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강화 전등사-진리의 등 켜자 어둠 사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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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11:12 / 조회8,682회 / 댓글0건본문
[居然尋牛逍遙 2] 강화 전등사
傳燈滅却深處暗
眞如本體恒在近
강화도江華島는 섬이다. 그 섬에 절이 있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바다를 이루는 지점, 서울에서 서쪽으로 가면 김포반도에 이르는데, 여기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가 ‘내가 섬이다’하고 있다. 요즘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다니기에 쉽지만 다리가 없었을 때는 육지에서 뗏목이나 작은 선박을 타고 건너가야 강화도에 닿는다. 고려시대에는 길지인 세 도읍지라 하여 평양인 서도西都, 개성인 송도松都와 함께 강화를 강도江都라고 하였다.
이 강화도 남쪽에 강화 최고봉인 마니산摩尼山의 줄기를 타고 생긴 정족산鼎足山 아래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 아들 부여夫餘, 부우夫虞, 부소夫蘇가 만들었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삼국시대에 토성으로 있다가 다시 석성으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현재 정족산성의 모습을 갖추고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까지 빙 둘러싸고 있다. 결과적으로 오늘에는 정족산 속의 전등사를 정족산성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요즈음은 성곽을 조명으로 밝히고 있어 밤에 높은 곳에서 보면 절을 둘러싼 산성의 모습이 장관이다. 전등사는 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로 불렸는데, 고려 원종(元宗 王倎, 1260-1274)의 원찰로 역할을 하다가 그의 아들 충렬왕(忠烈王 王諶, 1236-1308)때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614년 광해군 때 대화재로 선조 때의 화재로 타고 남은 건물까지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겪고, 1621년 중창을 해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찰이다. 대웅보전과 약사전 등이 그 당시 중창된 건물이라고 전해온다.
사진1. 대조루와 범종각
전등사에 가는 길은 산 아래에서 걸어서 ‘종해루宗海樓’라는 현액이 누각에 높이 걸린 삼랑성 남문을 통과하여 들어갈 때 고찰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종해’라는 말은 「서경書經」의 ‘하서夏書’ ‘우공禹貢’편에 있는 “강한조종우해江漢朝宗于海”, 즉 강수와 한수가 제후들이 봄과 여름 천자에게 알현하러 가듯이 바다로 흘러 나아간다는 뜻인데, 1793년 영조 때 남문 위에 누각을 지으며 강화유수 권교가 현판을 걸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에는 천도를 하기도 했고 위기 시에 왕실이 옮겨올 자리인 동시에 1660년 현종(顯宗, 1659-1674) 이래 묘향산妙香山에서 옮겨온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에 실록과 왕실세보까지 보관하고 있으니 육지의 뭇 강들이 강화바다로 흘러들어오는 모습과 겹쳐 그 중의적重義的인 의미가 더해 온다.
사진 2. 대웅보전과 김돈희 예서 주련
남문을 지나면 통상 절에 서 있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과 같은 문은 없고 바로 전등사라는 현판이 걸린 대조루對潮樓에 이르게 된다. 하늘로 날아 오를듯한 대조루를 쳐다보며 수많은 발자국에 닳은 오랜 석계를 밟아 올라가면 대조루의 낮은 마루 아래를 고개 숙여 지나가게 된다(사진 1). 머리가 부딪히지 않게 한껏 숙여 조심스레 지나지만 이 순간은 자신의 아상我相을 죽이는 하심下心의 시간이다. 어느덧 발 앞에 작은 돌계단이 보여 바로 고개를 드는 순간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의 고색창연한 모습이 눈 안에 들어온다. 현액과 주련도 글씨가 퇴락하여 보존이 필요하고 법당의 단청도 다시 올려야 할 정도로 낡았지만, 처마 밑 공포栱包에 쌓인 시간의 무게를 느끼기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더 고귀하다. 실로 보물이다.
사진3. 김규진 글씨
주련은 약사전藥師殿의 주련과 함께 구한말 서예가로 유명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선생이 한예漢隸의 풍을 띤 예서로 썼다(사진 2). 오랜 풍우 속에 변형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무판에 새길 때 김돈희 선생의 필획을 잘 살려 새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김돈희 선생은 이준(李儁, 1859-1907) 열사가 법학 공부를 한, 우리나라 최초 법과대학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하고 검사 생활을 하며 집안의 전통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한국 서예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서예계를 지키며 발전시킨 인물이다.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등사에는 성당 선생과 같이 당시 서예계에서 양대 축을 이룬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전등사’ 편액도 걸려 있다(사진 3). 일제강점기에 서화의 원리를 탐구하며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한 가치를 꿰뚫고 산일되는 문적을 하나라도 찾아 수집하여 우리에게 남긴 인물은 「근역인수槿域印藪」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를 남긴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다. 일제가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고 마구 챙겨나갈 때 만석의 재산을 가진 거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선생을 설득하여 이를 사들이도록 한 인물이다. 만석의 재산을 가진 거부 전형필 선생이 재산을 모두 팔아 우리 문화유산을 사들여 지켰기에 오늘날 우리는 이를 향유하고 있지만, 그 후손들은 근검절약하며 지금까지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그 재산을 자식들에게 모두 물려주어 공부시키고 사업을 하게 했다면 재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간송미술관이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수집에는 이런 소중한 정신이 배어 있다.
사진4. 오세창 전서
아무튼 김돈희 선생과 김규진 선생이 활약을 하던 때에도 그 정신적 중심에는 항상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오세창 선생이 있었다(사진 4). 오세창 선생은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며 항일 문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였는데, 근대 조선이 미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시대를 앞서 내다본 4인의 개화선각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유홍기(劉鴻基, 1831-?), 이동인(李東仁, ?-1881) 가운데 바로 그 오경석의 아들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서화와 금석학의 맥은 이상적(李尙迪, 1804-1865), 오경석을 거쳐 오세창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대조루에는 오세창 선생이 전서로 단아하게 쓴 주련이 걸려 있다. 전등사에 걸린 오세창, 김돈희, 김규진 세 선생의 글씨를 보면서 그 어려웠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대조루 옆에는 종각이 있고, 대웅보전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향로전香爐殿, 약사전, 명부전冥府殿, 적묵당寂黙堂이 일렬로 서 있다. 약사전 옆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삼성각三聖閣이 있고, 대웅보전 오른쪽에는 강설당講說堂이 있다. 이러한 당우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옛날부터 전등사를 형성한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대웅보전의 배흘림기둥에는 종이에 글씨를 써서 주련 대신 붙여 놓은 것이 보이는데, 김돈희 선생의 주련은 그 이후 제작하여 건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전체 모습이 수려할 뿐 아니라 그 안에는 불상이외 조각이 뛰어난 수미단과 닫집, 천정 단청과 그림, 양쪽 대들보에 걸쳐 내려다보는 용조각 등 하나 하나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과연 이 전체가 보물일 수밖에 없다. 성당선생의 호쾌한 주련 글씨에 자주 눈길이 가는 것은 억누를 수 없다.
佛身普遍十方中 부처님 법신은 이 세상에 두루 있으니
月印千江一切同. 달이 천개의 강에 비추어진 것과 같도다.
四智圓明諸聖本 원만하고 밝은 지혜 갖춘 여러 성인들이
賁臨法會利群生. 법회마다 나투어 중생을 이롭게 하시도다.
전등사에는 옛 공간과 달리 근래에 확장하면서 이루어진 공간이 있다. 죽림다원은 혼자 오든 여럿이 오든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한번 와본 방문객들이 퍼뜨린 소문으로 인기 높은 다원으로 소문이 나 있지만, 수십 년 동안 퇴락한 전등사의 나무 한 그루 꽃 한포기까지 세심하게 새로 다듬고 가꾸어 고성古城의 원림園林같이 아름답게 연출해놓은 것은 예문藝文에 조예가 높은 장윤章允 대화상의 발원과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무설전無說殿과 선불장選佛場이다. 무설전은 예술법당으로 조성된 것인데, 건물부터 한옥을 탈피하고 암굴양식으로 하되, 그 안에 모신 불상과 보살상은 홍익대 학장을 지낸 김영원 선생이 예술조각으로 조성한 것이고, 석가모니불상 뒤의 상단탱화上壇幀畵는 동국대 미대 오원배 선생이 벽화양식으로 둥근 벽에 그린 것이다. 돈황 벽화 같은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사진 5).
사진5. 무설전 불상과 벽화
무설전의 공간은 갤러리로도 활용되어 예술가들의 초대전이 일상적으로 열린다. 부처님의 공간이 범부의 일상적인 삶의 공간과 따로 있지 않고 매우 친근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 사실 사찰건축이라는 점에서 볼 때, 기와지붕과 나무기둥으로 지은 한옥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건축 재료들이 다양하고 건축기술과 양식이 열려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 시대 사찰건축은 다양하게 모색될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그 시대에 맞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이 나중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무설전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새로운 법당양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설전의 글씨를 쓰라는 말씀에 하는 수 없이 나의 둔필鈍筆이 그에 추가되었다(사진 6).
사진6. 무설전
선불장은 고려시대 건축의 원리에 따라 김봉렬 교수가 설계한 것인데, 동문으로 나가는 길로 걷다가 위를 쳐다보면 잘 생긴 늘 푸른 소나무들 사이로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을 한 누각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불장의 화려하고 웅대한 모습이다(사진 7). 선불장의 주련은 송나라 예장종경豫章宗鏡 선사의 게송인데, 대웅보전의 주련과 대응하여 진리를 깨달은 그 경지를 잘 보여준다. 진리가 우주 전체에 가득하여 하나일 뿐이니 눈앞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니지 말고 눈 들어 멀리 진리의 하늘을 한번 볼 일이라는 가르침이다. 하늘 높이 걸린 주련이 그 내용만큼이나 장쾌하다. 천개의 강이 흘러 바다로 달려오고 그 바다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는 전등사 선불장의 웅혼한 자태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報化非眞了妄緣 보신과 화신은 참이 아니고 헛된 인연임을 알지니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은 청정하고 넓고 넓어 끝이 없도다.
千江有水千江月 천 개의 강에 물이 있어 비친 달도 천 개 일뿐이고
萬里無雲萬里天. 만 리 하늘에 구름 없으니 만 리가 하늘이로다.
선불장에서 화강암 돌계단을 올라가면 아름다운 일주문이 나오고 이를 열고 들어가면 멀리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관해암觀海庵이 있다. 선불장과 관해암은 대목장 홍완표 명인이 도편수로 지은 걸작이다. 전등사에는 현액과 주련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 인사들만의 글씨가 걸려 있는데, 예문의 높은 경지를 이어온 옛 공간은 품격 높게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새로 공간을 마련하여 당우를 지을 때에는 당대 유명 예술가들만을 선정하여 그들의 손끝에서 명작이 나오게 만든 것은 깊은 사유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사진7. 선불장
월송료月松寮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전등사 템플스테이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집이다. 기역자 모양의 집으로 예술법당 위에 지은 것인데, 그 높이로 인하여 난간마루에 앉아 보면 넓게 트인 산천이 눈에 들어온다. 월송은 ‘월송상조月松相照’에서 온 말이다. 달은 부처님의 법을 형상화 하고 곧게 올라간 소나무는 다르마Dharma를 찾아 가는 수행자를 뜻한다. 고요한 밤에 진리를 깨달기 위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로 치열하게 수행하는 수행자 어깨 위로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달빛처럼 교교히 내려앉는 열락의 순간을 의미한다. 돈오頓悟의 순간이 이러한 것인지는 그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불장의 주련으로 종경 선사의 게송을 선정한 장윤 대화상이 이름을 짓고, 주련은 승석 화상이 김지장金地藏의 시를 쓰는 것으로 정했다. 둔필로 월송료의 글씨를 썼다(사진 8). 석지장으로도 불리는 김교각(金喬覺, 696-794)스님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691~737)의 장자로 태어나 24세에 속세의 인연을 끊고 바로 당나라로 건너가 구도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에 양쯔강揚子江 남쪽에 있는 구화산九華山에 화성사化城寺를 창건하고 개산조사開山祖師가 되어 주석하면서 불법을 설하였다.
사진8. 월송료 현판
당시 그는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 당나라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그의 불법을 듣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갔다. 794년 99세 나이로 마지막 설법을 한 후 좌선한 채로 입적하였는데, 몸이 썩지 않은 채 육신공양으로 등신불等身佛이 되어 지금까지 지장보전地藏寶殿에 그대로 봉안되어 있다. 그리하여 구화산은 당나라 이래 지장보살의 성지가 되어 지금도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모여 들고 있다. 당나라 시대에는 이런 구법열기로 인하여 300개가 넘는 사찰이 구화산에 세워졌다.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선생은 젊은 시절 사천의 다솔사多率寺에서 그의 맏형인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1897-1966) 선생이 대중에게 강연할 때 이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소설 「등신불」을 쓰게 된다. 주련으로 걸린 김지장 보살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시를 음미해본다.
空門寂寞汝思家 절간이 적막하니 네가 집 생각이 나서,
禮別雲房下九華. 승방에 작별 인사하고 구화산을 내려가네.
愛向竹欄騎竹馬 대난간 죽마 삼아 타고 놀기 좋아하더니,
懶於金地聚金沙. 부처의 황금 땅에 와서는 금싸라기 줍기를 게을리 했구나.
添甁澗底休招月 항아리에 물 담으며 시냇물에 잠긴 달은 건지지 않더니만,
烹茗甌中罷弄花. 차 끓인 사발 속에 띄워볼 꽃이 없구나.
好去不須頻下淚 그래 잘 가거라. 눈물 자꾸 훔치지 말고,
老僧相伴有煙霞. 노승에겐 벗 삼을 산안개 노을이 있지 않으냐.
진리를 깨우치는 길이 이렇게도 외롭고 고독하며, 정작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인간이 헛고생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항아리 들고 물 채우러 시냇가에 갔으면서도 왜 물만 담고 시냇물 밑에 환하게 비치는 달을 건지지 못했는가 말이다. 월송료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어쩌면 달빛이 고요히 깔리는 마당에 나와 달그림자 밟으며 김지장 보살의 이 시를 한번쯤은 새겨볼 일이다. 그는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자리도 과감히 던져 버렸지 않았는가 말이다. 진리를 위하여! 그런데 참 부끄럽기도 한 일이지만, 천년도 지난 뒤에 태어난 어리석은 중생은 월송상조의 달밤을 찍어 보자고 하며 그저 구름 사이의 달과 소나무 숲이 들어있는 전등사 밤 풍경 사진만 찍었다(사진 9).
사진9. 전등사 월송상조
아침 일찍 일어나 정족산성의 동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오른다. 산성위로 올라가면 강화도의 동서남북이 모두 보인다. 어느 방향으로나 일망무제로 탁 트인 시야와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에 정신은 더욱 맑아온다. 그런데 전등사라는 이름이 고려 충렬왕의 왕비였던 정화궁주(貞和宮主, ?-1319)가 가지고 있던 송나라 대장경과 옥등잔을 절에 전달하면서 ‘등잔이 전해진 절’이라고 하여 전등사가 되었다고 한다. 62년간의 최씨 무신집권 기간인 1231년부터 9차례 39년간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며 싸웠지만 1270년 결국 고려는 항복하고 강화도에서 송도로 나왔다. 패전국의 왕, 24대 원종의 통혼요청으로 39세인 자기 아들은 몽골 쿠빌라이의 16살짜리 딸 쿠툴룩켈미시忽都魯揭里迷失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아들이 충렬왕이고 이 몽골여인이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라고 추봉된 사람이다. 이 어린 몽골 여인에게 뺨까지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자식까지 둔 자신의 아내가 궁주로 강등당하고 별궁에서도 내쫓기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잘 나가던 고려가 무신들의 사유물로 전락되면서 국정농단의 말로는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1206년 몽골고원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징기스 칸 이래 몽골은 세대를 이어가며 천하통일을 위한 대외원정의 계획을 수립하고 그 강하던 서하국, 금, 호라즘, 러시아, 깁차크국, 남송 등을 정복하고 고려 정복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고려는 그간 1170년 이의방(李義方, ?-1174)과 정중부(鄭仲夫, 1106-1179)가 무력으로 나라를 뒤집어엎고 국정을 농단한 이래 경대승(慶大升, 1154-1183), 이의민(李義旼, ?-1196)으로 이어지는 무신세력들 간의 권력투쟁으로 파행을 거듭하였다. 권력투쟁에서 최충헌이 이겨 최씨정권을 만들었다. 그가 죽자 내부반발 속에 최우(崔瑀=崔怡, ?-1249)가 권력을 세습하고, 최우와 기생 사이에 난 최항(崔沆, ?-1257), 최항이 송서 장군의 여종과 사통하여 낳은 최의(崔竩, ?-1258)로 이어가며 국정을 농단하다가 내부 반란으로 최의가 제거되면서 그 동안 허수아비 왕이었던 강종(康宗 王貞, 1211-1213), 고종(高宗 王瞋, 1213-1259)과 원종을 마지막으로 항쟁을 끝내고 몽골 쿠빌라이에게 두 손을 들고 강화도에서 나왔다.
그때까지 아까운 장수와 인재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잡혀가고, 북쪽에서부터 나주, 경주, 진주 등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가 약탈, 살육, 방화로 유린되었다. 역사에서 언제나 이런 비극의 책임은 권력을 쥔 자들에게 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후 고려는 1368년 원이 망할 때까지 원나라에 복속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나라가 난장판이 되고 백성들만 또 죽어나가게 되자 ‘이게 나라냐’하고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이색(李穡, 1328-1396),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등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유학파들이 정상국가를 꿈꾸게 된다.
아무튼 나는 이런 등잔전래설은 일반이 듣기 쉽게 만든 속설이라고 본다. 전등사는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을 계기로 지어졌기에 억울한 정화 궁주의 옥등잔과 대장경을 전해 받은 것을 기화로 그 말이 같으면서 동시에 불법의 등불이 처음 전래되었다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 전등사로 개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전등사에 오면 말 그대로 진리의 등불을 하나씩 얻어 간다. 나도 이 등불을 하나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전등록傳燈錄』이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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