 1502-1555), 대성자인 센리큐(千利休, 1522-1591). 이번 호에는 일본 다도의 원류인 슈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슈코, 선다도의 개산     

 

위에서 슈코를 일본 다도의 시조라고 소개했다. 슈코가 일본 다도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유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일본 다도의 원류를 전하는 일급 비전서 『야마노우에소지키山上宗二記』(1586-1588)에 기인한다. 이 책은 일본 다도의 기원을 시작으로 역사, 명물 다도구, 다인의 분류, 고금의 다인전, 다인의 덕목 십체十体와 우십체又十体, 다실과 재목, 다사, 명인의 다풍, 중국 옥간의 팔경 화찬 등으로 최초의 종합적인 체계를 갖춘 다도 지침서로 평가된다. 

 


사진1. 원오극근의 묵적. 도쿄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 현재는 대혜종고의 대필로 추정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다도론은 이후 일본 다도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조선의 차사발인 이도井戸 다완을 일본 다도가 추구하는 차에 어울리는 천하제일의 명물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의 저자인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 1544-1590)는 센리큐의 수제자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에게 임진왜란을 앞두고 스승 리큐보다 먼저 참살을 당한 다인이었다. 그는 일본 다도가 선禅에서 출발한 다선일미茶禅一味의 선다도禅茶道임을 되풀이 강조한다. 이러한 선다도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의미에서 슈코는 다도의 개산開山으로 칭송 받고 있다.

 

다도의 의미     

 

앞서 슈코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선다도를 열었다고 했다.여기서 선다도란 무엇인가? 선다도는 선과 일체된 다도라는 뜻이다. 그럼 선禅이란 무엇인가. 선을 정의하는 것은 필자에겐 지난한 일이나 실천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첫째 본래의 자기(무無・공空)를 깨달아 각자覚者가 되는 길이며 둘째, 각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겠다. 필자가 언급하는 다도茶道는 이러한 선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새삼 다도의 정의를 하자면, 각자 지향하는 바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역시 실천적 관점에서 필자는 일본 다도 철학의 대가인 쿠라사와 유키히로倉澤行洋(1934- ) 박사의 정의로 대신하고자 한다.

 


사진2. 도코노마에 걸린 묵적. 

 

다도란, 첫째는 차의 수행을 통하여 깊고 높은 지심至心에 나아가는 길이며, 둘째는 깊고 높은 지심至心에서 다시 차로 나아가는 길이다. 여기서 지심을 득도得道로 바꾸어 말한다면, 다도란 첫째, 차 수행을 통하여 득도로 나아가는 길이며 둘째,득도의 경지에서 차를 행하는 길이다. 이와 같이 2단계적 수행론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환원還源과 기동起動’, ‘향거向去와 각래却来’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럼 다시 슈코로 돌아가자.

 

나라출신의 다승     

 

슈코는 나라奈良 출신의 승려, 속명은 무라타村田. 기존에는 무라타 쥬코 내지 무라타 슈코라고 해왔는데, 슈코 연구 성과에 의해 출가자이므로 속명은 사용하지 않고 ‘슈코珠光’로 표기가 정착되었다. 슈코는 11세에 나라 칭명사称名寺라는 절에 출가하였으나 20세 무렵부터 세속에 관심이 많아져 절을 떠나 교토의 작은 암자에서 차를 시작한다. 30세에 선승으로 대덕사에서 참선하여 득도한 후 당대 최고 문화예술전문가에게서 꽃꽂이와 미술품 감정을 배운다. 이들의 소개로 최고권력자에게 차를 가르치는 효시가 되었다. 

 

여기서 살짝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꽃꽂이와 다도 등은 일본에서는 주로 상류계급의 귀족과 무사들이 즐기던 남성 문화였다. 메이지明治(1868)이후 근대에 와서야 여성들이 신부 수업 등의 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이 여성화 대중화되었다. 쇼군 요시사마의 후계자 문제를 계기로 오닌 원년부터 교토에서 일어난 오닌의 난(應仁, 1467-1477)을 맞아 고향인 나라로 잠시 귀향한 후 다시 교토로 돌아와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매우 간략하게 슈코의 경력을 소개했지만, 실은 그에 대한 기록에는 정확한 근거가 없는 것도 많아서 현재 시점에서는 전승의 영역에 두고 있다. 한편 이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슈코(1423-1502)가 조선의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교류를 가졌다는 주장이 있는데, 설득력 있는 사료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한일 다도 교류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교토 대덕사에서 임제선 계승     

 

슈코는 임제종 사찰인 대덕사大徳寺의 잇큐소준(一休宗純, 1394-1481)에게 참선하여 득도하였다고 한다. 이때, 스승 잇큐로부터 중국 송대宋代 선림禅林의 거장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의 묵적墨跡을 하사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사진1)

 

원오극근의 묵적을‘원오묵적’이라고 통칭하는데, 슈코는 이 원오묵적을 생애 가장 귀한 보물로 소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임종을 맞게 되자 제자에게 ‘내 기일에는 원오 묵적을 걸고 소박한 차 단지에 담긴 차로 제사를 지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라고 한다.

 

슈코는 왜, 이토록 이 원오극근의 묵적에 마음을 두었을까. 하나는 스승 잇큐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원오극근의 묵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잇큐는 임제선臨済禅의 정통을 잇는 승려로 자처하고 형식적인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는 견성오도見性悟道를 중요시하며 선의 민중화에 노력한 일본의 대표적 선승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원오극근은 주지하다시피 임제선을 대표하는 『벽암록碧巌録』 저자로 한국과 일본에 임제선을 전해 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와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8)의 스승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 임제종은 모두 호구소륭의 법맥法脈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호구소룡의 스승인 원오극근은 일본 선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따라서 슈코가 이러한 잇큐에게서 원오묵적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중국과 일본의 임제선에서 매우 주요시되는 두 선승인 원오극근과 잇큐의 계보를 잇는다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선차 다풍을 일으켜 일본 다도의 근간을 일구어낸 다승茶僧이기에 그를 일본 다도의 개산으로 부르는 까닭이라 하겠다.

 

이후 대덕사는 다인들의 참선 수행의 장이 되었다. 다케노 조오와 센리큐도 이곳에서 참선하여 득도하였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센리큐의 후손인 다도 유파의 수장 이에모토家元들은 이에모토가 되기 전 반드시 대덕사에서 선 수행을 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다실에 최초로 묵적을 걸다     

 

슈코는 평생 차를 하는 다승으로서 이 원오묵적을 소중히 아꼈다. 그는 원오묵적을, 『유마경』에 나오는 ‘방장方丈’에서 착안해 만든 4장반 다실에 걸어 놓고 차를 하였다. 이것이 일본 다실에 묵적을 거는 시초가 되었다.(사진2) 이전에는 산수화 등의 회화작품을 걸어 놓고 감상하는 문화적 유희를 즐겼기 때문이다. 묵적이란 선승의 득도의 경지가 표현된 글이기에 선승의 가르침, 또는 공안公案으로서 매우 소중히 여겨진다. 

 


사진3.  교토 은각사. 슈코가 창안한 4장반 다실이  있다. 

 

슈코가 원오묵적을 하나의 공안으로서 생각하고 다실의 도코노마에 걸고 차를 하였다면 이것을 조주선사(趙州禅師, 778-897)의 끽다거喫茶去로부터 내려오는 공안선다公案禪茶의 새로운 형태, 즉 선다도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여기에 슈코를 선다도의 개산이라 일컫는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슈코의 이러한 다도의 모습을 보고 ‘슈코의 다도 속에는 불법이 있다’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다도에서는 도코노마의 묵적이 하나의 정해진 연출로서 그 깊은 의미는 잊혀지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은각사… 최고 권력자가 다도를 배우기 시작하다      

 

은각사(銀閣寺, 1482-1490)는 금각사金閣寺와 나란히 교토 관광의 필수 코스로 벚꽃과 단풍이 아름다운 철학의 길 옆에 위치한다.(사진3) 은각사의 주인인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6-1490)는 문화 예술에 심취한 당대 최고 권력자였다. 그러한 그가 노년에 모든 문화와 예술 놀이에 식상해 하고 마지막으로 즐거움을 찾아 정착한 것이 다도였다. 슈코가 바로 그의 다도 스승이 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권력자들이 다도를 배우는 효시가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리큐에게 다도를 배웠고 에도江戸 막부가 끝나는 메이지 이전까지 도쿠가와徳川 가문의 쇼군과 다이묘大名들은 다도를 배웠던 것이다.

 

이 때 요시마사에게 슈코를 소개한 인물이 노아미(能阿弥, 1397-1471)인데 그는 요시마사의 미술품 등을 관장하며 문화예술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의 안목을 가진 전문직 승려였다. 그는 슈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시마사에게 간곡히 추천하였다.

 

“슈코의 다도는 눈 내리는 겨울에는 초암차의 정취를 즐기는데 차 솥의 물 끓는 소리가 솔바람에 견주어 부럽지 않으며 봄 여름 가을에도 자연의 풍류를 즐기는 차를 합니다. 또 다도 미술품에 대한 높은 예술적 취향을 갖추었고, 다실에는 원오극근의 묵적을 소중히 걸고 차를 하는데 이를 지극한 기쁨으로 삼는 다인입니다. 그의 차 속에는 불법의 진리도 그 안에 있습니다. 그의 다도는 장군이 찾으시는 참 유희이며 진정한 낙도楽道라고 감히 아뢰겠습니다.”

 

이 삼자의 만남은 은각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역사적 실증은 어려우나 일본 다도에서는 주요한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마음의 글     

 

끝으로 슈코가 다도 수행을 하는 제자에게 보낸 『마음의 글心の文』이라는 글에서 다도 수행 단계의 진수를 담은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짧은 글이라 언젠가 전문을 소개하고 싶다.

 

“此道第一わろき事は心の我慢我相也。 다도에서 가장 나쁜 것이 아만과 아상이다.

  又は我慢無くてもならぬ道也。 (하지만)또한 아만이 없어서도 안되는 길이다.

  心の師とはなれ 心を師とせざれ。마음을 스승으로 삼지말고 마음의 스승이 되거라.”

 

다도가 선의 궁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슈코는 제자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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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한일차문화연구자, 우라센케유파다도사범, 예술학 박사. 현재 일본에서 한일차문화교류연구회와 국제전통예술연구회 디렉터로 활동. 저서로 『소소의 철학(麁相の哲学)』(思文閣, 2019), 『소소-차의 이상적 모습을 찾아서(そそう―茶の理想的姿をもとめて)』(f.c.l Publish 2017) 등이 있다. 공저로 『茶室露地大事典』(淡交社, 2018)과 번역서로 『일본다도의 이론과 실기』( 월간다도, 2007)가 있다. 2014년 일본 타카라즈카대학에서 「예도 수행에 대하여-소소와 수파리를 중심으로(芸道の修行について―そそうと守破離を中心に)」라는 논문으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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