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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건축 이야기]
금당 아닌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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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11:37  /   조회5,56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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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건축 이야기 3 - 부석사 무량수전의 정체

 

부석사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장대한 석축, 석등과 석탑, 의상의 선비화(禪扉花, 골담초), 선묘 낭자와 부석 등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찰이다. 특히 이중 무량수전이 보여주는 조형미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건물에 일반의 인식과 실체에는 간극이 크다(사진 1). 오늘은 이 간극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미 수 년 전 공식적인 저널을 통해 부석사 무량수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혹시 미리 알고 계신 독자께서 식상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미리 사과를 드린다.

 

초지일관 화엄종찰

 

 부석사는 의상(625-702)이 창건했다고 알려진 사찰이다. 의상은 당나라 화엄학의 대가인 지엄(600-668)이 가장 아꼈던 제자로 그 밑에서 10년을 공부한 후 스승의 만류를 뒤로한 채 조국이 처한 위험을 알리고자 귀국한 유학승이다. 이후 의상은 경주에 머물지는 못했지만 당시 변방인 영주에 자리 잡아 아직도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화엄종찰 부석사를 개창하게 된다.

 


사진 1. 부석사 무량수전. 

 

 과거 사찰이 어느 종파에 소속된다는 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조선시대가 통通불교 경향이 강하다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부석사의 경우 단 한 번도 화엄의 정체성을 흐린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석사는 전형적인 교종사찰로 인식되어 있으며, 화엄의 교리가 건축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오래된 습관 - 강당과 금당

 

 건축역사를 배운 적이 없더라도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이 앞뒤로 배치된 형식정도는 다들 안다. 실례로 황룡사, 감은사, 불국사, 정림사, 미륵사 등 초기사찰의 배치를 보면 모두 이런 특징을 따르고 있다(사진 2). 

 


사진 2. 감은사지 배치도. 

 

 금당은 금인金人이 있는 건물이라는 의미이며 여기서 금색은 빛을 의미한다. 빛은 곧 진리[法]이며 어디까지든지 뻗어나가 차별 없이 만물을 비춘다. 그래서 금당은 교주가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당은 법法을 강講하는 공간으로 이곳에서 법이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전해지면서 실제 불교가 퍼져나가는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처럼 상징적 공간을 앞에 두고 실질적 공간을 뒤에 두는 전후배치의 전통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수용된 오래된 건축 상의 특징으로 선종사찰보다 교종사찰이 이 같은 전통에 더 충실하다고 인식되어 있다. 특히 부석사는 교학의 대표인 화엄종의 중심사찰이니 더 철두철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강당과 금당이 앞뒤로 배치된 모습이 아니다. 아마 험한 산중에 들어선 사찰이기 때문에 반듯한 터를 닦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량수전과 주변 장치들

 

 부석사는 경사진 산록에 대형 산돌을 거칠게 깨내고도 빈틈없이 쌓아 올린 아름다운 석축으로 구성된 사찰이다. 이 석축의 수를 세는 방법에 따라 9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아미타9품의 정토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진 3. 부석사 배치도. 

 

 이외에도 옆으로 선 범종각을 통과하고 나면 지금은 빈터가 된 곳에서 왼쪽으로 약 30°정도를 꺾어 안양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사진 3). 이 문은 안양루의 밑을 말하는 것으로 기둥과 마루 바닥으로 구성된 문 아닌 문이다. 이러한 건축을 현대적으로는 필로티(pilotis)라고 부르는데 현대건축에서는 필로티부분을 문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 문을 들여다보면 석등(국보 제17호)과 무량수전이 겹쳐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석등이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져 있다(사진 4).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 석등을 한쪽으로 살짝 치우쳐 놓은 이유는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렇게 오른쪽으로 유도된 동선은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이 있는 무량수전의 오른쪽으로 이끌리는데, 이쪽이 바로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아미타불의 맞은편인 것이다.

 


사진 4. 안양문을 통해 본 석등. 

 

 연구자에 따라 무량수전을 11세기 또는 14세기 건물로 각각 다르게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차와는 별개로 무량수전 영역은 안양문을 포함하여 석등 및 삼층석탑이 모두가 하나의 계획 하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사진 5). 그렇다면 왜 사람들의 동선을 아미타불 맞은편으로 유도하려 한 것일까?

 


사진 5. 무량수전 영역의 동선. 

 

공부법과 공간

 

 강당이라는 곳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의 교육은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의상이 설한 『화엄경』의 내용이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향상문답香象問答』이라고도 불리는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으로 엮인 것을 보면 당시 공부하는 방법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이처럼 묻고 답하면서 지식이 전해지는 것은 당시 보편적 공부법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전하는 강사는 한 명이고, 듣는 학생은 수백이니 넓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어야 함은 분명하다. 당시 면학분위기야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지금처럼 확성기도 없는 사정에서야 건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까?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것보다 무량수전처럼 좁게 사용하는 것이 강사의 목이 좀 덜 아팠을 것이다.

 

사라진 금당

 

 겸재정선(1676-1759)이 57세에 그린 『교남명승첩』에 실린 7번째 그림이 ‘순흥 부석사’인데 이 그림을 보면 안양루를 사이에 두고 위에 무량수전과 아래에 법당이 있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사진 6).

 


사진6. <교남명승첩> 중 부석사도

 

 이외에도 안정구(1803-1863)가 1849년에 쓴 『재향지梓鄕志(부제 순흥읍지)』에 실린 ‘불우佛宇’항목에 부석사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안양문 앞에 법당이 있고, 그 좌우에 선당과 승당이 있으며 다시 그 앞에는 종각이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교남명승첩』에 실린 부석사 그림과 일치한다(사진 7).

 

 지금은 옆으로 선 범종각만 남아 있는 빈터에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법당과 좌우요사로 된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 배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범종각만 남아 있지만 원래 이곳은 법당과 선당 및 승당이 함께 있는 부석사의 중심이었던 것이다(사진 8).

 


사진 7. 재향지 부석사 기사 부분. 

 

금당+강당 = 법당

 

 이 문제를 여기서 논할 수는 없지만 금당과 강당이 합쳐졌다는 법당은 고려시대 선종사찰에서 불전과 함께 세워지던 법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주불전主佛殿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사찰에서는 법문을 듣고 예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이 둘을 하나의 공간에서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부석사도 『교남명승첩』과 『재향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무량수전 이외의 법당이 무너진 후 재건되지 않은 것이 이러한 불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8. 부석사 중심사역 항공 사진. 

 

 애써 서있는 건물을 일부러 넘어뜨리지는 않지만 법문을 듣던 공간(강당·법당)과 예불을 하던 공간(금당·불전)의 구분이 없어진 마당에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굳이 다시 세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곡사도 지금은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으로 구분 없는 두 개의 법당이 남아있으며, 마곡사도 대광명전과 대웅전으로 종류만 다를 뿐 법당이 두 개인 것은 부석사처럼 중간에 하나가 쓰러지지 않은 덕일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당시 부석사에서 안양문 아래에 있던 법당이 없어지게 된 상황은 공교롭게도 문경 대승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대승사에서 법당을 중창한 후 부처님을 봉안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부석사 법당에 모셔진 목각탱(국보 제321호)에 향화가 끊길 지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승사 대중은 이 목각탱을 부석사를 제외한 주위의 양해를 얻어 1869년에 대승사로 모셔 갔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대승사의 입장이다(사진 9).

 


사진 9. 대승사 목각탱(문화재청). 

 

 이때 부석사는 자신의 성보를 대승사에 내주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는데, 결국 여차저차해서 목각탱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를 되찾아오기 위해 대승사와 송사를 벌이게 된다. 이때의 과정은 대략 문서로 지금까지 남아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를 통해 추정해 보건데 부석사는 힘없이 자신의 성보를 내주어야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는 목각탱을 운반해가면서 불상도 3위나 훼손됐다고 적혀 있어 목각탱이 있던 건물은 아미타불만 혼자 있는 무량수전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후로 강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무량수전 뒤편 어디에선가 수습되었다고 하니 이러한 추론은 이제 정설이 되어서 문화유산해설사들도 이제 무량수전을 강당이라고 설명해야하지 않을까 싶다(사진 10).

 


사진 10. '강당'명 탁본(미디어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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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건축학 박사. 전 금강산 신계사 추진위원회 연구원, 전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전 조계종 전통사찰전수조사연구실 책임연구원, 현 동국대 강사 및 은평구 한옥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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