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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
바뀌며 이어지는 연기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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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5 09:43  /   조회4,97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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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 유령에 대한 합의 

 

 교환가치를 제외한다면, 주화나 지폐는 아무 가치도 없다. 지폐는 메모장으로 쓰기도 어렵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이 점에서는 A4 용지보다 못하다. 주화나 지폐는 그나마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만, 오늘날 유통되는 화폐의 90% 이상은 컴퓨터 메모리 안에만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월급 대부분을 만져보지도 못한다. 통장에 들어왔다가 어디론가 흘러간다. 화폐 대부분은 정보망을 따라 여기저기를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화폐 자체는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으며, 대부분은 보거나 만질 수도 없다. 화폐는 실체가 없다. 보거나 만질 수 있다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거나 만질 수도 없으니 실체란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은 화폐로 의식주를 해결한다. 교환가치 때문이다. 교환가치는 화폐에 관한 규약 때문에 유지되고, 이 규약은 구성원의 합의로 이뤄진다. 유령에 대한 이 합의가 메모장으로 쓰기에도 불편한 종이에 가치를 부여한다.

 

 실체는 없지만 효능은 있다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극복하고 상호 신뢰가 없는 사람과도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기 위해 화폐를 사용했을 것이다. 원시적인 화폐로는 가축, 곡식, 조가비, 가죽, 옷감, 소금 등이 사용됐다고 한다.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쉽게 부패하지 않고, 오랫동안 쌓아둘 수 있으며, 다른 물품과 교환할 때 어렵지 않게 그 가치를 추정하고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조가비가 예외다. 내륙 지방에서 희귀하다는 점 외에는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교환가치 이외의 다른 효용성이 없는 조가비에 저절로 가치가 부여되기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 사이의 합의가 이뤄지거나 신뢰받는 중앙 집단의 강제력이 있는 보증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치가 보장되기만 하면, 조가비는 가축이나 곡식, 가죽, 옷감, 소금보다 화폐로 사용하기에 훨씬 더 편리하다. 크기가 작고 가벼워서 쌓아두기 편리하고 옮기거나 교환하기 쉬울 뿐 아니라, 부패하지 않고 위조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내재적 가치의 사라짐

 

 구성원 사이의 신뢰나 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화폐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최초의 화폐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어야 했다. 수메르인은 보리를 사용했다. 화폐라기보다는 곡식이지만,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보리를 통해 평가하는 체제를 만들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금속을 화폐로 사용한 것은 4천 년 이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메르인은 처음에는 보리를 화폐로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은의 무게를 달아 화폐로 사용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화폐의 유통은 주화를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7세기 후반에 리디아에서 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화폐의 원조인 리디아 주화는 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은의 무게를 달아 화폐로 쓰거나 금은 합금으로 주화를 만들거나 모두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없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은이나 금은 왕관이나 조각상 등의 조형물을 만드는 것 외에는 실용적으로 거의 쓸데가 없다. 이 점에서 조가비보다 조금 나을 뿐, 청동이나 강철보다 훨씬 못하다. 내재적 가치가 있는 보리에서 내재적 가치가 없는 금속으로 진화하면서 화폐는 발전했다.

 

 실체가 없는 효능

 

 이후 금본위제가 시행됐다. 화폐에 새겨진 액면 가치만큼의 금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1971년에 미국이 브레튼우즈 협정을 파기하면서, 금으로 바꿔주는 화폐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로써 현물을 교환해주는 화폐는 사라졌다. 보리에서 시작하여 금은 합금의 주화를 거쳐 금으로 교환할 수도 없는 것으로 변하면서, 화폐의 실체는 점점 희미해졌고 내재적 가치는 꾸준히 하락하다가 사라졌다. 교환가치는 지금도 계속 하락하고 있다.

 

 실체가 없을지라도 화폐는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다. 인류 역사상 어떤 권력도 화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이 엄청난 효능을 가진다. 그런데 실체가 없이 효능을 발휘하는 건 화폐뿐이 아니다. 사실은 모든 게 다 그렇다. 내 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그렇고, 내 앞에 나타나는 물건도 그렇고, 모든 생명도 다 그렇다. 실체가 있다는 게 착각이다. 왜 그런가? 살펴보자.

 

 물질 - 마술의 세계 

 

 블랙홀은 태양계가 속한 우리은하 중심부에도 존재한다. 지구가 블랙홀의 한 부분이 된다면 지구 전체는 반지름이 1cm도 안 되는 공간으로 압축돼야 한다. 그래야 빛도 탈출할 수 없게 된다.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원자는 속이 텅 비어있다. 

 

 우리 몸도 비어있고 모든 사물도 다 비어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원자의 외곽을 도는 전자 사이의 반발력 때문이다. 물체의 형태를 유지해주는 화학결합만 있다면, 이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한 물체가 다른 물체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몽둥이로 맞으면 아프고, 비어있는 내 몸이 비어있는 의자 위에 앉을 수 있다. 아무런 내재적 가치가 없는 종잇조각의 효능으로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처럼, 비어있지만 효능이 있다.

 

 이런 효능이 있으려면 물체의 형태를 유지해주는 화학결합이 있어야 하고, 화폐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중앙은행이 있어야 한다. 화학결합과 중앙은행만 있으면 마술이 펼쳐진다. 우리 세계는 온통 마술이다.

 

연기 - 상입과 창발의 보편성 

 

상입과 창발의 관계는 앞에서 논의한 예뿐 아니라 아주 보편적으로 성립한다. 이는 우선 인과 관계에서 언제나 성립해야 한다. 씨앗과 싹의 관계가 한 예다. 씨앗이 있어야 싹이 나오지만, 씨앗이 있다고 싹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싹이라는 과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 토양, 햇빛 등의 무수한 연緣이 씨앗이라는 인因에 침투해야 한다. 이 상입에 의해 물은 이전의 물이 아니고 씨앗은 이전의 씨앗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이 상입에 따른 변환으로 씨앗과 물은 싹으로 새롭게 나타난다. 이는 상입과 창발이 개입돼야만 연緣의 도움으로 인因이 과果로 변하는 시간적 인과의 연기緣起가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에서 논의한 원자와 분자, 글자와 단어, 단어와 문장의 관계는 상호 연관과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연기緣起를 보여준다. 이 연관과 의존의 관계가 끝없이 전개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원자가 모여 분자를, 분자가 모여 생명물질을, 생명물질이 모여 세포를, 세포가 모여 생명을 이룬다. 이 생명 중의 하나가 인간이다. 개별적인 인간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가 문화를 만들어내고 문화의 누적적 발전으로 문명이 형성된다. 이 각각의 단계가 모두 상입에 의한 연기의 과정이고 창발을 통한 도약의 과정이다.

 

바뀌며 이어지는 생명 현상 

 

지구상에서 생명 현상은 38억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동안 지구 위에서 살았던 생명종의 수는 40억 정도로 추산된다. 현존하는 생명종의 수는 크게 잡아도 4백만 종을 넘지 않는다. 지구상에 언젠가 살았던 생명종의 수가 현존하는 생명종의 수보다 적어도 천 배는 넘는다. 생명 현상이 이어졌지만, 생명종은 나타났다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를 진화라고 한다. 생명종을 구성하는 개별생명체는 모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개별생명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생식과 유전을 통해 생명종은 상당 기간 존재한다. 바뀌면서 이어지는 이 과정이 지구 생명의 역사다.

 

몸을 바꾸며 이어지는 생명체 

 

개별생명체는 그대로 유지되는가?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십 조 개의 세포도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피부 세포는 6주 정도, 간은 2개월 정도, 적혈구는 4개월 정도 지나면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신경세포나 뼈가 좀 오래 가지만 이들도 10년이면 다 교체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한편으로는 밖에서 들여온 물질로 새 세포를 만들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낡은 세포를 밖으로 내보낸다.

 

우리는 어제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우리 몸은 매 순간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 생명이란 이렇게 바뀌면서 이어지는 흐름이다. 이 점에서 이일하 교수는 생명을 “물질대사의 흐름 속에서 일정한 형태가 나타나는 분수”라고 비유했다. 새로운 물방울로 교체되면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분수처럼, 생명체는 계속 몸을 바꾸면서 자신의 상태를 이어간다. 

 

의존하며 연속되는 무상한 흐름의 중도 

 

낡은 세포를 새 세포로 바꾼다는 것은 생명체가 주변과 물질을 교환한다는 것이며, 이는 생명체가 주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주변에 대한 생명체의 의존성은 소화나 호흡 같은 신진대사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생명체는 이를 통해 몸을 바꿀 물질을 확보하고 몸의 상태를 유지할 에너지를 획득한다. 이게 불가능하면 생명을 잃는다. 생명은 이처럼 주변에 의지하여 자신을 지탱하기 때문에 연기緣起이며, 분수처럼 자신을 바꾸면서 이어가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다.

 

세포든 개별생명체든 모두 순환하면서 바뀐다. 순환하면서 바뀌는 과정은 앞과 뒤가 같은[同一] 것도 아니지만 전혀 다른[異] 것도 아니어서 불일불이不一不異다. 새로운 물방울이 계속 들어오므로 이전과 같지도 않지만, 그 형태를 유지하므로 다르지도 않다. 생명 현상 자체가 그대로 중도中道의 흐름이다. 그런데 생명체만이 아니다 화폐가 흘러 다니고, 생명체가 나고 죽으면서 생명종이 이어지고, 생명종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생명 현상이 이어진다. 지구의 표면과 대기가 변하고 별이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화폐와 세포와 개별생명체와 생명종과 생명 현상과 지표면과 지구 대기와 항성 모두가 전부 무상한 연기의 흐름이다. 실체가 없이 불일불이不一不異한 중도의 흐름이다. 함허득통 스님의 시로 글을 맺는다.

 

生也一片浮雲起 삶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 자체엔 본래 실체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然 생사의 오고감이 또한 이와 같지 않은가. 

 

 

 

서산 마애삼존불. 국보 제84호. 2020년 11월 24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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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학 물리학과 교수. 연구 분야는 양자정보이론. (사)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보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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