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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천하절경 품에 안은 해동 화엄 대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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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10:11  /   조회4,65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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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然尋牛逍遙 6]  영주 부석사



 倚簷山色連雲翠 

 出檻花枝帶露香 

 

 

부석사浮石寺. 공중에 떠 있는 돌 사원이라고? 옛날에 흔히 그랬듯이,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따 절의 이름을 짓는 바람에 부석산浮石山에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리라. 그런데 그 산에 부석浮石이라고 글씨까지 새겨 놓은 바위가 있으니 그 산 이름 역시 산에 있는 이 기이한 너럭바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부석사 창건 설화에는 이 바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공중으로 날아다니며 절 짓는 것을 방해하는 무리들을 쫓아버렸다고 한다(사진 1).  

 


사진 1. 부석.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절이 터를 잡고 있는 산은 봉황산이다. 그러나 일주문을 들어서면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는 힘차고 세련된 필치의 현판을 마주하게 되는데, 신라 때에 이 일대를 북악北嶽인 태백산으로 일컬었기 때문이리라. 현판은 효남曉楠 박병규(朴秉圭, 1925-1994) 선생이 썼다. 절의節義로 청사에 빛나는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19세손으로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한 시대를 서예가로 활동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일주문 뒤편에 걸려 있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는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사진 2).  

 


사진 2. 박병규, 일주문 현판. 

 

  일주문을 지나 과수원을 양옆으로 끼고 길을 올라가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잘 다듬은 돌을 깐 포도鋪道를 따라 걷다보면 계단 위에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다. 천왕문의 현판도 박병규 선생의 글씨다. 2단으로 되어 있는 대석단大石壇의 장엄한 공간을 지나 들어서면 양 옆으로 석조로 된 불사리탑佛舍利塔이 서 있고 그 사이로 난 길 끝에 범종각梵鐘閣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높이 서 있다. 범종각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본당 건물처럼 보이고 세로로 배치되어 있어 ‘바로 여기가 부석사’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범종각 건물임에도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라는 현판을 높이 달아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사진 3). 

 


사진 3. 범종각과 경내. 

 

범종각을 받치고 있는 해묵은 기둥들 사이로 허리를 굽혀 빠져 나가면 오른쪽으로 방향이 바뀐 곳으로 안양루가 그 고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안양루가 품고 있는 격조와 아름다움은 한국 사찰 건축의 백미라고 하고 싶다. 높은 처마 아래에 ‘부석사浮石寺’라고 쓴 고졸한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의 글씨이다. 붓을 잡고 마음가는대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글씨라서 꾸밈도 없고 거침도 없다(사진 4). 

 


사진4. 안양루

 

  안양루 아래에서 계단으로 올라서면 바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앞마당에 석등石燈이 진리의 빛을 밝히며 세월을 지키고 서 있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가운데를 불룩하게 깍은 엔타시스entasis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선생이 격찬한 그 배흘림기둥이다. 이 기둥양식은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의 고대 건축물에서도 자주 사용된 것이지만, 우리 것은 우리 고유의 멋과 향기가 있다. 그 무량수전 옆에는 선묘善妙 낭자설화 속에 등장하는 육중한 부석浮石이 바윗돌 위에 얹혀있다. 뒷산도 바위들로 되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행과 기도는 모두 바위산에서 했다. 

 

  무량수전은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아미타불을 모신 본당인데, 1916년 이를 수리할 때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恭愍王, 1330-1374) 7년인 1358년에 화재를 당하여 우왕(禑王, 1374-1388) 2년인 1376년에 재건된 것으로 되어있지만,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에는 정종靖宗 9년인 1043년에 중건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의상의 화엄사상과 미타정토신앙에 따라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만 주불主佛로 모시고 협시불脇侍佛은 없다. 이 건물 앞마당에 있는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석등 중에도 아름답기가 그지없다(사진 5). 의상 대사 진영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은 고려시대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주위에는 여러 전각들이 있지만, 부석사를 연구한 김태형 선생은 부석사의 원래 모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는 창건 직전에 500명이 넘는 승려들이 활동했으며 의상 대사 문하로 3,0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던 곳이고, 1203년에는 고려 무신정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킬 정도로 사세가 컸던 화엄종 대본사인 부석사가 지금과 같은 작은 사역寺域일 리가 없다고 한다. 기록에 전하는 해동 제일의 누각 취원루聚遠樓, 심검당尋劒堂,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 만세루萬歲樓, 약사전藥師殿, 수비원守碑院, 영산전靈山殿과 터만 남아 있는 은신암, 극락암極樂庵 그리고 기와 명문銘文으로 확인되는 천장방天長房, 대장당大藏堂, 봉황지원鳳凰之院과 같은 당우들을 다시 복원해보면, 부석사는 창건 이후 14세기 후반 왜구의 침탈로 사역 전체가 불에 타기 전까지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한 사역과 동쪽으로 보물 제220호 석불이 있던 금당과 천장방 구역, 원융국사비와 동부도전을 중심으로 한 대장당 구역, 서쪽으로 봉황산 기슭 골짜기에 위치한 암자 구역으로 된 대가람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의 견해를 진지하게 들어 부석사를 복원하고 화엄불교의 수행도량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부석사는 의상 대사가 당나라 장안으로 가 화엄종의 2대 종주인 지엄(智儼, 602-668) 화상에게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에 이곳 태백산으로 와서 창건한 절이다. 3년 뒤에는 경주에 명랑(明朗, ?-?) 화상의 건의로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짓기 시작한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완공되었다. 명랑 화상은 선덕왕 1년인 632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진언밀교眞言密敎를 공부하고 와 신라에 밀교를 전파하고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의상이 문무왕(文武王, 661-681) 16년인 676년 2월에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공격에 늘 시달리고 백성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자 결국 천하통일의 마음을 먹고 무열왕(武烈王, 654-661)과 그의 아들 문무왕에 이르러 당나라와 힘을 합쳐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렇지만 통일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통일이 되어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일이 있었고, 통일국가로 통합되는 데는 서로 다른 백성들이 하나로 융합하고 공동체가 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당시 통일신라의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시대적인 요청은 불교의 화엄사상과 합치하는 것이어서 화엄학은 신라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최고 지위에 의상 대사가 있었다.

 

  의상 대사가 당나라 유학 후 신라에 화엄종을 펼쳐나갔지만, 원래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공부하러 가려고 했을 때는 당나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천재 현장(玄奘, 600-664) 법사에게 배우러 가려고 했다. 요즘도 유학을 가고자 할 때에는 그 분야에서 제일 유명한 교수에게 가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자기를 받아줄 다른 교수를 찾아 가거나 아니면 자기를 받아주는 다른 교수를 찾아 아예 전공을 바꾸기도 한다. 이 당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해골물 이야기로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설화일뿐 뛰어난 사람은 굳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고 새로운 경지를 열 수가 있으므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다. 천재적인 원효가 보기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지 않아도 붓다의 가르침과 불교철학의 이치는 훤하게 알 수 있는데 굳이 당나라 유학을 갈 이유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상은 당나라로 갔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현장 법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별로 주목되지 않은 지엄 화상 문하로 갔다.

 


사진 5. 무량수전과 석등. 

 

  당시 당나라 장안에는 현장 법사가 인도의 나란다(那爛陀, Nalanda) 사원 대학에서 계현(戒賢, 시라바드라) 법사 문하에서 불교철학의 최고봉인 17지론, 즉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무착(無着, Asanga, 395-470경), 세친(世親, 400-480경) 계열의 유가瑜伽, 유식唯識에 관한 공부를 마스터하고 힌두쿠시와 파미르 고원을 넘어 645년 초에 귀국하여 태종(太宗, 626-649)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불교경전을 한역하며 불교철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사실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의 불경 번역이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한 자가 한 것이 아니어서 승려들도 불교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승려마다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 것을 고집하는 풍토도 있어 현장 법사는 이를 개탄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이미 유명한 고승들로부터 『구사론俱舍論』이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익혀 명성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그가 알려고 하는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 태종 3년인 629년에 드디어 인류 역사에 일대 사건이라고 할 인도행을 결행했다. 결국 17년간 인도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138개국에 달하는 나라들의 정보와 함께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 20년간 74부 1,335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다. 

 

  이런 신세계가 열리자 중국에서는 불경의 구역과 신역을 근거로 한 견해들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현학玄學과 유학儒學 등을 두루 섭렵한 원광(圓光, 550-?) 법사가 진陳나라로 가서 승려로 이름을 날리고 수隋나라가 건국된 뒤에 장안에서 무착 계열의 유식학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660년 귀국하여 이를 신라에 전파하였다. 황룡사皇龍寺를 중심으로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주도하며 국가와 불교가 일체가 되는 기틀을 만드는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진골출신의 자장(慈藏, 590-658) 율사도 이런 상황 속에서 유식학을 공부하고 선덕여왕 7년인 638년에 당나라로 가서 유식학을 배워와 대국통大國統으로 큰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식학은 현장 이전의 구유식론이었다. 현장이 번역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를 기본으로 전개된 신유식학을 터득하여 신라에 전개한 사람들은 신라의 천재 원측(圓測, 613-696) 화상을 중심으로 현장학을 공부한 신방(神昉, ?-?), 지인(智仁, ?-?), 승현(僧賢, ?-?), 순경(順璟, ?-?) 등 신라승들이었다. 이들은 인식론, 논리학 등 치밀한 인식체계에 대하여 논구한 대학자들이었다. 신라승들도 현장 법사의 번역 사업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가사지론』 100권이 당나라에서 인출되자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은 당태종에게 이를 보내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사진6. 안광석 서, 시 표훈 진정(좌). 사진7. 안광석, 화엄연기(우). 

 

 아무튼 신라 불교의 초기에 이런 유식학의 발전이 중국과 비교하여 종교성을 더 띠면서 전개되었는데, 이는 결국에 의상의 화엄사상과 경쟁·대립하게 된다. 당나라 장안의 서명사西明寺를 중심으로 한 원측의 유식학맥을 잇는 도증道證 화상이 효소왕 원년인 692년에 귀국하는데, 의상의 제자 승전勝詮 화상도 효소왕대에 귀국하면서 양쪽 학맥은 서로 팽팽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유식학파는 경덕왕대에 법상종法相宗으로 교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지만,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는 화엄학파와의 경쟁에서는 밀려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법상종의 전개를 보면, 원측-도증-대현(大賢, ?-?)으로 이어져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대현계와 원광(圓光, 555-638)-진표(眞表, ?-?)로 이어져 미륵불과 지장보살을 모시는 진표계로 분화되었고, 진표계는 헌덕왕의 왕자 심지(心地, ?-?) 화상이 이어 받아 동화사桐華寺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갔다. 고려시대에도 법상종과 화엄종이 고려불교의 양대 축을 형성했을 정도이니 그 생명력은 여전했다. 

 

아무튼 불교가 보다 고도의 철학체계를 갖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법상종의 유식학과 인식방법론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나갔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과학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등장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요체로 하는 성리학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려운 철학체계이고 더구나 한자를 해득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고 보인다. 더구나 종교의 힘을 빌려 큰 바람을 일으켜 통일신라를 그야말로 통일된 하나의 왕국으로 새로 세우는 데는 화엄사상을 수용하여 한 바탕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더 쉽고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현실을 초월한 별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현실을 지극히 긍정하게 만들게 하는 세계도 있었으니, 인식과 존재에 대한 어려운 논의를 전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도 쉽고 재미난 것일 수 있었으리라.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임에도 현실과 유리되면 모두 멸하였다. 여기에 종교의 비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화엄경』은 일찍이 자장 율사에 의하여 신라에 전파되었지만, 통일신라의 화엄사상을 체계화하고 주도해간 사람은 의상 대사이다. 진골출신으로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한 의상이 당나라로 간 때는 원광 법사가 귀국한 다음 해인 태종무열왕 8년 661년이다. 670년 귀국한 후 양양 낙산洛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황복사에서 화엄학을 강론하다가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통일을 완수하는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는 화엄학을 공부한 후 지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요체로 화엄사상을 정립하고 아미타불을 받드는 미타신앙彌陀信仰을 교단의 중심신앙으로 삼았다. 낙산사 창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관음신앙觀音信仰을 구도 신앙으로 승화시키고 미타신앙을 현실에 사는 모든 인간이 받아들이기 쉬운 현실 신앙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저술보다는 백성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사회가 화합하여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하였기에 발원문이나 게송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화엄사상을 설파하여 나갔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일승법계도가 있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든 모르든 법성게를  암송하고 소리 내어 부르기도 했다. 이는 화엄사상의 정수로서 『화엄경』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을 핵심으로 하나와 전체의 연관성을 밝히고,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없고 단지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속에 있다는 연기론을 제시한 것이다. 

 

  7언으로 된 법성계를 열심히 암송하고 터득하여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면 죽어서도 아미타불이 사는 서쪽나라 깨끗한 불국토佛國土, 즉 극락정토極樂淨土에 다시 태어나 왕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극락정토는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미타신앙을 간절히 믿고 따르면 바로 아미타불로 성불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통일된 신라의 국토가 바로 극락정토가 된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신라의 미타신앙은 이렇게 전개되었다. 

 

  의상의 법계도의 ‘법성게法性偈’는 외우면 리듬이 있어 어렵지 않게 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고 이를 완전히 터득하기란 많은 공부가 요구된다. 210자 30구로 된 법성게를 한번 본다. 이 시대의 선지식 무비無比 대화상이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주해註解에 따라 번역한 내용을 기준으로 한번 본다. 법계도를 한 바퀴 돌아도 ‘법法’과 ‘불佛’은 일체가 되어 중도상中道相 본처本處에 그대로 있지만 돌아본다.

 

法性圓融無二相 법과 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습이 아니니,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떠난 것이니,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자의 지혜라야 알 것이요, 다른 경계가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니, 

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을 부지함이 없이 인연을 따라 이루도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며,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로다.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으며,

一切塵中亦如是 일체 티끌 속에도 이와 같은 것이로다.

無量遠劫卽一念 끝없는 멀고 먼 시간도 곧 한 순간이요,

一念卽時無量劫 한 순간이 바로 끝이 없는 시간이도다.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와 십세가 서로서로 따르지만, 

仍不雜亂隔別成 그래도 뒤섞이지 않고 각기 제 모습 이루도다.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한 때가 바로 정각이고,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로다.

理事冥然無分別 이와 사는 따로 드러나지 않아 분별됨이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모든 부처와 보현보살 같은 대인의 경지로다.

能入海印三昧中 능히 해인삼매 가운데로 들어가서

繁出如意不思議 마음대로 부사의의 경계를 무한히 만들어 내노니

雨寶益生滿虛空 허공에 가득 보배를 쏟아 중생을 이롭게 하거늘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은 그릇 따라 이로움을 얻어 갖는 것이로다

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제로 돌아가니 

叵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으려 해도 반드시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

無緣善巧捉如意 장애도 걸림도 없는 훌륭한 솜씨로 여의주를 잡아서

歸家隨分得資糧 본지풍광의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양식을 얻는도다.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의 무진장無盡藏한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하나니,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중도상에 앉았으되 

舊來不動名爲佛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이름하여 부처라 하도다.

 


사진 8. 안광석 서, 화엄일승법계도. 

 


사진 8-1. 정종섭 서, 화엄일승법계도. 

 

  의상 대사는 가르침을 펼쳐나갈 때 이 법성게의 사상을 제일 중시하여 제자들에 대한 법의 인가 표시로 법계도를 수여할 정도였다. 그 제자들 역시 이 법계도의 사상을 계속 심화시켜 나갔다.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를 ‘의상십철義湘十哲’이라고 한다. 금강산에 표훈사表訓寺를 지은 표훈(表訓, ?-?), 의상 대사가 그를 위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강의해주었다는 진정(眞定, ?-?), 의상 대사의 강의를 가장 잘 정리한 「도신장道身章」의 저술자 도신(道身, ?-?), 추동錐洞에서의 의상 대사의 강론을 적은 「추동기錐洞記」의 저술자 지통(智通, 655-?), 부석 적손인 신림神琳에게 화엄교학을 전수한 상원相圓, 「양원화상기良圓和尙記」를 지은 양원(良圓, ?-?), 안동 골암사鶻嵒寺에 주석한 오진(悟眞, ?-?), 진장(眞藏, ?-?), 도융(道融, ?-?), 표훈과 함께 표훈사를 창건한 능인(能仁, ?-?)이다. 674년 황복사에서 표훈과 진정이 스승 의상에게 부동不動의 이 몸이 곧 법신이라 한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의상은 이렇게 게송을 읊어 답했다(사진 6).

 

  諸緣根本我 모든 연은 나를 근본으로 하고,

  一切法源心 일체법은 마음에 근원이 있다.

  語言大要宗 대종요를 말하자면,

  眞實善知識 진실이 선지식이다.

 


사진 8-2. 정종섭 서, 법성게. 

 

  그리고 전국에 10개의 중심 되는 화엄종 사찰을 세우니, 최치원崔致遠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 기술한, 북악北嶽인 태백산의 부석사浮石寺, 오늘날 단양丹陽인 원주原州의 비마라사毘摩羅寺, 강주康州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 경남 고성 비슬산琵瑟山의 옥천사玉泉寺, 경남 양산인 양주良州 금정산金井山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嶽인 지리산智異山의 화엄사華嚴寺, 중악中嶽인 공산公山의 미리사美理寺, 서악西嶽인 계룡산鷄龍山의 갑사甲寺, 오늘날 서산瑞山인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의 보원사普願寺, 오늘날 서울인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 즉 삼각산三角山의 청담사靑潭寺가 그것이다.  

 

  평생 의상 대사를 받들며 구도의 삶을 사신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 선생은 1990년 작품집 「화엄연기華嚴緣起」를 남겼다. 여기에는 교토 고산사高山寺 소장의 의상회義湘繪, 법성게, 의상화상투사례義湘和尙投師禮,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백화도량발원문, 오관석五觀釋, 의상찬, 법장화상서간 등 모든 자료를 손수 서예로 쓰고 서각으로 새겨 실었다(사진 7). 선생의 문하에 드나들던 나도 어느 날 법계도를 직접 그리고 붓을 들어 써보았다(사진 8·8-1·8-2). 

 

  안양루에는 삿갓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그 뛰어난 재주를 뒤로 하고 이 세상의 모순에 몸서리치며 방랑하다가 전남 동복同福에서 객사한 비운의 인물이다.

 

平生未暇踏名區  평생 바쁘다며 이런 좋은 데를 못 왔는데, 

白首今登安養樓  흰머리 날리며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다.

江山似畵東南列  강산은 그림같이 동남으로 펼쳐 있고,

天地如萍日夜浮  천지는 부평초 같이 밤낮없이 떠돈다.

風塵萬事忽忽馬  세상 온갖 일로 말 달리듯 허덕이지만, 

宇宙一身泛泛鳧  우주 속의 이 한 몸은 오리처럼 헤엄친다.

百年幾得看勝景  백 년 산들 이런 절경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歲月無情老丈夫  세월은 무정하구나, 나는 벌써 늙어버렸네.

 

  봉황산을 등지고 안양루에 올라서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런 시정에 빠지리라. 더구나 진애의 속세에서 한 세월을 살고 이제 머리가 희어지는 나이에 든 사람이라면 ‘아 어쩌면 내 마음과 이리도 같을까’ 하게 된다. 이문열(李文烈, 1948-) 선생이 소설 「시인」에서도 그려본 주인공이지만, 이 시 역시 절창絶唱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긴 시간 같지만, 생사가 찰나刹那이고 풍진 세상에 허덕거려봤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아서라, 허망하게 몸 굴리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라도 알고 가라는 것이 붓다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참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으리라.  

 


사진 9. 안양루에서 본 강산. 

 

 그간 여러 번 오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또 안양루 처마 밑에서 텅 빈 마음으로 강산을 바라본다. 강산은 유구悠久한데 사람만 분주히 오고 갈 뿐이다. “의첨산색연운취倚簷山色連雲翠, 출함화지대로향出檻花枝帶露香” 처마에 기댄 산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머금고 있구나! 시공간을 벗어던진 매월당 설잠 화상이 법성게 주해에서 읊은 착어着語다. 경탄할 뿐이다(사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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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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