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월하 김달진 - 씬냉이꽃 피고 나비 날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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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20 년 12 월 [통권 제92호] / / 작성일20-12-30 09:36 / 조회7,297회 / 댓글0건본문
백원기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문학평론가
경남 진해 출신의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1907-1989)은 1929년 『조선시단』에 「상여 한 채」 「단장 일수」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입산하여 수도생활을 했으며, 해방 후 동아일보 문화부에 잠시 근무, 1960년대 이후 동국대학교 역경위원으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시집 『청시』,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올빼미의 노래』, 산문집 『산거일기』, 그리고 『보조국사전집』, 『붓다 차리타』, 『장자』, 『고문진보』, 『한산 시』, 『법구경』 등의 훌륭한 번역서를 남겼다.
절대적인 세계의 동경과 세속적인 명리를 거부한 월하는 직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일상 속에서 무한한 존재의 즐거움으로 현실을 초극하고자 했다. 동양적 정밀과 세속적 영욕이나 번뇌를 초탈한 절대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시문학의 특징은 언어를 최대한 절약한 평범하고 기교가 없는 표현으로 불교의 화엄적 세계관에 기반 한 경이로운 우주를 담아내는 데 있다.
월하 김달진(金達鎭.1907.2.4~1989.6.5) 선생
월하가 그리는 것은 우주의 광활함과 인간의 작음의 대비를 통한 우주질서의 인식이다. 그래서 그의 시문학에 나타나는 시인의 모습은 언제나 자연과 함께 하는 사물로 묘사되거나 사물의 일부로 그려진다. 그것은 세계를 조화롭게 보고자 하는 그의 화엄적 사유의 시심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조와 종교적 초월의 경계 속에서 잉태되고 탄생되는 그의 시는 순수 서정시와 동양적 미학을 접목,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려는 몸짓이다. 그 전형적인 시의 하나가 「목련꽃」이다.
봄이 깊었구나
창밖에 밤비 소리 잦아지고
나는 언제부터선가
잠 못 자는 병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목련꽃 세 송이 중
한 송이 떨어졌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자연현상에서 우주적 생명감각을 일깨워주는 시편이다. 거대한 이 우주에서 목련꽃 한 송이는 하찮은 존재이다. 때문에 목련꽃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해가 될 것도 없고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느끼고 인식한다. 한 송이 목련꽃이 떨어진 것을 보고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즉, 이와 같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우주로 확장되는 내면 풍경은 사물의 일부로 조화롭게 존재하는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에게 만물은 외적인 면에서 형태가 구별되지만 그 내적 세계에서는 만물이 동일하게 보여 진다.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거기에 담겨있는 큰 것, 즉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체험하는 것은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다. 이처럼 미시적인 안목으로 사물을 그리되, 시어를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시적 세미화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월하의 대표적인 시가 「샘물」이다.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물아일여의 상상력이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들여다보기’로 하나의 세계를 묘사하거나 ‘사물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 합일하는 공간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조용한 숲 속에 있는 샘물을 들여다보는 화자는 그 샘 속에서 하늘, 흰 구름, 바람, 그리고 바다처럼 넓어지는 모습을 본다.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분인 샘물이 하나의 우주가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 넓은 우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작은 자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 있는 자신 또한 물속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무한한 자연의 일부로 조화를 이루어 질서 있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숲 속의 작은 샘물로 비유된 우주의 한 공간에 속에 있는 ‘나’가 자연과 하나라는 합일되는 모습이 형상화 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상에 대한 분별을 초월한 지점에서 얻게 되는 월하의 화엄적 상상력은 다음의 시 「벌레」로 그대로 이어진다.
고인 물 밑
해금 속에 꼬물거리는 빨간
실날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
등 뒤의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 실날같은 빨간 벌레가 되다.
시적 화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혼탁한 세상을 상징하는 해금 속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실날같은 벌레’를 보다가 자신이 ‘그 실날같은 빨간 벌레’가 된다. 사물로서 바라보았던 벌레는 시인의 자아가 되는 벌레로 치환된 것이다. 극도의 자기 축소에 의한 크고 넓은 세계로의 확장이라는 역설의 변증법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자아가 동일시를 통하여 자신 아닌 존재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체적 자아를 확장하여 큰 자아(Self)로 승화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로 상대적 분별을 넘어선 선적 경지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직접적인 매개는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한 것이다. 화자 자신의 머리와 등 뒤에 있는 ‘어떤 큰 눈’은 화자의 내면의식이 존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절대자 혹은 부처님의 눈일 수 있고, 또한 자연의 질서를 읽어 낼 수 있는 깨달음의 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찮은 샘물, 벌레 그리고 씬냉이꽃과 같은 자연물에서 우주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던 월하의 생태 상상력은 「씬냉이꽃」에서 더욱 깊어진다. 신록의 계절이라 모두들 산과 바다로 놀러간다고 야단들이지만, 시인은 홀로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에 피어 있는 조그만 씬냉이꽃을 발견한다. 사실 씬냉이는 하찮은 식물로 꽃도 화려하지 않으며 관심 밖의 존재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조그만 씬냉이꽃에서 하나의 우주를 본다.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그늘 밑에 가려 외롭게 피어나 진한 향기를 내뿜고 나비를 불러들이는 조그만 씬냉이꽃에서 감추어진 자연의 섭리를 포착하는 시인의 섬세하고 깊이 있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사실 자연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들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라도 그 나름의 존엄하고 경이로운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생명존중 사상이 아름다운 무늬 결을 이루고 있다.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모습은 바로 이 순간, 여기의, 이 우주의 현실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란 어디를 말하는가? 바로 그늘 밑을 말하는 것이고, 그곳은 곧 우주속의 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자연의 후미진 곳에 있는 아주 작은 사물이나 그 사물의 미동까지도 포착해내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 시인의 눈에는 나와 나비, 그리고 씬냉이꽃이 우주 속의 일원으로 평등하게 존재한다. 모든 존재의 동일성 즉, 씬냉이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체득하고 있는 이 시는 월하시의 압권이다. 나아가 월하의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우주를 발견하는 사유는 의상 대사 「법성게」의 “한 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우주가 다 들었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는 화엄적 상상력과 맥을 같이한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연의 순수상태에 대하여 직관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월하의 시세계는 간결하고 명징한 이미지를 갖는다. 인공이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그대로 성숙됨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그의 시각이다. 그의 이러한 시의식의 출발은 익지 않은 푸른 감을 매개물로 하여 현상적 움직임 속에서 사물의 본질을 관조하는 「청시(靑柿)」에서 잘 드러난다.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직관과 감성이 보다 정갈하고 고고하게 드러나 있으며 인위적인 행위가 전혀 없는 자연그대로의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다. 자연의 원리는 인위적인 힘이 없어도 성숙해 간다. 오히려 인위적인 것이 없어야 온전한 제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시인은 그 익지 않은 열매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가닿게 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유월의 꿈’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인데, 시인은 그것을 아직 익지 않은 열매에 비유하고 있다. 뜰이 있고, 미풍이 지나가고, 흔들리는 가지와 짙푸른 잎새 속에 아직 익지 않은 감이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풍경은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뜰이야말로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이고, 화자는 이 작은 세계에서 빛나는 유월의 꿈을 포착하는 것이다. 익지 않은 감은 염원하는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상징하지만, 그 자체로서 자연 그대로 완결된 하나의 세계이다. 익지 않은 푸른 감을 매개물로 하여 살아 움직이는 현상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고, 온전한 모습 속에 존재자로서 자신을 끌어들여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이 시가 함축하고 있는 근본적인 세계이다.
단순한 사물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을 통하여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선적 사유의 발현이라 할 수 있는 탈속 무애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시적 주체는 정신의 확장과 자유로운 사상의 발현을 획득하게 된다. 서정주나 유치환과 같이 인간 생명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우주 본질에 대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성찰로 확장되는 월하의 시는 시적 주체인 나를 어떻게 비우느냐에 따라 인간의 보다 자유로운 정신을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면모는 「나」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를 세우는 곳에는
우주도 굴속처럼 좁고
나를 비우는 곳에는
한 켠 협실도 하늘처럼 넓다
나에의 집착을 여의는 곳에
그 말은 바르고
그 행은 자유롭고
그 마음은 무의의 열락에 잠긴다.
시인은 우주처럼 넓은 공간에서 ‘나’를 세우면 좁게 느껴지지만 좁은 공간에서도 ‘나’를 비움으로써 하늘처럼 넓은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번뇌나 망상 그리고 집착이라고 하는 현상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의 참다운 마음이 바로 걸림이 없는 무위의 법열에 도달하는 방법임을 드러내 보인다. 다시 말해, ‘나’라고 하는 본질의 집착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걸림이 없는 대자유의 정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세계는 욕망과 집착에 매여 번다하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내려놓기와 비움을 통한 ‘텅 빈 충만’의 치유의 장을 열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월하는 자연의 생명적 질서를 통하여 생명정신을 보았으며, 우주 속에서 자유롭게 소요하는 시 정신을 가지고 글쓰기를 했다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불교의 우주론과 연기론에 기반 한 선심의 시심화의 사유와 상상력이 내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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