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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 천당과 극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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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09:33  /   조회37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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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당설

 

 앞에서(고경 제92호. 2020년 12월호)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에서 위인偉人, 걸사傑士로 꼽히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현실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이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여 다른 세계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현실 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어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지 못하고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뛰고 구르며 재주를 넘어 보았자 영원한 행복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바깥 세계에 가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가야만 우리가 찾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하고 모색하던 끝에 천당 곧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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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앉은 분)과 스님들. 해인사

 

 “저 푸른 허공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다. 그 천당에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다. 그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여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못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다. 그 하늘나라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일체 받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에 한번 들어가면 누구든지 영원토록 생명을 누려 영생永生한다. 그곳에서는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즐거움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든지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천당, 곧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의 세계가 저 하늘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괴로움 많은 인간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괴로운 현실을 떠나 저 높고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천당이라는 좋은 세계를 발견하여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선언하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것과 같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참으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다 내버리고서라도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2. 절대적인 믿음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영원한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단조롭고 지혜가 크게 발달되기 전에는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천당설을 이야기하면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인간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사람들은 지혜가 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 그러한 일방적인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믿음을 잃게 되니 사람들은 자연히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당이 어디에 있어. 무슨 하나님이 있다는 거야. 인간들이 현실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위안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지.”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정해 버리면 종교의 기반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절대 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신학자들은 합리(合理), 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신학자가 성(聖) 어거스틴 St. Augustine(주1)입니다.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바로 절대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국민학생에게는 고등수학이 믿기 힘든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한 천당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자들의 그 뛰어난 영혼과 깊은 지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만 소견이 좁아서 그 존재를 의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소견으로 합리, 불합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사회적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지(人智)가 자꾸 발달되자 절대 세계에 대해서, 또 신(神)의 존재 여부를 비롯한 신의 문제에 대해서 자꾸 회의적인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이리저리 펼쳐 보아도 하나님이나 천당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이 점점 크게 일자 그것이 마침내는 종교의 근본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과학의 발달로 그전에는 신비롭게만 여기던 자연 현상이나 우주의 모습이 신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이 갖게 된 당연한 변화입니다. 우주의 모습까지 밝혀낸 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나 천당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 설득력 없는 강요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믿으라고만 강요하기에 앞서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증명해야만 비로소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객관성이 없는 이론은 그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공론(空論)이라 하여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과학자 대회

 

최근의 동향을 보면, 과학계에서 내세우는 것이 모두 다 옳고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츰차츰 생명의 정체를 비롯하여 자연의 법칙이며 우주의 모습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일찍이 세워 놓은 가설들이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런던에서 ‘세계 과학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19세기에 다윈이 진화론(進化論)을 발표하자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때 진화론을 앞장서서 소개하였던 사람이 헉슬리 T. H. Huxley(주2)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손자 되는 사람이 또한 영국의 과학계를 주도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 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명칭은 ‘세계 과학자 대회’이지만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 대해서도 토의를 해보자는 의도가 있어서 종교 문제까지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문제를 토의하는 데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부, 목사, 신학자들도 그 대회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과학자 대회에서 토의된 종교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는 신(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가 앞으로 존속할 수 있는가? 불교와 같이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을 앞에 두고 세계 과학자 대회는 이렇게 신(神)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다는 중대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획기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 신의 존재는 다만 종교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으니, 이천여 년을 내려오며 그들을 지배해 온 전통이요, 사상이며,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일대 혁명이랄 수 있는 이 선언은 결국 믿음이라는 근본 문제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때에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대신학자들이 많이 참석하였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을 전제로 하지 않은 불교와 같은 종교만이 존속할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의를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정작 불교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반가운 일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불교가 신을 전제로 한 종교와는 달리 이 우주과학 시대에 존속할 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불교의 이론 체계 역시 객관성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치고 만다면 불교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에 대한 문제, 종교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현대의 과학자들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이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여 그런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직 과학이 규명하지 못한 신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듯이 과학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가장 차원 높은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성명서를 냈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종교의 존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나 기독교의 종교인 및 신학자들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4. 천주교의 교리문답

 

천주교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교리문답(敎理問答)』(주3) 이라는 책을 최근에 재편집하였습니다. 『교리문답』은 천주교의 모든 교리의 기초가 되는 입문서로서, 처음에 천주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책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익혀야만 신자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렇듯 중요한 책이 재편집되어 나왔는데, 그 첫머리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오래고도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생겼고, 인류가 탄생하여 겨레와 나라를 이루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당연하여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구약성경에 적힌 바와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첫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라 하니 땅이 있고 …… 사람을 만드셨다.”

 

이와 같이 천지만물은 다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저절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구약성경의 출발점이요 근본을 이루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약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교는 형성되었고,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기반이 되어 온 그 근본 사상을 어느 날 갑자기 저들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그 대신 진화론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로서는 실로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까닭에서 갑자기 그들이 절대시하고 가장 신성시해 온 성경과 상충되는 내용의 말로써 『교리문답』의 첫머리를 삼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거의 같은 까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곧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혜가 향상됨에 따라 논리적으로 허술한 점이 많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설이나 인간 창조설이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神話)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事實)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허구를 갖고서, 더구나 우주과학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될 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강요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이 신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논리적인 사실에 입각한, 일대 전환을 선언한 것입니다. 원죄설(原罪說)이라든지 창조설(創造說)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논리적인 근거 아래 재해석하여 『교리문답』을 재편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967년 3월 2일자 조선일보는 ‘현대의 옷을 입는 천주교’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3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창조론에서부터 태도를 전환해야 현대인에게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으며, 더불어 천주교도 영원한 종교적 값어치를 지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만이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천주교보다 보수적이라는 기독교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5. 기독교 무신론

 

다음의 경우를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신관(神觀)의 변화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신학대학이 주최가 되어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신부, 목사,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독교의 신관(新觀) 연구’라는 제목으로 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토의된 내용이 1966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는데, 그 기사 첫머리가 “오늘날 신은 새로운 도전과 시련 속에서 재창조 내지 재발견을 강요당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인 서남동(徐南同)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신은 죽지 않고 변모한다―거듭나지 않으면 매몰운명(埋沒運命)―’이라는 표제가 붙어져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갱신(更新)이냐, 혁명이냐의 기로(岐路)에 섰다. …… 기독교 무신론(無神論)의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초월신은 사라졌다. 신화적인 사고방식이나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떠나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재(實在)라고 하는 현대의 존재론(存在論)이 발전함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독교 무신론의 신학자들은 성부(聖父)가 죽고 성자(聖子)로 나타났고, 다시 성자(聖子)는 죽고 성령(聖靈)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이 새로운 양태(樣態)로서 나타났다. 역사적 예수가 또 형태 변화를 해서 만인의 얼굴과 손으로 분신화신(分身化身)하는 성령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시대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시대가 된다. …… 현대는 우주시대다. 기독교는 과학 및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온 현대에 적응하기 위해 형태 변화를 해야 한다. 이 새 환경에서 기독교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역사적 기록보관소의 종교목록대장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 오늘의 급진적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약성경 약속이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에 다음가는 제3의 기독교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한 번의 출애굽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에 따르면 그들의 하나님 곧 신은 절대자이며 전지전능한 분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 온 기반입니다. 그러나 우주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화적 신은 더 이상 절대자나 전지전능자로 용납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신은 결코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에 기독교가 옛날처럼 계속해서 신화적인 신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갓 기록으로나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화적 신이 아닌 새로운 신을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론(聖靈論)(주4)입니다. 성령론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죽어서 없고 예수도 죽어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죽고 없지만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형태 변화를 해서 성령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화신(分身化身)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사람마다 다 성령이 있으니 이 성령 속에서 하나님을 찾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여기서는 절대적인 하나님 곧 초월신이 아닌, 인간에 내재한 내재신(內在神)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이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들어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다 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 무신론을 주장하는 진보적․급진적 신학자들에 대해 보수 교단의 목사들은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초월적인 신의 존재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언젠가는 이 현실 사회에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대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출애굽을 해야 한다고 서남동 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압박받던 유대 민족이 모세의 지도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으로 탈출하였듯이, 오늘의 기독교도 새롭게 해석된 신을 재발견하고 기독교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원룡(姜元龍) 목사라고 하면 종교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권위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잡지에 ‘과학 앞에 사라진 신(神)’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저 푸른 허공을 아무리 쳐다보고 쳐다보아도 거기에는 천당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노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보려고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 결과 신이 저 허공에는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 죽은 송장에게 매달리듯 사라진 신에 연연해하지 말고 예수교의 나아갈 길을 달리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미국에서 신부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해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신에 대해 회의를 느껴 많은 이가 성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들은 그전에는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는 줄 알고 자신 있게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니 믿으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듯이 남을 위하여 사는 정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을 위하여 노력하고 살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천당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변화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는 더욱 심각하여 현대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일이 또 있습니다. 타임 Time지가 ‘신은 죽었는가’ 하는 표제로 실은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글은 ‘신은 없다’ 하여 무신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타임지는 이 글을 발표하기 위하여 3년 동안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곧 그동안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들을 방문하여 많은 의견을 듣고 종합한 결과 신은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실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신이 있고 없음은 인간의 차원을 떠난 문제인 만큼,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공연히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하지 말라. 우리들 인간은 무조건 신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때에 타임지가 낸 그 특집기사의 지배적인 주장은 “하나님은 없다”는 내용이어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각 신문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기독교 무신론’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을 떠난 절대 세계나 현실을 떠난 초월신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떠난 절대 세계라든지 현실을 떠난 초월신을 주장하던 종교 사상은 점차로 그러한 논리를 버리고 교리를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철학자인 니체(주5)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여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기독교 사회에서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신이 완전히 죽어서 없어졌다는 그의 선언은 퍽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디부터 없던 신을 있는 것으로 잘못 믿어 오다가 뒤늦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뿐인데, 마치 신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듯한 그런 말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전에는 살아 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전까지의 잘못된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으며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삼 “신은 죽었다”는 선언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볼 만큼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假想)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신을 그릴 때 사람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만약 개나 소에게 신을 그리라고 하면 개나 소 모양으로 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그럴 듯한 이야깁니다. 결국 신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쓸데없는 환상을 일으켜서 관념 속에서 신을 만들어 놓고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처음부터 없는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 거짓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실지로 파멸과 자살로 이끄는 행동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지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그 사상을 포기하고 다시 전환하여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6. 극락설

 

그렇다면 불교도 역시 종교인데,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그래서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납득이 안 되는 믿음을 강요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우주과학 시대라고 하더라도, 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불교 자체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구애받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는 그릇되었다 말하면서 자신의 종교인 불교만 옳다 한다고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펼쳐 온 사상이 허위에 차고 거짓투성이라면, 기독교가 절대신을 부정하였듯이, 불교도 마땅히 팔만대장경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터를 닦아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경전에도 거짓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방편(方便)이라 하여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 방편으로 ‘극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꾸 가면 그곳에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하늘 위에 있다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 극락세계는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찾아보든지 어떻게 하든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 옳지 않으면 믿지 않아야 할 터이고, 만일에 옳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설명한 불교 경전으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중에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있으며 또 『무량수의궤경(無量壽儀軌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저 서방세계를 지나 끝없이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화백(三界火宅), 사생고해(四生苦海)의 사바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을 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은 참으로 대단하여 천당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극락세계에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지극하게 부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5역죄(五逆罪)를 지은 사람, 곧 부모를 죽이거나 대성인을 죽인 사람 또는 교단 화합을 파괴하거나 바른 불법을 비방한 사람 등은 아무리 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그와 달리 극락세계를 아홉 등급[九品]으로 나누고서 5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한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는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인 하품하생(下品下生)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무량수의궤경』에서는 5역죄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다 해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가장 좋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자격에 대해서 제각기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5역죄를 지은 사람은 극락세계에 못 간다고 해 놓았는데, 『관무량수경』에서는 하품하생에는 갈 수 있다고 하다 『무량수의궤경』에서는 상품상생에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해 놓았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의 끝부분을 보면 “서쪽으로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부처님은 법계장신(法界藏身)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法界)란 시방(十方)의 법계이니, 곧 부처님 몸이 시방 법계에 가득 차서 그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극락세계가 서방(西方)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東方)에도 있고, 북방(北方)에도 있고, 남방(南方)에도 있고, 땅 밑이나 하늘 위나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是心是佛, 是心作佛]’(주6)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미타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지 마음을 내놓고 달리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얼음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육단심(肉團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 가득 차 있어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똑같이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곧 유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고 무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법계장신(法界藏身)이며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고 밝히지 않고, 왜 서방(西方)에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갈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빙빙 돌려서 말씀했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그 지혜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또 그 사람의 지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가면서 지혜를 자꾸자꾸 향상시켜 가면 마침내 참말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지금까지 한 말은 참말을 알게 하기 위한 거짓말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방편가설(方便假說)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라고 하면, 그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기가 극락이라니 마치 사람을 놀리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현실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은 거짓된 말이라고 부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저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으니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외고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수행에 열중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염불을 부지런히 외면서 수행에 힘쓰다 보면, 그러는 사이에 지식이 늘고 지혜가 향상되면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힘이 차츰차츰 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얼마 뒤에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이르면, 앞에서 일러준 말은 방편일 따름이요, 사실은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이며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7. 일승법

 

그 방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가장 골자가 되는 것이 바로 「방편품(方便品)」입니다. 거기에 보면 “시방세계 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十方國土中 唯有一乘法].”(주7)고 하고 있습니다.

 

일승법이란 이 세상에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하기 위해 2승(二乘), 3승(三乘)의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설은 비록 사실 그대로의 참말은 아니지만 수단으로서 인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일승을 말씀하시기 위해 2승과 3승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육조(六祖)스님도 극락세계에 대해 “부처님이 극락세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일에 사실이라면 동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서방의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만, 서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아직 지혜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방편설을 쓰셨지만, 나는 지혜가 발달된 사람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방편을 쓰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결국 육조스님의 뜻은 서방 극락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그대로가 극락세계이며, 자성(自性) 그대로가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도 내 마음속에 있고 아미타불도 내 마음속에 있으니, 서방이든 동방이든 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속에 있는 극락세계를, 마음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행복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종교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방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방편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옆으로 가는 극락은 참말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요즈음에는 아이들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교리를 바꾼다느니 새 시대에 맞게 그 뜻을 재해석한다 하지만, 불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써 왔던 방편가설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방편가설을 버리면 남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승(一乘)인데 그곳으로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며, 중생 모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음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곧 불교의 기본 태도는 일승법인데,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면 우리는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부처님 법 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주)_


1) 4세기에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성직자로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지향했던 그의 신학적 태도로 인해 신학과 철학 및 일반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스콜라 학풍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는 19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생물학자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많은 영향을 받고, 빼어난 수필로 진화론을 널리 알리는데도 앞 장 섰다.

 

3) 교리문답(敎理問答)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를 담고 있는 문서를 ‘교리문답서’ 또는 ‘교리서’라고 한다. 교리문답을 뜻하는 낱말 ‘카테키즘(catechism)’이란 애초 ‘들려주다’ 혹은 ‘가르쳐주다’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즉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리를 설명해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다 중세(11세기)에 들어 문답체로 된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를 통해 각 교파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4) 성령론(Pneumatology)은 신학의 한 분야로 주로 구원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제3위가 되는 하느님으로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교회 공동체에 속한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5)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리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승 저편에 있는 하늘나라와 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했다.

 

6)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T12, p.343a)

 

7)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T9, p.7c), “十方佛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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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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