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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사상]
이것은 본래 청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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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30  /   조회5,8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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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3) / 마음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增支部)』의 「하나의 모음[一集]」에서는 한 단어로 이루어진 법수法數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하나의 법[一法]’이라는 항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가 ‘마음citta’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마음을 다양한 비유로 설명한다. 그 가운데 대승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구절이 『앙굿따라 니까야』(AN1:5:1)에 나온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로부터 벗어났다[AN.Ⅰ.10,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 ti.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n ti].”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구절은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의 원형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심성본정心性本淨 객진번뇌客塵煩惱’라는 경전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내용이 한역 아함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심성본정설은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와 마하상기까(Mahāsaṃghika, 大衆部)에서 주장했던 사상이다. 사르와스띠와다(Sarvāstivāda, 說一切有部)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는 반대로 ‘심성본부정설心性本不淨說’을 주장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확대 해석하여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위에서 인용한 빨리어 빠밧사라pabhassara는 ‘빛나는, 매우 밝고 깨끗한, 청정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빛난다’ 혹은 ‘이 마음은 청정하다’고 번역한다. 주석서에서는 이 마음을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 有分心)’이라고 해석한다. 즉 마음에는 색깔이 없고, 색깔이 없기 때문에 깨끗하여 빛난다는 것이다. 상좌부에서는 이것을 약간 변형시킨 ‘바왕가-윈냐냐bhavaṅga-viññāṇa’, 즉 유분식有分識을 윤회의 주체로 보았다. 이러한 상좌부의 해석은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된다. 그래서 후대 논사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빨리어 ‘아간뚜까āgantuka’는 ‘다가오는’이라는 뜻이다. 대림 스님은 ‘객으로 온 것들’이라고 번역했다. 주석서에서는 ‘아간뚜까’를 잠재의식[유분식]과 함께 생기지 않고 나중에 빠른 포착의 순간에 생긴 것들이라고 해석한다. 즉 본래의 마음은 청정한데, 나중에 생긴 번뇌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또 빨리어 ‘우빡낄레사upakkilesa’는 수번뇌隨煩惱로 번역되는데,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라는 뜻이다.

 

  주석서에서는 심성본정과 객진번뇌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혹은 스승과 제자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른바 행실이 올바른 부모나 스승이 행실이 나쁜 아들이나 제자 때문에 불명예를 얻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정한 잠재의식’과 ‘다가오는 번뇌의 오염’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心性本淨]’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심성본정 객진번뇌’를 주장하는 이 구절은 위에서 인용한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만 나타난다. 또 이 구절은 니까야의 다른 곳에서 설명하는 마음과는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대림 스님은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혹시 붓다가 본래 자성이 청정한 영원불멸하는 마음을 설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초기경들 전반에서 예외 없이 마음은 항상 연기적 존재이고 조건발생이고 연이생緣以生일 뿐이라서 이러한 마음은 대상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조건생・조건멸이고,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래서 바로 위의 경에서 마음은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비유를 들 수조차 없다고 하셨다. 마음을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상정해버리면 그것은 즉시에 외도의 자아이론과 같아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림 옮김,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p.88)

 

  니까야에서는 마음이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설명한다. 이른바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 마음이다. 이처럼 마음은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비유를 들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불변하는 어떤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만약 마음을 불생불멸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 바라문교에서 주장하는 아뜨만(ātman, 自我)의 개념과 차이가 없게 된다. 대림 스님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구절이 ‘심성본정설’의 원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한편 부파불교 시대의 논사들은 심성이 본래 청정한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대중부에서는 “심성心性은 본래 청정한데 객진客塵의 수번뇌隨煩惱에 섞여 물들게 되어 부정不淨하게 된다고 설한다(T49, p.15c).” 이것은 중생들의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지만, 객진의 수번뇌에 섞여 물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앙굿따라 니까야』(AN1:5:1)의 내용과 일치한다.

 

  『성실론成實論』에 “따라서 심성은 본래 청정하지 않고 객진번뇌 때문에 깨끗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부처는 중생을 위해 이른바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객진번뇌에 물들면 그 마음은 깨끗하지 않다고 설한다. 또한 부처는 나태한 중생들을 위함이다. 만약 마음이 본래 청정하지 않다고 들으면, 다시 심성을 개조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며, 따라서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심성은 본래 청정하다고 설한다(T32, p.258c).” 이와 같이 『성실론』에서는 마음이 본래 청정하지 않다고 하면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심성본정설을 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권상卷上에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오식五識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은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이 오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의명意名은 당연히 의義가 없어야 한다(T31, p.114a).”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본래 청정한 마음이 없다면 더러움에 물든 마음[有染汚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섭대승론』에서도 심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후 대승불교의 경전과 논서에서는 이 심성본정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끝까지 ‘심성본부정설心性本不淨說’을 주장했다. 심성본부정설은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니라는 설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권27에 의하면, 설일체유부에서는 “간혹 어떤 사람은 ‘심성은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들은 ‘마음의 본성은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그들의 그러한 집착을 중지시키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니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T27, p.140b).”고 주장했다. 이것은 설일체유부에서 대중부와 분별론자들이 주장하는 심성본정설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어떤 논리적 근거로 심성心性의 불청정설不淸淨說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대비바사론』 권27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면 어째서 객진번뇌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 모양이 청정해지지 않는 것인가? 만일 객진번뇌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비록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상응한다 하더라도 모양이 청정해지지 않는다면 역시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은 객진번뇌의 모양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지 않을 것이니,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T27, p.140bc)

 

  위 인용문에서는 두 가지 근거로 ‘심성본정설’이 잘못된 주장임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 객진번뇌에 의해 더러워졌다면, ‘왜 객진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같이 깨끗해지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둘째는 객진번뇌가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여 청정해지지 않는다면 객진번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대비바사론』 권27은 계속해 분별론자의 심성본정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 본성이 청정한 마음은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긴 것인가 같은 때에 생긴 것인가? 만일 먼저 생겼다면 마음은 생긴 뒤에 머물러서 번뇌를 기다려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두 찰나[二刹那]를 지나며 머물러야 하므로 종(宗)을 어긴다는 허물이 있다. 만일 같은 때에 생겼다 하면 어떻게 마음의 본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종은 미래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다른 종의 바르지 못한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기 종의 올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T27, p.140c)

 

  위 인용문은 설일체유부에서 대중부와 분별론자들이 주장하는 ‘심성본정설’이 허구임을 논증한 것이다. 즉 설일체유부에서는 ‘본성정심本性淨心이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긴 것인가? 아니면 동시에 생긴 것인가?’라고 묻고, 분별론자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논증하고 있다. 첫째는 본성정심이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겼다고 한다면 뒤따라오는 번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두 찰나[二刹那] 동안 머물러야 한다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둘째는 본성정심이 객진번뇌와 동시에 생겼다고 한다면 마음의 본성이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성본정설’을 거부하고, ‘심성비본청정설心性非本淸淨說’을 주장했다.

 

 

경주 윤을곡 마애불좌상, 경북 유형문화재 제195, 통일신라시대. 경주시 배동 산 72-1. 20191116일 박우현 거사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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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에서 학사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샤카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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