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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 지성들 활동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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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0:29  /   조회4,4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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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불교잡지 산책 2 |  『해동불보海東佛報』(통권 8호, 1913.11-1914.6)

 

 

[한국의 근대 불교사에서 인상적인 국면의 하나는 1900년 전후로 경허 성우가 해인사와 범어사를 중심으로 선풍을 부흥시켜 계승시켜 나간 역사적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서구와 일본, 중국을 통해 유입된 불교 지식이 한국 불교학의 기본 틀을 형성해 간 자취다. 이 두 가지 사실은 19세기와 20세기의 단절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한다. 과연 19세기 이전의 불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를 통해 근대의 지식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왔는가.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19세기의 불교학, 불교문화와 20세기의 그것 사이에 놓인 지속성을 설명한 연구는 많지 않은 듯하다. 1913년 발행된 『해동불보』는 해외 불교학이 이 땅에 유입되기 시작하는 시기의 모습과 함께, 20세기 이전 불교학과 문화의 전통이 어떻게 근대 지식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갔는지 밝혀주는 잡지로서 주목할 만하다.] 

 

발행 정보(사진 1)

 

 『해동불보』는 1913년 11월 창간되어 1914년 6월, 통권 8호로 종간되었다. 조선 선교양종 삼십본산 주지회의소(원장 이회광)의 기관지이며, 발행 기관은 해동불보사, 사장 겸 편집인은 박한영이다. 1914년 1월 기준으로 당시 주지회의소 임원은 고등불교강숙 강사 박한영, 불교포교당 포교사 진진응, 해동불보사 사장 겸무 박한영, 편집 최예운(최동식)이었다. 박한영은 고등불교강숙의 강사(숙장)이자 해동불보사의 사장으로 당시 불교 교육계와 언론계의 대표 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사진 1. 해동불보 2호 표지. 

 

기존 교단의 기관지 『조선불교월보』에 이어 『해동불보』도 박한영과 최동식이 간행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굳이 잡지의 제명과 회사명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해동불보』 창간호의 「사고」에는 이를 ‘소분관계小分關係’라고만 표현하였다. 그런데 창간호의 「본보의 규약」에는 『조선불교월보』와의 차별성이 부각되어 있다. 즉 『해동불보』는 ‘대승의 불학을 천화하는 것을 종지로 삼는다.’고 하였고, ‘순수한 학술적 이치를 탐구하고, 중생의 덕성을 계도’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는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수행인, 학생, 교양인, 부인계 등 폭넓은 독자층을 상정하고 대중성을 표방했던 기존 『조선불교월보』의 「사고」와 사뭇 다르다. 대승불교의 교학을 연구하고 확산시키겠다는 학술적인 잡지를 표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 선암사 강원. 

 

『해동불보』는 「관보초官報抄」를 두어 주지인가와 이동 소식을 주로 공표하였고, 「잡화포雜貨舖」를 두어 각지의 포교당 증설 소식, 행사, 교육기관 활동 등을 소개하였다. 전자는 행정 사실의 고지, 후자는 교계 활동의 보도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근대 불교잡지는 기관지로서 이러한 행정과 행사 동정을 보도하는 기관지의 속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잡지 지면의 대부분은 발행인의 경향에 따라 학술, 문화, 문예 등 다양한 내용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해동불보』는 불교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내용보다는 불교 교학의 탐구라는 학술성에 치우쳐 있다.

 

발행인과 기자 - 박한영과 최동식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은 19세기 전반 선 논쟁의 중심에 있던 순창 구암사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 화엄학, 계율학에 대한 고승대덕의 지식을 체득하였다. 석전은 백파긍선白坡亘璇-설두유형雪竇有炯-설유처명雪乳處明으로 이어지는 구암사 강학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백파긍선-침명한성枕溟翰醒-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로 이어지는 선암사의 강맥을 동시에 계승하였다. 1910년대에 화엄사의 진진응震應, 선암사의 장기림(錦峰)과 함께 불교계의 3대 강백講伯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렇듯 박한영은 19세기의 불가 지식의 계보를 잇는 한편으로 20세기 근대 불교학의 동향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진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이 지점이 불교고등강숙의 숙장으로 그를 초빙한 이유이자,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에 유학한 불교유학생들이 그를 정신적 좌장으로 삼았던 이유다. 이는 또 1920년대 이후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 등 지식인이 국학 연구의 중요 원천지식 제공자로서 그를 신봉했던 이유기도 하다. 박한영이 ‘청년靑年 승계僧界의 사조思潮를 좌우左右’한다는 이능화의 기록(『조선불교총보』 4호 p.1, 1917.6)은 공연한 찬사가 아니다.

 


사진 3. 해동불보 2호 무봉탑(박한영 학술논문). 

 

최동식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해동불보』에 여러 필명으로 등장하여 존재감이 매우 크다.(猊雲散人, 晩香堂, 曹溪沙門, 菊人惠勤, 秋堂道人, 槐翁道人, 猊雲惠勤, 晩香堂惠勤, 晩香堂野人, 浮玉山人惠勤, 晩香堂秋人, 秋堂菊人, 晩香堂菊翁, 餐菊老人, 秋堂餐菊老人, 曹溪沙門猊雲, 曹溪沙門惠勤, 南郭子) 창간호에 수록된 그의 자축 한시(「自題六十三回生日淸凉寺」)에 보면, 그는 1913년 8월 11일 63회 생일을 맞이하여 청량사에 주석하였다. 이를 역산하면 그는 1851년생으로 박한영보다 20세 선배가 된다. 그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7)에도 서문을 썼는데, 이능화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신라 문창후 최치원의 후손으로, 집안은 대대로 호남에 살았다. 조계산 선암사에서 출가 득도하였으며, 경붕익운 대사 밑에서 공부하였다. 이미 불학은 넉넉했으며, 아울러 세속의 전적들도 익혔다. 요즘 승려사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는데, 진실로 윗대에 부끄러움이 없다.’라 하였다. 아마도 그는 박한영의 스승인 경운원기와는 법형제였을 것이다(사진 2).

 


사진 4. 해동불보 4호 대원경 란(사산비명). 

 

『해동불보』의 목차에 수록된 글의 편수는 124편이다. 이중 박한영은 35편, 최동식은 36편의 필자로 등장하며, 기자 명의로 29편이 수록되었다. 기자는 박한영과 최동식을 포괄하므로, 결국 박한영과 최동식의 글이 『해동불보』 전체 글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해동불보』는 선암사의 강맥을 공통의 자산으로 삼고 있는 두 인물, 즉 박한영과 최동식의 2인 잡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청년의 교육과 포교

 

박한영은 여러 편의 논설에서 현재의 조선불교계에 인물이 없는 것은 영재를 ‘교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면서(「敎養徒弟는 紹隆三寶」, 1호), 포교를 위한 청년 도제 교양을 위해 불교의 교재개발이 필요하며, 대승 교리를 더욱 연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將何以布敎利生乎아」, 2호) 조선의 불교계도 기독교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청년도제를 양성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등 미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佛敎의 興廢所以ᄅᆞᆯ 深究ᄒᆞᆯ 今日」, 4호) 이어 기존의 노승들이 학식이 부족하고 견문이 좁으며 완고하고 호기가 없어 불교를 유신惟新하기 어려우니, 미래의 불교 청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실천해 주기를 당부하였다.(「靑年佛敎界에 對하야」, 5호)

 


사진 5. 해동불보 1호 무공적 란(초의 한시). 

 

이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10년 탈고하고 1913년 5월 25일 간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의 불교개혁의 논리와 이어지는 내용이다. 만해가 불교서관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출판하면서 표제 글씨를 박한영에게 의뢰한 것(“石顚散人 籤”)은, 출판의 선후와 상관없이, 9년 선배인 박한영과 만해의 개혁 논리에 상호 공감대가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교학 연찬과 불교사 자료 발굴(사진 3)

 

박한영은 실제로 『해동불보』를 자신의 학적 탐구의 실제를 발표하며, 불교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교양’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의 설법과 세계의 포교」(3호)에서 ‘중류 이상의 수준에 맞는 설법’이 없는 것이 최근 우리 설법의 문제라 지적하며, 세계의 포교 방식인 논리학(3단논법)과 상식(과학 철학 문학 사회학)을 철저히 연구하여 포교할 것을 주장하였다. 6회에 걸친 연재물 「법보단경해수일적강의法寶壇經海水一滴講義」(3-8호)는 육조 혜능의 『법보단경』을 ‘역술譯述’한 것이다. 그는 또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聖住寺無染國師碑」(4-8호)을 발굴하여 본문에 현토를 달고 상세한 주해를 달아 연재하였다(사진 4). 그가 대흥사에 소장된 자하산인紫霞山人의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를 발굴하여 현토를 달아 소개하고(1-3, 5호), 자하산인이 다산 정약용이라는 것을 밝힌 것(8호)은 이 시대 불교사 연구의 성과임이 분명하다(편자인 ‘기자’는 박한영으로 판단한다). 박한영의 학적 탐구는 이처럼 근대에 유입된 신학문, 선종의 정전에 대한 번역, 한국 불교사의 원천 자료 발굴과 주해 등 다양한 편폭을 보여준다.

 

최동식은 여러 필명과 ‘기자’ 이름으로 많은 사료를 소개했는데, 이는 한국불교사의 정립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사료가 된다. 무의자 혜심의 시(조계록), 실상사 통도사 송광사 영원사 용두사 김해 은하사 사적 관련 비문, 시, 기문이 대표적이다. 인물로는 설파대사, 환성대사, 편양당, 풍담당, 함명당, 대각국사, 침명당과 관련된다. 특히 선암사와 관련된 함명당비의 음기陰記와 침명당 행장은 최동식이 직접 한문으로 작성하여 수록하였다.

 

19-20세기 지성의 계보와 교류

 

『해동불보』에는 19세기에 진행된 유가와 불가 간의 지성의 교류 양상이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1914년을 기준으로 당대 불교계 인사들의 교유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박한영이 시를 사숙私淑한 고환 강위(1820-1884), 강화학파 학자로서 정인보의 스승인 영재 이건창(1852-1898), 구례 출신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1910), 이들은 한문학에서 애국계몽기의 ‘한말사대가’에 포함되는 우국지사이다. 잡지에는 이들과 선암사의 함명, 경운, 장기림(금봉)과 나눈 교류의 자취가 한시 작품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장기림의  「書寧齋學士叩擎雲長老偈後」, 강위의 「曹溪南庵與函溟禪師戱演川頌」, 이건창의 「寶城匪所贈錦峰上人(2首)」· 「梅題二絶贈別擎雲長老」, 황현의 「次曹溪山大乘庵韻」 등)

 

이외에 김윤식과 함께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한 하정 여규형(1848-1921), 구례 출신으로 보이는 백겸산(낙륜), 대운 왕일칙 등은 박한영, 장기림과 시회를 같이한 시인, 문장가들이다. 『해동불보』의 「무공적無孔笛」은 한시를 수록한 지면인데, 박한영, 장기림, 김상숙, 최동식은 물론 다양한 거사가 참여한 시회의 결과물을 다수 수록하였다. 시회의 공간도 개운사, 봉은사, 강화도, 평양, 북한산성, 승가사 등 다양하다.

 

1910년에 만해와 함께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던 송광사 김종래와 박한영의 서신 교류, 추사의 아우 김명희와 초의 선사 간의 다시茶詩에 대한 박한영의 소회를 담은 한시(사진 5), 송광사 금명 보정과 최동식의 서신 교류 등은, 근대불교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것이지만, 19-20세기 근대불교 지성의 횡적 교류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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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불교가사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불교문학의 다양한 양상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불가 한문학의 번역과 연구, 근대불교잡지의 문화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시가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근대성』 등이, 번역서로 『정토보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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