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청 선어록]
선종지장禪宗指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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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귀 / 2020 년 12 월 [통권 제92호] / / 작성일20-12-30 09:56 / 조회6,598회 / 댓글0건본문
청대의 행해行海가 찬술한 책으로 간기는 1787년이다. 행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선종지장>에서 지장指掌이라는 말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매우 쉽거나 명백한 일을 이르는 말로, 선종직지禪宗指掌는 선의 종지를 쉽게 설명한다는 뜻이다. 수록된 내용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의 진공眞空의 미묘한 이치 진심眞心을 해명하고, 참선은 선교용심善巧用心을 중시하며, 본래면목에 대한 유무有無·단상斷常의 이견二見과 득견得見에 대한 가부可否와 터득하는 용심用心 등에 대하여 문답의 형식을 빌려 설명하였다.
전체 내용은 총 8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대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편은 중도제일의제 곧 최상일승最上一乘의 가르침은 비공·비유·부단·불상·무득·무실·무범·무성·무생사·무열반을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문답을 통하여 최상일승에는 일체의 세간법 및 출세간법이 없어서 내지 언어로 말할 수가 없고[言語道斷] 분별심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心行處滅]고 말한다.
제2편은 진심을 미묘하게 해명하는[妙明眞心] 진실한 뜻을 내세우고 공空을 이해하여 단견을 벗어나며 유有를 이해하여 상견常見을 벗어나는 것으로 곧 분별을 내세우지 않는다.
제3편은 참선은 마음을 현명하게 활용하는[善巧用心] 것을 소중하게 간주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어리석게 활용하는[愚拙用心] 경우는 유와 무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현명하게 마음을 활용하는 경우는 분별념이 발생하지 않는 것인데, 가령 본래면목을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4편 및 제5편은 본래면목은 유·무의 집착을 벗어나 있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제6편은 유를 제대로 이해하여 상견에 빠지지 않고, 무를 제대로 이해하여 단공斷空에 빠지지 않는데 그것이 곧 오공悟空이다.
제7편은 본래면목이라는 견해에 대한 분별을 초월해야 한다.
제8편은 육진六塵과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에 집착이 없어야 본래면목을 터득한다. 곧 본래면목에 대한 참구조차 초월하는 것이 곧 본래면목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총결로서 단·상의 양변에 대한 허망한 집착을 타파하고, 곧장 중도법신中道法身인 진실한 뜻을 드러내야 할 것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본문 가운데 제3편에서 말하고 있는 주제로서 참선하는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참선에서는 마음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것을 소중하게 간주한다. 만약 마음을 현명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곧 많은 허물이 초래된다. 크게는 마사魔事를 만나면 미쳐서 본심을 잃어버리고, 작게는 거짓을 진실로 삼고 허虛를 실實로 삼아서 일생을 쓸데없이 보내게 되어 선인善因을 가지고도 도리어 악과惡果를 초래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마음을 현명하게 활용하지 못함을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 무릇 어리석게 마음을 활용하는 것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총체적으로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외도가 집착하는 것으로 불법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참선하는 사람들은 비록 색신이 허가虛假인 줄 알면서도 다시 집착한다. 곧 영성은 실實로서 그것이 색신 안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그 영성이야말로 영명靈明 · 각조覺照하고 사상思想 · 분별分別하는 심성으로서 진실한 아我라고 간주한다. 혹 망상을 모두 그치고 잠시도 분별념이 발생하지 않아서 몸은 고목과 같고 마음은 식어버린 재와 같은 경우를 진실한 구경처로 간주한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어리석게 마음을 활용하는 것으로 대단히 불쌍한 일이다. 비유하면 모래를 짜서 기름을 뽑으려는 것이고, 소의 뿔에서 우유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 그것으로는 설령 진겁을 지내더라도 끝내 조금도 얻을 수가 없다. 또한 심성을 아我로 인식하는 자의 경우에 그 아를 알아차리는 것은 누구인가. 만약 심성이 곧 아라면 심성을 알아차리는 그 아는 또 다른 하나의 아이다. 만약 두 가지의 경우가 모두 아라면 그 어찌 한 몸에 두 개의 아가 있는 꼴이 아니겠는가. 모든 경우에 섬세하게 그것을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므로 심성을 알아차리는 그것은 아가 아니다.
또한 잠시도 분별념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진실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자의 경우에는 만약 잠시도 분별념이 발생하지 않으면 목석木石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목석과 다름이 없는 것이 곧 진실한 것이라면 일체의 목석도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어찌 그런 도리가 있겠는가. 또한 그대가 잠시도 분별념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진실한 것이라고 인식하면 그것은 곧 집착이다. 집착은 곧 분별념이 발생한 것인데 어찌 무념일 수 있겠는가.
또한 그대가 만약 잠시도 분별념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부집착을 진실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즉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무엇을 가지고 선을 알고 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라. 결코 경솔해서는 안 된다.
과연 어떤 것이 마음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도리인가. 말하자면 일념으로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를 참구하되 단지 그와 같이 일념으로 참구하는 바로 그것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라. 그와 같이 일념으로 참구하는 그것은 원래 나 자신이 참구하고 있는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어찌 다른 사람이 참구해줄 수 있겠는가.
비록 참구하는 그것이 나 자신일지라도 요컨대 무아의 상태이어야 터득할 수가 있고, 무아의 상태이어야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야흐로 진아이다. 왜냐하면 아는 아를 터득할 수가 없고, 아는 아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눈은 자신을 볼 수가 없고 칼은 자신을 벨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생각해 보라. 만약 아가 아를 터득한다면 두 개의 아가 있다는 허물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약 일념으로 참구하는 그것이 곧 아라면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이 아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만약 두 가지 경우의 아 알아차리는 我와 알아차리는 대상의 我를 가리킨다.
가 아라면 그것은 어찌 두 개의 아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만약 일념으로 참구하고 있는 것이 아가 아니라면 곧 단공斷空에 빠지고 말 것인데, 이 또한 불가不可한 것이다. 혹 일념으로 참구하고 있는 것을 벗어나서 외부에서 아를 찾는다면 미래제가 다하여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명백하게 가장 어려운 도리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성심을 다하여 간절해야만 바야흐로 그 도리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일념으로 참구하는 그것이 아인 줄 알아차린다면 상견의 허물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일념으로 참구하고 있는 그것이 아가 아닌 줄 알아차린다면 단공의 허물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도리이다. 삼갈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제6편에서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조용히 좌선을 하고 있는데 홀연히 어떤 거사가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이에 내가 물었다 : 그대는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답했다 : 제 이름은 오공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특별히 찾아왔으니 바라건대 저한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오래전부터 대사께서 말씀하신 ‘유有를 알면 상견에 빠지지 않고, 무無를 알면 단공에 빠지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어왔습니다. ‘무를 알면 단공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답했다 : 내가 지금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에 대하여 그대의 의견을 답해 보라. 그대는 지금 눈으로 색을 보고 있는가.
그 사람이 답했다 : 예, 보고 있습니다.
내가 물었다 : 마음이 색에 집착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답했다 : 아니요,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물었다 : 그와 마찬가지로 귀로 소리를 듣고 있는가. 코로 향기를 맡고 있는가. 혀로 맛을 보고 있는가.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있는가. 의식으로 법을 알고 있는가. 그대의 마음은 또한 마음은 성·향·미·촉·법에 집착하고 있는가.
그 사람이 답했다 : 아니요,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물었다 :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대 심중의 견해는 어떤가.
그 사람이 답했다 :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 제 심중에는 어떤 집착이 없고 오직 유·무의 견해만 남아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 그대의 그 무라는 견해마저 또한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 사람이 물었다 : 만약 이 무라는 견해마저 또한 버린다면 제 심중의 온갖 것은 무소득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어찌 단공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내가 그한테 ‘오공이여.’ 라고 부르자, 그가 ‘예.’ 하고 답했다.
이에 내가 말했다 : 그것이 어찌 단공이겠는가.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부르니까 그대가 답변하였는데, 그것이 어찌 단공이란 말인가.’라는 뜻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고 답변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에 단공이 아님을 가리킨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 정말 훌륭하십니다.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해공解空을 이해하여 단견의 뜻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재삼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물러갔다.”
해인사 말사 박통사 대웅전. 4월 26일 개원. 경북 칠곡군 석적로 174-2. 10월 21일 박우현 거사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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