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사상]
고려의 불교·문화 체계적으로 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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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37 / 조회5,459회 / 댓글0건본문
『고려사』(사진 1)는 세가世家·지志·열전列傳·표表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이다. 1451년(문종 원년) 8월 김종서 등이 왕명으로 태조-공양왕까지 32명의 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 46권, 천문지天文志-형법지刑法志까지 10조목의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1,008명의 열전列傳 50권, 목록 2권을 합해 총 139권의 고려의 정사正史 기록이다. 『고려사』는 고려 말기 이제현李齊賢·안축安軸·이인복李仁復 등이 『국사國史』를 편찬하고자 한 연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제현이 태조에서 숙종까지의 본기本紀만을 편찬했을 뿐 그 나머지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1392년(원년) 10월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에게 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다. 이에 따라 1395년(태조 4) 정월에 정도전·정총에 의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서술된 37권의『고려국사高麗國史』가 편찬되었다. 그러나 『고려국사』는 단시일에 편찬되고 또 편찬자인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하여 비판받았고, 태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 건국 과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후 1414년(태종 14), 1419년(세종 원년), 1423년(세종 5),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 1446년(세종 28)의 시간을 지나면서 여러 차례 고치고 보충하여 편찬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이 전왕조사前王朝史를 정리하려는 노력은 『고려국사』 편찬으로부터 시작해 57년 만에『고려사』로 마무리되었다. 조선 초기의 어수선한 정치와 권력의 속사정 때문으로 해석된다.
사진 1. 고려사.
『고려사』 편찬자들의 고려시대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초기에는 당나라의 정치·군사·토지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된 국가체제를 성립시켰으나, 무신정권으로 국가제도가 무너짐으로써 고려사회는 파탄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신정권의 폐단은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인식되었다. 즉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기술한 것은 조선왕조의 건국이 정당한 것이었으며, 문文을 숭상하는 숭문주의崇文主義에 따른 무신에 대한 부정과 지나친 비판의 여지도 있었다. 또한 불교가 고려 멸망의 또 다른 원인으로 인식하였다. 왕과 왕실, 그리고 지배층의 지나친 불교숭배가 나라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빈번한 국가적 불교행사 개최와 대규모 사찰 건립 등은 나라의 경제를 낭비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스님들의 사치와 막행막식莫行莫食은 불교사상과 신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피지배층의 불만이 노골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비록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아울러 이전 왕조인 고려의 무신정권기-우왕·창왕기까지의 폐정弊政을 잘못함이 없도록 타일러 주의시켜 권계勸戒하고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지만, 사료史料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志는 편찬자들의 역사인식의 한계성으로 인해 고려의 정치제도와 풍속 등의 기술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지志는 예·악·천문·오행·식화·형법·지리·관직 등의 통치제도와 문물·경제·자연현상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기록한 것이다. 특히 열전列傳은 은일전隱逸傳과 석로전釋老傳을 설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설정하지 않은 것은 역사를 찬술하는 일군의 젊은 학자들의 인생관·종교관의 편협성과 조선왕조가 성리학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도교와 불교에 관련된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불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와 종교문화가 지닌 특성, 그리고 많은 문화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파견하여 분향焚香하고 수도修道하게 함으로써 각각 자신의 직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의 청탁[請謁]을 받아 각자의 사사寺社를 경영하며 서로 싸우며 바꾸고 빼앗는 일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 둘째,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地德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祚業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新羅 말에 다투어 사원[浮屠]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여섯째, 내가 지극하게 바라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 있으니,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하라. 나도 처음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연등회‧팔관회를 하는 날짜가 국가의 기일[國忌]을 범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겠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이대로 시행하라.
(『고려사』 권2, 세가世家 2 태조 26년 4월조, 「훈요訓要」 중에서)
사진 2. 훈요십조.
인용문은 943년 여름 4월 왕이 내전內殿에 나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친히 내린 「훈요訓要」(사진 2)의 일부분이다. 고려의 건국과 운영, 그리고 정신문화가 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고려시대 불교사정을 알려주는 대부분의 기록이 고승의 문집이나 금석문, 그리고 고문서류 등에 한정되어 있지만, 『고려사』의 불교기록은 고려불교의 정체성과 국가불교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팔관회는 서경西京에서 10월에, 개경開京에서는 11월 15일에 행해졌는데, 태조 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의례적으로 정비된 것은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대였다. 연등회 역시 부처를 섬기는 의례라 하고, 후세에 이 행사를 자의적으로 늘리거나 줄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정월 보름에 실행하거나 2월 보름에 실행하는 등 행해진 날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었으나, 봄에 펼쳐지는 대표적인 국가 의례로 자리 잡았다.
한편 『고려사』 세가편世家篇은 당시 국가 차원에서 개설된 불교의례佛敎儀禮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다. 불교의례는 대체로 불보살에게 귀의하고, 잘못을 참회하며, 공양하고 발원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즉 교리에 기반한 그 실천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례는 『인왕경』과 『금광명경』을 기반으로 한 호국의례,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화엄법회, 그리고 각종 신중도량, 그리고 국가의 위기를 소멸하고자 개최했던 소재도량消災道場·기양도량祈禳道場이 개최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다양한 불교의례는 불교의 대승경전이 지닌 교의사상이 가시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각 시기별 불교교리의 동향 역시 살필 수 있다. 아울러 고려의 불교의례는 토속신앙과 혼합된 경향도 있어서 불교의 고려사회 흡수를 위한 움직임도 살필 수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개설된 이들 불교의례는 적의 침입을 물리치게 하기 위해, 왕과 왕실의 무병장수, 죽은 자의 극락왕생, 천재지변을 물리치거나 복을 빌기 위한 기복祈福 등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왕실을 중심한 집권층의 불교교리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해석과 선택 또는 합리화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국가적 차원의 교단형성과 육성책을 실현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불교행정제도의 체계화를 엿볼 수 있다. 결국 『고려사』는 불교를 부정했던 조선에서 편찬되었지만, 고려시대 불교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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