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빛의 말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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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09:39 / 조회6,931회 / 댓글0건본문
1. 불생불멸과 등가원리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주1)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으로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치셨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원리를 따릅니다. 곧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하여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닙니까? 거짓이 아니라면,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그 까닭을 분명히 제시해야 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생각입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법전 스님, 혜암 스님, 성철 스님, 서암 스님, 일타 스님. 뒷줄 왼쪽부터 첫 번째 원택 스님, 네 번째 인각 스님, 다섯 번째 원융 스님, 여덟 번째 원타 스님. 해인사.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철히 깨쳐야만 합니다.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일체 만법, 곧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하는데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르나니 是法住法位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世間相常住”(주2)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곧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을 또 『화엄경』에서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곧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디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며 아울러 불교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불교에 대해서 영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산중에 들어와 눈감고 앉아서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것이 또한 문제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요즘은 과학만능 시대이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의 도리를 과학적으로 근사하게 풀이해 보일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이 과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하여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슈타인 Einstein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입니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이즈음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사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 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E=mc2)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우리가 다 아는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 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지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앤더슨 Carl D. Anderso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세그레 Emilio Segre라는, 무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간 유명한 이탈리아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은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없어진 것입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은 없어진 것입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질량으로 전환하고 질량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쌍생쌍멸雙生雙滅이라고 합니다.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할 때 언제든지 쌍雙으로 변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고 합니다. 앤더슨의 실험에서도 광光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양전자와 음전자를 합하니까 완전히 쌍으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雙生이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雙滅이 됩니다. 이것은 중도의 공식, 곧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할 때 음전자와 양전자가 쌍으로 나타나니까 쌍생雙生이 되고, 이것은 곧 쌍조雙照에 해당합니다. 또 유형인 질량 곧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니까 쌍멸雙滅이 되고, 이것은 곧 쌍차雙遮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쌍으로 없어지면서 한쪽이 생기고, 또 쌍으로 생기면서 한쪽이 없어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쌍차쌍조의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전환하는 이론으로 완전히 증명이 됩니다.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에 이런 표현을 그대로 말하지는 못해도, 그 내용은 꼭 같은 말로서 에너지와 질량 관계가 보존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계 곧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불생불멸은 거짓말로 남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임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음을 마침내 알아냄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기에 이른 것일 따름입니다.
지금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것만을 보아도 이 불교 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 불교 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2. 색공色空의 세계
1) 색즉공(色卽空)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주3)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2) 4차원의 세계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4차원四次元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의 공간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인데 여기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면 4차원이 됩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볼 때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만,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4차원의 세계에서는, 보기를 들어 금고 속의 돈을 금고 문을 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으며, 또한 문을 닫아 둔 채로 문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해인사에 앉아서 천리만리 밖에까지도 갈 수 있는 자유자재한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4차원의 세계를 신통자재한 홍길동의 이름을 따서 ‘홍길동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가 처음 제창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이지만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완전한 체계를 세워 공식화한 사람은 소련의 민코프스키 H. Minkow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보기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라고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 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곧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초심리학
시간과 공간이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이른바 4차원의 세계인데, 이것은 결코 가공의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자꾸 개발하여 가면 실제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이 방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심리학에서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이라는 분야에서 이것을 연구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많은 실증적 연구 보고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타임지에서 이에 관한 특집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는 100여 개 대학에서 초심리학에 대한 정식 강좌를 열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소련은 유물론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16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여 4차원의 과학을 연구․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군사 방면에서 잠수함이 바다 깊은 곳에 잠수했을 때 정신력으로 그 잠수함에 어떤 지시를 해보면 70퍼센트는 성공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정신력으로 무슨 지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하겠지만, 70퍼센트의 성공률이라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편 소련 땅의 서쪽 끄트머리인 모스크바와 동쪽 끄트머리인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정신력에 의한 통신을 시도하였더니 서로 통하였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습니다. 더욱이 이 정신력에 의한 통신이 오히려 무선無線 통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하고 전달이 빠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능력이 있어서 이를 자꾸 개발하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무한한 정신력
무한한 정신력을 이용한 초능력의 보기는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캐논 경Sir Alexander Cannon의 캐논보고서에서 그런 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디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 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의 다섯 나라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잠재력The Power Within 』이란 제목의 캐논보고서에서 소개한 몇 가지 실험에 대하여 여기에서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이런 실험을,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 때로는 커다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거나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눈알이 빠져 버린 사람은 더더구나 볼 수가 없습니다. 눈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볼 수 있으며, 눈감고 무엇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지닌 본디의 능력, 본디의 시력은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눈을 떠야만 볼 수 있고 감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은 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 눈이 있거나 없거나에 관계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두 눈이 빠져 버린 사람도 무엇이든 다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시력이라고 캐논 경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두 눈에 철판을 대고 수건으로 겹겹이 둘러 싸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든 다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모두 알아보는 것입니다. 철판을 눈에 대고 보는데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천안통天眼通이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보면 천안이 가장 뛰어난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존자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그는 수행할 때에 너무 졸음이 많이 와서 그것을 없애려고 전혀 잠을 안 자고 공부를 계속하다가 결국 두 눈이 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눈, 곧 육안肉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 열려 삼천대천세계, 백억세계를 손바닥의 구슬처럼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아나율 존자의 천안에 견주면 요즈음의 200인치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서 아나율 존자는 비록 육신의 눈은 없지만 천안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캐논 경은 눈이 없거나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되어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오직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면 눈이 있고 없는 것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힘을 사용하면 남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캐논 경은 이것에 대해서도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말이나 글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머릿속에서 생각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캐논 경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머리 속에서 자기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으면 캐논 경은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하고 또 나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까지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어김없이 다 맞는다고 합니다.
결국 이로 미루어볼 때 남의 마음뿐만 아니라 미래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달을 향하여 쏜 로케트나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한 결과 우주선을 개발하여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달나라에까지 간 것이지, 미국사람만 타고 오라고, 소련사람만 타고 오라고 하나님이 보내준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능력을 개발하게 될지 우리 인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또 다른 실험으로 육체적으로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시체를 넣은 곽[棺]처럼 생긴 나무상자를 준비하고 상자의 앞, 옆, 위, 아래의 사방으로 구멍을 뚫어 놓고 이 상자 속에 피실험자가 누우면 뚜껑을 덮고 뚫어 놓은 구멍 속으로 칼을 찌릅니다. 그 상자는 보통 사람의 크기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 있는 한, 결코 칼날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장육부가 모두 칼날에 구멍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심지어 심장에 꽂힌 칼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 칼이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칼을 빼고 상자를 열어 보면 그 안의 사람에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입니다. 칼을 찌를 때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칼 상자보다 더 놀랍고 사람의 초능력의 깊이를 깨우쳐 주는 실험으로 생매장生埋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가 죽은 듯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의사가 검진하여 맥박도 끊어지고 호흡도 끊어지고 뇌파 검사에서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을 단단히 밀랍 포장하여 땅을 파서 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아둘 것은 설사 죽지 않았다고 하여도 사람은 서너 시간만 땅에 묻어 두면 누구나 죽게 마련입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불과 수 분이 지나도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는 시체를 묻어 놓고는 며칠, 몇 달 또는 일 년 동안이나 계속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 년이 지난 뒤에 미리 정해 놓은 시간에 파 보면 일 년 전에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받은 그 사람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이 생매장 실험을 사람이 많이 모인 홀에서 실시하였습니다. 무대 위에 모래를 수십 짐을 져다 놓고, 그 속에 사람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기다렸습니다. 과연 미리 지정한 대로 15분이 지나자 모래더미에 묻어둔 사람이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귀신도 탄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들을 통하여 볼 때 인간의 근본정신은 육체를 떠나 활동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도 뇌 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깨어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정신 작용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에 관계없이 독립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언제나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디 무의식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죽지 않습니다. 설사 몸뚱이가 죽어 화장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없어져도 영혼은 독립해 있어서 윤회를 하고 환생을 하는 것입니다.
5) 정신감응
인간의 정신 능력은 한 개인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로체프스키라는 소련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정신 간에 서로 통할 수도 있다는 데에 착상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피실험자가 있는 곳에서 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피실험자가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로체프스키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제 집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듯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몇 번 들락날락하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감시하던 사람들이 따라가 보니 과연 그 여자는 자기를 오도록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와서 보니 그 사람은 그 여자를 오게 하는 생각을 얼마나 간절히 했던지 그만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나오라고 상대방에게 정신반응을 보내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우산을 갖고 나오는 실험까지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 실험으로 한쪽에서 어떤 생각을 강하고 간절하게 하면 그 정신의 반응이 상대편에게까지 도달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을 텔레파시Telepathy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신감응精神感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신감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일본에서 의사들이 한 실험입니다.
흰쥐 스무 마리에게 장질부사균을 치사량으로 주사해 놓고, 그 가운데 열 마리는 약으로 치료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정신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약으로 치료한 흰쥐는 모두 죽었는데 정신요법으로 치료한 열 마리 중에는 세 마리가 죽고 일곱 마리가 살았다고 합니다. 또 죽은 세 마리도 해부를 해보니 회복기에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람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도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동물에게 최면술을 거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는 작용하지 않는다면 최면술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악어나 사자, 호랑이 따위의 동물에게 최면술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은 서커스나 묘기시범에서 쉽사리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정신적으로 동물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면 옛날 우리나라의 도인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릴 때 많이 해보던 실험이기도 합니다. 실 끝에 돌이나 쇳덩어리를 매달고서 그것에 정신을 한참 동안 집중시키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움직이라 하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앞으로, 뒤로, 원형으로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을 관념운동이라고 합니다. 또 유리겔라라고 하는 사람이 정신반응으로 숟가락을 휘게 하고 시계를 정지시키는 실험을 하는 것이 보도된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정신감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한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6) 분신
이 밖에도 가장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분신分身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백, 수천의 장소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합니다. 지구에 계시면서 저 세계에도 가고 이 세계에도 옵니다. 또 신라시대의 원효 스님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6처열반六處涅槃을 하였습니다. 곧 여섯 곳에서 똑같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분신’이라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해인사에 있는 사람이 분신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진주에도 한 사람, 부산에도 한 사람, 서울에도 한 사람씩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한날, 한시에 열 명도 되었다가 백 명도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실험에 의해 그런 분신에 성공한 예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요가하는 요기Yogi들이 분신을 해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7) 육근호용六根互用
불교에 육근호용六根互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 가며 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귀는 듣는 것인데 귀로 보고 또 눈은 보는 것인데 눈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육근호용이라고 합니다.
어제 어떤 신문에는 중국 사천에 사는 열한 살 된 어린이가 모든 것을 귀로써 본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눈을 아무리 가려놓아도 무엇이든지 다 보며, 또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는 귀로써 모든 것을 보는데, 이것은 밝고 어두운 것도 사실은 없음을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해도 되고, 귀로 본다고 해도 됩니다. 오장육부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아픈 데가 어디고 빛깔이 어떤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위의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마다 보도된 것입니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다[耳見眼聞]는 이 말은 본래 불교에 있는 말입니다. 오조법연 선사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번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 수 없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서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육근호용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근호용이 되어 모든 것에 무애자재한 경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3. 삼천대천세계
이제는 이 불생불멸의 공간적 범위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있는 분이 와서 묻기를, “불교를 여러 해 동안 믿어 왔는데 부처님이 이 우주를 어느 정도 크게 보셨는지 좀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웃으면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일월日月이 비치는 우주를 한 세계라고 합니다. 흔히 한 일월이 비치는 우주가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천千이 모여서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고, 그 소천세계가 또 천이 모여서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가 다시 천이 모여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되며, 대천세계를 세 번 곱한 것이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표현방식일 뿐이고 실지 내용은 백억세계 혹은 백억일월인 것입니다. 또 이 백억세계, 백억일월을 한 불찰佛刹이라고 하고 이런 불찰이 미진수微盡數로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입니다. 이런 크기는 혜안慧眼이 열리지 않고는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문학에서 이 사실이 실증되고 있습니다. 1955년에 미국에서 파르마 산山에 200인치나 되는 굉장히 큰 망원경을 처음으로 완성하여 설치하였습니다. 200인치라고 하면 직경이 5미터나 됩니다. 그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면 10억 광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망원경을 통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주라는 것 밖에도 무한한 우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단순히 별 하나뿐인 단일체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모인 집단 우주가 무한히 많은 숫자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사진에도 나타나고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무한한 우주 집단이 대략 40억 개 내지 50억 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백억세계라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과학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 10억 광년밖에 볼 수 없지만 더 발달하면 100억 광년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무한한 우주 집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부처님께서 가장 작게 보신 것으로는 ‘일적수구억충一滴水九億蟲’(주4)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물방울 한 개에 9억 개나 되는 많은 벌레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신의 현미경으로도 아직 물방울 한 개에서 벌레를 9억 개까지는 볼 수 없지만, 그토록 조그만 세계에 그렇게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이즈음에 와서 점차 증명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혜안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 공간을 보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주법계, 진여법계라고 하는 것도 중생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불생불멸을 내용으로 하는 그 법계라는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한에서 무한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무한한 세계입니다.
4. 물심불이物心不二의 세계
그러면 너르디 너르고 변함이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가 있으며 그 내용은 또한 불생불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물질로 된 것인지 정신으로 된 것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불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주5)라고 하여 불교가 유심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떠난, 곧 양변―물질과 정신―을 떠나서 양변이 융합한 중도적인 유심을 말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유물론이나 유심론이 결코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유심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변견邊見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변견으로서는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중도적 입장에서라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보면 유심唯心도 아니고 유물唯物도 아닙니다. 유심도 유물도 아니어서 유심과 유물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심과 유물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곧 물심불이物心不二인 것입니다. 유심도 아니고 유물도 아니면, 결국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서로 융합해서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심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하고, 유물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로 증명이 안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육체나 또는 동물, 식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이들은 아주 미세한 세포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 이들 세포를 연구한 결과, 동물의 세포나 식물의 세포가 똑같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어느 세포나 각 세포 가운데에는 핵산이라는 것이 들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영문 약자로 흔히 ‘디엔에이D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핵산은 순전히 정신적인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해서 서로서로 연락하고 명령을 전달하고 신경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핵산은 결코 신경계통의 기관은 아닙니다. 각 세포 가운데에는 세포핵이 있는데, 핵산은 그 세포핵 가운데에 존재하여 기억력과 활동력을 가진 정신체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조금 더 연구를 깊이 한 생물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세포는 모두 정신 작용을 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 활동을 떠난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물학 연구도 물질과 정신이 실지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나마 생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 광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광물이 동물, 식물처럼 성장하지도 않으니 아예 죽어 있는 무생물로 취급한다든지 운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인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물질의 근본 질량으로 소립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늘 스핀Spin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핀운동이란 모든 소립자가 일정하게 타원형을 그리며 활동하고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소립자든지 늘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으므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지, 이 세상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어떤 광물이든지 또는 무생물이든지 그것들은 모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살아 있습니다. 어떤 물체든지 죽어 있거나 활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물리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어떤 입자든지 스핀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지 정신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론물리학에서는 “소립자도 자유의사를 갖고 있다.”고들 많이 주장합니다.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결국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동․식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세포마다 그 속의 세포핵에 핵산이 있어서 정신활동을 하고 있듯이, 광물이나 무생물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 입자 안에서는 스핀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불생불멸을 말하면서 이렇게 현대물리학을 도입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가 아니라 시간을 백억 분의 일 초로 나누고 공간을 다시 백억 분의 일 밀리미터로 나누어서 극미세한 상황까지 설정하여 이야기를 펼친 것은, 결국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물이든 그 모든 것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것은 또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양변兩邊을 떠나고 또 양변을 포함하는 불교의 중도공식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은 발달을 거듭하면서 자꾸 불교 쪽으로 가깝게 오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불교는 과학이 발달될수록 그 내세우는 바가 좀 더 확실히 증명이 되고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이 찬탄합니다.
이렇게 해서 3,000년 전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현대과학의 이론으로 입증됨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말씀은 누구든지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이기에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설령 원자탄이 천 개, 만 개의 우주를 다 부순다 하더라도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사상의 원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5. 질문과 답
물음: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믿는 자는 융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여 절대자인 창조주가 화복禍福을 정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업業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답:예수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든 이도 하나님이고 따라서 구원도 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누가 만든 사람이 따로 없고 누가 따로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아(自我) 본위입니다. 예수교는 철두철미 남을 의지하는 것이니 두 관점이 정반대입니다. 요즘의 과학적 증명에 의하면 남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예수교에서도 자체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시 주장하는 것은 우주 이대로가 상주불멸이고 인간 이대로가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또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 사람이 모두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데 자기가 착각해서 금덩어리를 똥덩어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덩이인 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을 하여 본래의 눈을 뜨고 보면 본시 금덩이인 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진금眞金이고 모두가 부처님 세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원’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개발이고, 자기 복귀復歸입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의 조사 스님네들이 항상 하는 말이 그렇고 또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석가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지금 말하는 성철이도 믿지 말라. 오직 자기를 바로 보고, 자기 능력을 바로 발휘시켜라.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그럼 어째서 부처님은 극락세계 등의 의타依他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자아自我 본위를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지 참 가르침은 아닙니다.
물음:업業의 변화에 의해서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입니까?
답:그렇지요.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햇빛 속에 똑바로 나서면 그림자도 바르게 되고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바른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바르게 되고 굽은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굽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타살他殺은 없다, 전부 다 자살自殺이라고.
물음:불교의 윤리에서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답:남을 돕는 것, 남에게 이로운 것은 선善이라 하고, 남을 해치는 것,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악惡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진정한 의미에서는 선이란 선과 악을 완전히 버리고 또 선과 악이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도中道의 세계를 말합니다. 선과 악이 대립되어 있는 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입니다. 보살계戒를 받을 때에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라. 이렇게 하는 것이 보살이다.”고 말합니다. 상대적인 변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는 여기에 참 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음:도솔천兜率天과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어떤 것입니까?
답:도솔천이라고 하는 것은 외계外界의 천상天上에 있습니다. 그러나 꼭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도솔천이니 33천三十三天이니 하는 사상이 있었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 성질이 다릅니다. 이것은 본시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으로써 극락세계를 만들었습니다. 흡사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다는 식式입니다. 아미타불이 원력으로써 만들어 놓은 땅이니 우주창조설과 그 성격이 같은 것입니다.
물음:인간의 능력이 무한하고 불교가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앞으로 과학은 불교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답:몇 해 전 불교로 전향한 어느 미국 사람이 서울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과학이 발달수록 퇴색되고 파괴되는 데 비해 불교는 더욱더 그 논리가 실증되는 동시에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는 진리를 바로 보았기 때문에 3천년 뒤에도 그것이 참말인 것이 자꾸 증명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진리가 한 가지 한 가지씩 계속해서 더 증명이 될 따름이요, 불교 이상의 더 나은 진리를 발견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손오공이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 줄을 알아야지요.
물음:캐논 경이 쓴 『잠재력』에서와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실험하는 그들도 화두 공부를 한 것입니까?
답:그들이 화두 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 또 완전히 제8식識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험을 하는 동안에는 무의식 상태에 가깝게 들어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상태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음:윤회설과 인구증가 및 산아제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인구가 증가한다는 것 곧 이전에는 인구가 적었는데 지금에는 인구가 많다 하니 이것은 영혼이 어떻게 된 것인가? 사람이 반드시 사람으로만 윤회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큽니다. 사람만이 사람으로 윤회한다면 인구가 증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는 데에는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외계에서 오는 영혼도 있고 하여 전체적으로는 증감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에서 인구가 자꾸 팽창해 가니 산아제한을 해서 위기를 면해야겠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그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됩니다. 산아제한 한다고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건설적으로 나아가야지 산아제한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많아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개척하고 개발하면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물음:불성佛性이란 무엇입니까?
답:이것은 불교의 독특한 용어用語인데,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고, 일체법계一切法界를 말할 때는 법성法性이라 하는데 일체만법의 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을 바로 안 사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것은 변동이 없으므로 진여眞如라 하기도 하고, 그 내용은 중도中道이므로 중도라 하기도 하고, 활동하는 자체는 연기에 따라 움직이므로 연기법緣起法이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희한하고 희한하구나, 모든 중생衆生이 두루 불성을 갖고 있구나.”
주)_
1)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T36, p.67b),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2)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T9, p7c),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3)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T5, p.22a),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4) ‘일적수구억충’이라는 단어는 경론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비수참법권중수문녹慈悲水懺法卷中隨聞錄』(X74, p.698b)에 “如佛眼觀一滴水, 八萬四千虫.”라는 표현이 있고, 『중조보주선원청규重雕補註禪苑清規』(X63, p.555b)에 “吾觀一滴水, 八萬四千生, 凡夫目不見, 天眼自分明.”이라는 표현이 있다. ‘구억충’이란 표현은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教月報』(第4號, p.12b)에 “一身中八萬毫에 一一各有九億虫야”라는 표현이 있다.
5)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T10, p.102a),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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