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 ‘여읨’으로 폭류 건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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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1:25 / 조회6,281회 / 댓글0건본문
법수 2 – 갈애와 열반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명칭nāma, 마음citta, 갈애taṇhā, 열반nibbāna 등은 한 단어로 된 불교용어다. 『상윳따 니까야』 제1권에서 ‘일법一法’이라는 법수 아래 명칭, 마음, 갈애, 열반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 명칭과 마음은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서 다루지 못한 갈애와 열반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딴하-숫따(Taṇhā-sutta, 渴愛經)」(SN1:63)에 의하면, 어떤 천신이 붓다에게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닙니까? 어떤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갈애가 세상을 이끌고 갈애에 의해 끌려 다니며, 갈애라는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SN.Ⅰ.39)고 답했다.
이 짧은 문답 속에 세상의 작동 원리가 함축되어 있다. 즉 세상은 갈애에 의해 끌려 다니고, 갈애라는 ‘하나의 법’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갈애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말한다. 인간은 이 원초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갈애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이른바 갈애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붓다는 “갈애가 세상을 이끌고 갈애에 의해 끌려 다닌다.”고 한탄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대립은 무지와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지와 탐욕을 불교용어로는 무명(無明, avijjā)과 갈애(渴愛, taṇhā)라고 한다. 한 개인은 물론 전 인류가 이 무명과 갈애로 인해 불행해진다. 무명이란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말하고, 갈애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말한다. 무명과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윤회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무명과 갈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무명과 갈애 때문에 현세에서는 괴로움을 받고 내세에서는 악처(惡處, duggati)에 태어나 고통을 받는다.
또한 갈애는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갖고 그 사람을 속박하기 때문에 거센 물결[暴流] 혹은 족쇄나 올가미에 비유하기도 한다. 「반다나-숫따(Bandhana-sutta, 束縛經)」(SN1:65)에서 “갈애를 버려야 모든 속박을 자르게 된다.”(SN.Ⅰ.40)고 했다. 즉 갈애를 버려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상요자나-숫따(Saṃyojana-sutta, 結縛經)」(SN1:64)에서 “갈애를 버려야 열반이라 불리게 된다.”(SN.Ⅰ.39)고 했다. 이처럼 갈애와 열반은 정반대 개념인데, 하나로 묶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천신이 붓다에게 “스승이시여mārisa,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벗이여,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센 물결을 건넜다.”(SN.Ⅰ.1)고 답했다. 이 대화는 「오가-숫따(Ogha-sutta, 暴流經)」(SN1:1)에 나온다. 여기서 거센 물결은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거센 물결을 건넜다는 것은 열반을 증득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붓다는 머무르지 않고[appatiṭṭhi] 애쓰지도 않고[anāyūhaṃ] 폭류를 건넜다고 한다. “멈추지 않고”는 번뇌 때문에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붓다는 번뇌와 속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아등바등하지 않고”는 잘못된 정진을 통해 애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바르게 수행했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폭류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감각적 욕망의 폭류(kāma-ogha, 欲流), 존재의 폭류(bhava-ogha, 有流), 견해의 폭류(diṭṭhi-ogha, 見流), 무명의 폭류(avijja-ogha, 無明流)이다. 감각적 욕망의 폭류는 눈・귀・코・혀・몸을 통한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다. 존재의 폭류는 색계나 무색계나 선정에 대한 집착이다. 견해의 폭류는 외도들이 주장했던 62가지 견해에 대한 집착이다. 무명의 폭류는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 네 가지 폭류를 번뇌(asava, 漏) 혹은 속박(束縛, yoga)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웃디따-숫따(Uḍḍita-sutta, 묶임경)」(SN1:67)에서도 천신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에 의해 세상은 올가미에 걸려 있고, 무엇에 의해 에워싸여 있습니까? 무엇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으며, 어디에 세상은 확립되어 있습니까?” 붓다는 이렇게 답했다. “갈애에 의해 세상은 올가미에 걸려 있고, 늙음에 의해 에워싸여 있다.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고, 괴로움 속에 세상은 확립되어 있다.”(SN.Ⅰ.40)
“갈애에 의해 세상은 올가미에 걸려 있다.”는 것은 갈애라는 밧줄이 말뚝이라는 올가미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갈애는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을 상징하고, 말뚝은 형상・소리・냄새・맛・감촉・생각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六境]을 상징한다. 즉 육근이라는 갈애가 육경이라는 말뚝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한다는 뜻이다.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죽을 때 고통스런 느낌이 너무 강해서 마치 산에 가려진 것처럼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다고 말한 것이다. “괴로움 속에 세상은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괴로움 위에 세상이 서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바세계를 ‘고해苦海’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서는 갈애가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가 바로 갈애이다. 「담마짝까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avattana-sutta, 轉法輪經」(SN56:11)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이다. 그것이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이른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SN.Ⅴ.421)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ponobbhavika]”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 즉 재생再生을 의미한다.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nandī rāgasahagatā]”는 갈애가 즐김과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tatra tatra-abhinandini]”은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주석서에서는 세 가지 갈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欲愛)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有愛)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이 함께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정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 無有愛)란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 함께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
이와 같이 경에서 언급한 세 가지 갈애 외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유에 대한 욕망,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 등이 있다. 그런데 적당한 욕망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욕망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을 참으로 실천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은 분명히 세상의 일반적인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채우고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른다. 결국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욕망의 격정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괴로움은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갈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두 번째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 것이다.
세 번째는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완전히 소멸시킨 경지, 즉 열반(涅槃, nibbāna, Sk. nirvāṇa)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보면 무명無明이 지멸止滅하여 모든 번뇌가 소멸해 버린 경지를 가리킨다. 「전법륜경」(SN56:11)에 의하면,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떠나 소멸함, 버림, 포기, 해탈, 집착 없음이다.”(SN.Ⅴ.421) 여기서 “남김없이 떠나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란 열반의 동의어이다. 열반에 이르면 갈애는 남김없이 떠나고 소멸한다. 결국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포기, 해탈, 집착 없음[無執着]은 열반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소멸’이란 곧 열반을 의미한다.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런데 열반은 일상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열반의 동의어는 긍정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주로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열반은 ‘갈애의 멸진[愛盡]’, ‘형성되지 않은 것[無爲]’, ‘탐욕 없음[無貪]’, ‘적멸(寂滅)’, ‘불이 꺼짐’ 혹은 ‘소멸’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용어로 자주 언급된다.
니까야에서 발견되는 열반에 대한 정의 몇 가지를 살펴보자. 즉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 모든 집착을 포기함, 갈애의 멸진[愛盡], 탐욕을 여읨[離欲], 소멸, 열반이다.”(SN.Ⅰ.136) 또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위(無爲)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은 탐욕의 멸진[貪盡], 성냄의 멸진[瞋盡], 어리석음의 멸진[癡盡]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무위라고 부른다.”(SN.Ⅳ.359) “라다Rādha여, 갈애의 멸진이 바로 열반이기 때문이다.”(SN.Ⅲ.190) “비구들이여, 형성된 법[有爲法]들이나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들에 관한 한 탐욕을 여읨[離欲]이 그 법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불리나니, 그것은 바로 교만의 분쇄, 갈증의 제거, 집착의 근절, 윤회의 단절, 갈애의 멸진, 탐욕을 여읨, 소멸, 열반이다.”(AN.Ⅱ.34) 이러한 것들은 모두 열반을 설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인 갈애를 극복하지 않으면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흥덕왕릉 부근 소나무 숲의 아침 빛. 부산 고심정사 이수영 거사 1월 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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