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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일곱 가지 교만(七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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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3 15:59  /   조회5,9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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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종교와 사상 중에 정법(正法)과 사법(邪法)을 가르는 기준을 말하라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 보는 관점에 따라 답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사이비 종교와 사법의 특징은 끊임없이 인간 존재의 부정성과 나약함을 부각하며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한다. 이는 곧 인간은 죄 많고 나약한 존재라는 자기인식을 갖게 만들기 때문에 자연히 초월적 대상에 의존하고,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게 만든다. 따라서 삿된 법에 매달릴수록 자신에 대한 불신과 자존감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사로잡혀 수동적 삶을 살게 된다. 

 

불교는 자존의 종교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모든 중생은 내면에 불성(佛性)을 지닌 위대한 존재이므로 밖에서 구원을 구하지 말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자신을 보라고 한다. 인도의 전통종교 브라마니즘에서는 인간은 업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로 보았지만 부처님의 삶은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당찬 선언과 함께 시작한다. 이는 그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 앞에도 주눅 들거나 기죽지 말고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육조혜능 대사는 믿음의 대상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법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할 삼보는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이다. 자성 속에 있는 삼보라는 뜻에서 ‘자성삼보(自性三寶)’ 또는 어떤 고정된 형태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해서 ‘무상삼보(無相三寶)’라고 했다. 나아가 『육조단경』에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님을 믿지 못하면 귀의할 곳이 없다[自佛不歸 無所依處]’라고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자존(自尊)의 종교이자 스스로 지존(至尊)이 되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고, 스스로 자존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고,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이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왜곡되어 스스로 교만하고 타인을 멸시한다면 그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문제가 된다. 자존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과신이나 타인에 대한 우월감에 빠지지 않고 남을 존중하는 겸손함이다. 겁 많은 강아지가 사납게 짖는 것처럼 자존감이 결려된 사람일수록 겉으로 거만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보면 교만은 자존감의 결핍을 감추기 위한 위장막임을 알 수 있다.

 

유식학에서는 여섯 가지 근본번뇌 중에 ‘만(慢, māna)’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도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만은 교만 또는 오만을 의미하는데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을 높이고[高舉] 잘난 체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만이란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타인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본성이며(恃己於他高舉為性), 불만(不慢)이라는 선심소를 방해하여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 작용(能障不慢生苦為業)”이라고 했다.

 

이어서 만심소가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만심소가 있는 사람은 덕(德)과 덕이 있는 사람(有德)에 대해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다(心不謙下). 그리하여 생사에 윤회하는 일이 끝이 없어(生死輪轉無窮)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다(受諸苦).”고 했다. 만심소로 생기는 부정적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고통을 부른다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믿음으로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 자연히 상대방은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여기서 갈등이 생겨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게 된다.

 

둘째, 교만은 자신의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다른 사람에게 겸손할 줄 알고 가르침을 청해야 자신이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잘난 체 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닫히고 만다. 따라서 교만은 타인을 불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성장을 가로막고 고통을 초래하는 칠만(七慢)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 따르면 교만은 칠만(七慢)이라고 해서 일곱 가지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만(慢)으로 자기보다 못한 이에 대해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劣謂己勝)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보다 신분이 낮거나 처지가 못한 사람에게 거만하게 행동하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된다. 소위 갑질이라는 것도 여기에 속하는데, 이는 굳이 불법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반사회적 행동이자 지탄받는 심성이다.

 

둘째, 과만(過慢)으로 자기와 같은 수준의 사람과 대비하여 자신이 더 낫다(等謂己勝)거나, 자기보다 훌륭한 이를 보고 자기와 같다고 여기는 것(勝謂己等)이다. 자신과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잘난 체 하거나,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말하며 자신도 대등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듯이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서로 자신이 잘났다며 티격태격하다 보면 자연히 갈등이 생기고, 우의가 깨지고 조직의 인화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셋째, 만과만(慢過慢)으로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놓고 자신이 더 훌륭하다고 하는 것(勝謂己勝)이다. 자신보다 덕이 높고 뛰어난 사람 앞에서 잘난 체 하는 것은 자신의 못남을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짓이다.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겸손하고 그의 장점을 배우고 받아들여야 내가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 잘난 체 하고 우쭐대면 장점을 받아들일 기회는 사라지고, 오만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된다.

 

넷째, 아만(我慢)으로 5취온으로 구성된 몸과 물질을 자신과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것(五取蘊謂我我所)이다. 우리의 몸과 인식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신과 모든 물질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자연적 요소에서 빌려 온 것이며, 그 어느 것 하나도 처음부터 나였거나 나의 것은 없다. 따라서 육신을 자신이라고 과신하고, 물건을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자 교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간중심의적 착각 때문에 인류의 문명은 자연을 파괴하고, 지속가능한 삶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다섯째, 증상만(增上慢)으로 뛰어난 덕을 얻지 못했음에도 얻었다고 주장하며(勝功德未得謂得) 잘난 체 하는 것이다. 증상만에는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未獲謂獲)’거나,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未證謂證)’고 말하는 것도 포함된다.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이해했다고 하거나,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종교적 권위를 참칭하고 이로부터 생기는 이득을 챙기는 행위는 모두 증상만에 속한다.

 

여섯째, 비만(卑慢)으로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과 대비하여 자신의 부족함은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他多勝謂己少劣)이다. 누가 봐도 자신보다 월등히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은폐하는 사례를 종종 본다. 주변을 돌아보면 훌륭한 사람과 자신을 견주어서 “그도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나도 밥 먹고 화장실 가니 그나 나나 다를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훌륭한 사람과 자신의 차이를 수용해야 스스로 향상하고자 노력하는 법인데 차이를 무시하고 오만에 빠져 있으면 자신의 한계에 갇혀 퇴보하고 마는 법이다.

 

일곱째, 사만(邪慢)으로 실제로 자신에게 아무런 덕이 없는데도 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實自無德謂己有德)이다. 근거 없는 자존감을 뜻하는 근자감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덕이 없으면 없는 줄 바로 알아야 덕을 쌓고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덕이 있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여 자신을 망치고 만다.

 

안으로 불성을 보되 밖으로 공경하라

 

살펴본 바와 같이 교만은 자신의 성장을 가로 막고, 여러 가지 불화를 초래하고, 결국 갖가지 고통을 불러오게 된다. 때문에 당당한 자존감 못지않게 중요한 덕목은 겸손과 타인에 대한 공경의 마음가짐이다. 『화엄경』에서는 일체 모든 중생을 마치 부처님을 섬기듯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라[常修禮敬]고 했다. 교만을 버리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알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승보살이 닦아야할 수행이라는 것이다.

 

겸손과 공경은 그 자체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수행이므로『육조단경』에서도 “안으로 불성을 보고(內見佛性) 밖으로 공경하라(外行恭敬)”고 했다. 안으로는 자신이 부처님과 같이 존엄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으로 주인공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교만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결국 일곱 가지 교만을 꺾고 스스로 겸손하고 타인을 부처님 대하듯 공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수행이자 자기 성장의 길임을 알 수 있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열삼존입상, 보물 제100호. 2020년 11월 24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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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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