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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중국선의 출발: 선수학禪數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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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5 10:41  /   조회9,00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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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국불교의 귀숙歸宿을 ‘조사선祖師禪’이라고 칭한다. 이는 조사선이 석존釋尊께서 시설施設한 법장法藏의 진제眞諦를 잃지 않고 중국 특유의 사상들과 온전하게 융합되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으로 말하자면,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거의 천년에 달하는 사상적 변화를 거쳐 완벽하게 중국인의 사유구조에 적합하게 변용한 것이 바로 조사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사선은 각각의 시절인연에 따라 문자선文字禪, 그리고 그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서 묵조선黙照禪과 간화선看話禪으로 다시 변용하였고, 또한 근대에 이르러 인간불교人間佛敎, 현대에 이르러서는 생활선生活禪의 기치를 세우게 되었다. 가히 2천년에 걸친 조사선의 성립과 변용은 결코 단순히 시대사조時代思潮에 영합한 것이 아니라 대존숙大尊宿들이 세운 불법의 혜명을 계승하여 널리 펼치려는 원력이 깊게 스며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중국선의 출발로부터 현대 생활선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그 사상적 변주를 전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중국선의 본질을 참답게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전체적으로 스물네 꼭지에 걸쳐 사상적 변주를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서한西漢의 무제武帝가 서역과의 교통로를 개척하여 서역인들이 왕래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동한東漢에 이르러서이다. 특히 동한의 환제桓帝는 당시 장안長安에 도래해있던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讖에게 명하여 본격적으로 경전을 번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환제로부터 시작된 역경은 이후 다양한 왕조의 명멸에도 끊이지 않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경에는 중국불교의 중요한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배경이 숨어져 있다. 중국은 상고시대로부터 척박한 지역에 거주하는 주변 소수민족들의 비옥한 중원을 노린 침탈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미 전국시대 이전에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오랑캐[夷]’의 저급한 문화가 ‘중국민족[夏]’의 우월한 문화를 망치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는 ‘이하지방夷夏之防’의 의식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이하론’은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는데 결정적인 방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권을 중심으로 불교를 민중에 이식移植시키려는 시도는 불교에 중요한 공능이 있음을 여실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전국시대를 맞이하여 열국이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각축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통치이념’의 설정이었다. 중국인들의 의식과 사상의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주역周易』의 ‘풍지관괘風地觀卦’에서는 “성인聖人은 신도神道로써 교敎를 세우니, 천하가 그를 따른다.” (주1)라고 하듯이 중국에서의 통치이념은 단순히 통치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성인’과 ‘도’의 범주에 속하는 사상이었다. 그에 따라 전국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였으며,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바로 법가法家의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혹한 법치는 곧 진을 망하게 하였고, 그 뒤를 이은 서한西漢에서는 도가道家의 황로학黃老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황로학에 따른 통치는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이른바 ‘문경의 치[文景之治]’라는 문제와 경제의 태평시대가 40년 동안 이어지고, 그에 따라 도가 사상이 민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삼투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황로학은 한계를 노정하여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유학儒學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하여 사라진 유가 경전을 복원하면서 경학經學이 주류를 이루었고, 경학은 주석注釋에 매몰되면서 역시 통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여 서한은 멸망하게 되었다. 서한을 이은 동한에서는 비록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 기능을 이미 상실했고, 민중들은 ‘문경의 치’를 떠올리며 새롭게 도가 사상을 유행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한의 황실에서는 이미 서역인들로부터 전래되어 있던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불교가 통치이념에 적합함을 아주 빠르게 파악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이하론’에 의한 저항을 의식하여 황실에서는 불교와 사상적으로 유사한 ‘도가’와 융합시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초왕楚王은 황로黃老의 미언微言을 읽고, 다시 부도浮屠를 숭상하여 사당에 모셔 신神과 함께 삼 개월을 결재潔齋하기를 맹세하였다.” (주2)라는 기록이다.

 

이는 『후한서後漢書』 「초왕영전楚王英傳」에 실려 있는 기록을 『불조통기佛祖統紀』에서 전재한 것인데, 중국의 역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불교와 관련된 기록이다. 동한의 황실에서는 이러한 일종의 정치적 실험을 80여년을 진행한 이후에서야 환제에 이르러 역경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시작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 초왕 영의 기사[永平 8年(65)]와 환제의 역경[建和 元年(147)]은 82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파불교의 교학과 근본경전을 전공으로 하는 안세고(사진 1)와 대승경전에 뛰어난 지루가참을 동시에 초빙하여 이른바 소승과 대승을 함께 역출하고 있다는 점은 바로 황실에서 불교의 흐름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동한 시기에는 안세고가 번역한 아비담 교학과 관련된 경전이 주로 유행하였다. 물론 지루가참이 번역한 중국 최초의 반야부 경전인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주3)은 이후 왕필王弼이 현학玄學을 제시하고 중국사상계에 최초로 ‘체體・용用’, ‘본本・말末’ 등의 개념이 출현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이는 조금 후대의 일이다. 초기 중국불교는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을 근거로 하여 ‘선학禪學’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선학을 ‘선수학禪數學’이라고 칭한다.

 

안세고 계통의 선수학이 유행하였던 원인에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한은 서한을 계승하여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하였지만, 당시의 유학은 동중서董仲舒가 제창한 신비적인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사상으로 인하여 점차 종교화되었고, 그에 따라 도가의 황로학 역시 종교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신선방술神仙方術이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동한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방술사들이 조정의 고위관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황로학의 노자는 이미 신격화되었으며,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귀신방술鬼神方術을 융합한 사상들이 점차 형성되었는데, 이를 ‘황로도黃老道’라고 칭하며 이로부터 ‘도교’가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도교에서 추구하는 ‘장생불사長生不死’에 이르는 ‘취구호흡吹呴呼吸’, ‘토고납신吐故納新’, ‘웅경조신熊經鳥伸’, ‘수기守氣’ 등의 양생법은 바로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법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졌다.

 


안세고

 

안세고가 번역한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 『음지입경陰持入經』 등은 당시에 상당히 유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불설대안반수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오吳의 강승회康僧會가 찬술한 『안반수의경서安般守意經序』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문에서는 ‘안반수의安般守意’(주4)를 통하여 육사(六事: 數息・相隨・止・觀・還・淨)를 통하여 육정六情을 대치하는데 초선初禪으로부터 제사선第四禪의 과정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천지를 통제하고, 수명壽命을 길게 하며, 신덕神德을 떨치고, 천병天兵을 물리치며, 삼천三千세계를 움직이고, 모든 시간에 옮겨가며, 팔부사의八不思議를 행하고, 범천梵天이 짐작할 바가 아니며, 신덕神德이 무한하고, 육행六行이 말미암는 것이다.”(주5)라고 하여 신통神通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진西晉의 명승 도안道安은 안세고를 높이 평가하여 그가 번역한 경전들에 서문을 찬술하고 있는데, 『안반수의경』의 서문에서는 “옛 학문을 널리 배웠고, 특히 아비담阿毘曇에 뛰어나 그 역출譯出한 경전에 선수禪數에 관련된 것이 가장 많았다.” (주6)라고 평가하고, 『음지입경』의 서문에서는 안세고의 역경을 “오직 선관禪觀을 펴는 데 힘썼다.”(주7)라고 하며, 다시 『십이문경十二門經』의 서문에서는 “안세고는 선수학禪數學을 잘 열었다.”(주8)라고 평가하고 있다.

 

양대梁代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에 “처음에는 대승의 경전이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고, 선수禪數의 학이 매우 성행하였다.”(주9)라는 문구가 보이는 것처럼 초기 중국불교는 바로 안세고의 역경으로부터 비롯된 ‘선수학’이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위曹魏의 왕필王弼이 반야학을 원용하여 ‘현학’을 제시하고, 이후 배위裴頠, 곽상郭象 등을 통하여 현학이 시대사조時代思潮를 형성하면서 점차 대중들은 반야학으로 관심이 전환된다. 특히 서진시기에 반야부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대승경전들이 대량으로 번역되면서 ‘격의불교格義佛敎’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안세고 계통의 ‘선수학’은 그 세력을 잃게 되었고,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이르러서는 ‘선수학’과 대승의 선관禪觀이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정학定學’이다. 그러나 ‘선수학’은 중국불교의 출발점이고, 이후 전개되는 중국선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

1) 『周易』, 「風地觀卦」 “聖人以神道設敎, 而天下服矣.” 

2) [宋]志磐, 『佛祖統紀』(『大正藏』49, 330a), “誦黃老之微言, 尙浮屠之仁祠, 絜齋三月, 與神爲誓.”

3) 이 경전은 이후 지겸支謙에 의하여 『대명도무극경大明度無極經』, 구마라집鳩摩羅什에 의하여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10권본, 小品般若)로 다시 번역되었다.

4) ‘安般守意’는 梵語 Ānāpānasmṛti를 번역한 것으로, ‘五停心觀’의 ‘數息觀’이고, 意譯으로 ‘止息念’이라고도 한다. 音譯으로는 ‘安那般那’, ‘阿那波那’이고, 간략하게 ‘安般’이라고 한다. 따라서 ‘安般守意’는 ‘安般’의 음역과 ‘守意’의 漢文을 함께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佛光大辭典』 ‘大安般守意經’・‘阿那波那’・‘數息觀’條 참조.

5) [後漢]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康僧會序」(大正藏15, 163b), “制天地, 住壽命, 猛神德, 壞天兵, 動三千, 移諸刹. 八不思議, 非梵所測, 神德無限, 六行之由也.”

6) [梁]僧祐撰, 『出三藏記集』(大正藏55, 43c), “博學稽古, 特專阿毘曇學, 其所出經, 禪數最悉.” 

7) 앞의 책, 6卷(大正藏55, 44c), “其所敷宣, 專務禪觀.” 

8) 앞의 책(大正藏55, 46a), “安世高善開禪數.”

9) [梁]慧皎, 『高僧傳』卷1(大正藏50, 328b), “先是大乘之典未廣, 禪數之學甚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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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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