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이야기]
상량문/ 건물의 복장腹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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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0:05 / 조회6,458회 / 댓글0건본문
옛부터 우리는 건물을 지으며 뼈대가 완성될 때 쯤 그 건물의 성조신(成造神. 집에 깃들어 길흉을 관장하는 가신 중의 하나)이 깃든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그때 깃든 성조신에게 집을 짓게 된 경위와 집주인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올리게 된데서 상량문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상량문하면 우선 한지에 먹으로 쓴 긴 문서가 떠오르기 쉬운데, 이를 종도리에 홈[記文藏處]을 파 넣는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종도리에 용龍과 구龜를 서로 맞서도록 양 끝에 써 놓고 중간에 상량한 날과 시를 포함하여, 간단한 축원문을 적는 것도 상량문이라고 한다(사진 1. 상량문을 넣거나 쓰는 곳. 사진 2. 종도리에 쓴 긴 상량문 - 정수암 법당 긴 상량문(1708). 사진 3. 은해사 기기암의 종이에 쓴 긴 상량문 - 1:서사, 2:본사, 3:육위송, 4:결사, 5:연화질).
『선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상량문이 원元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송대宋代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기』나 『시경』에 궁궐을 지으며 송축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상량문의 원형은 그 시작을 가늠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상량문의 형식과 구분
우리나라의 경우 『동문선』이나 『동국이상국집』에 궁궐건축의 상량문이 전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12세기에는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불교의 상량문 사례는 아직까지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해체수리과정에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 대웅전 등에서 건물의 부재에 고려 말에 직접 쓴 글씨가 발견된 정도이다. 이 기록은 공사의 시점이나 후원자를 포함한 관계자 명단, 공사를 하게 된 계기, 간단한 발원發願 내용 등 기초적 사실만을 짧게 적는데 그쳐 궁궐건축의 상량문과 비교할 때 내용과 형식에서 차이가 크다(사진 4. 수덕사 대웅전 화반 묵서명).
2-3-1. 사진 1. 종도리와 종도리장여.
궁실건축의 상량문은 서사序詞·본사本詞·육위송六偉頌·결사結詞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 들어 불교에도 영향을 미친다. 불교는 이러한 형식의 상량문을 수용한 이후에도 4단 구성을 따랐다고는 할 수 없는데, 아무래도 원래 사용하던 기초적 사실만을 짧게 적는 방식에 익숙했던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2-3-2. 사진 2. 정수암 법당 긴상량문(1708).
그리고 이외에도 보시布施라는 자발적 후원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의 특성상 후원자를 포함한 공사 관계자를 하나도 빠짐없이 결사結詞 뒤에 별도로 적어야하기 때문에 유교식이라 할 수 있는 ‘긴 상량문’을 수용하더라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형화된 4단구성이 지켜진 유교식 상량문을 ‘긴 상량문’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기초적 사실만을 간략하게 적은 것을 ‘짧은 상량문’이라고 하는데, 불교건축의 상량문이 이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사진 5. 은해사 기기암의 ‘긴 상량문’ - 1:서사, 2:본사, 3:육위송, 4:결사, 5:연화질).
2-3-3. 사진 3. 보문사 극락전 상량문(1865).
상량문 변화의 시작
상량문을 처음부터 종이에 쓴 것은 아니고 종이에 쓰기 이전에는 부재에 직접 적었다. 종이에 먹으로 상량문을 적기 시작한 시기는 확인된 사례를 중심으로 본다면 곡성 ‘도림사 대루상량문(1677)’으로 17세기 후반이라고 볼 수 있다. 숭례문의 경우 1479년에 쓴 ‘긴 상량문’이 2층 북쪽 하중下中도리 받침장여에 직접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처럼 ‘긴 상량문’도 초기에는 부재에 직접 줄맞춰가며 썼던 것이다.
2-3-4. 사진 4. 수덕사 대웅전 화반묵서(0308).
이후 상량문을 종이에 써 종도리에 홈을 파서 넣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량식 전반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이후에도 어떤 경우에는 종도리에 직접 ‘짧은 상량문’을, 또 어떤 경우에는 ‘긴 상량문’을 써 넣기도 하였다. 특히 종도리에 ‘짧은 상량문’을 적는 경우에도 한지에 ‘긴 상량문’을 적어 종도리에 별도로 넣는 경우도 있다.
2-3-5. 사진 5. 은해사 기기암 중수상량문(5단 구분).
이처럼 상량문을 써 넣는 두 가지 방법을 선택적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기준을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긴 상량문’이 좀 더 격식을 갖춘 상량문이며, ‘짧은 상량문’은 상대적으로 간소한 상량문으로 인식되고 있어 건물의 격과 연관 지어 볼 수는 있겠지만, 이 또한 짐작일 뿐이다.
2-3-6. 사진 6. 보문사 극락전 관계자명.
‘긴 상량문’을 수용하는 불교
우리나라 상량문에 영향을 준 송대의 상량문이 돈황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우리나라에서는 17세기 전까지 불교건축에서 ‘긴 상량문’이 발견된 적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연구자가 있는데 바로 부산대의 서치상 선생님이다. 서치상 선생님의 일련의 연구를 보면 불교건축 상량문의 독특함을 규명한 것은 물론,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상량문을 적는 방식의 변화와 유불 간의 상관성을 밝혀낸 것이다.
2-3-7. 사진 7. 보문사 극락전 상량유물일괄.
서치상 선생님의 여러 연구 성과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특히 해인사와 범어사의 사례를 통해 불교건축의 상량문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밝혀낸 부분이다. 임진왜란 직후 해인사 판전을 수리하면서 적은 3건의 상량문을 통해 유교식 ‘긴 상량문’이 어떻게 불교에 수용되었는지를 확인하였고, 1658년부터 1699년까지 연이어 작성된 범어사의 상량문 4건을 통해 이를 재차 확인하였으며, 더불어 목재에 쓰던 상량문을 종이에 써서 종도리 홈에 넣기 시작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하였다.
기계적 이식에서 능동적 수용으로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상량문이 남아 있는 고려 중기 이후의 사례를 중심으로 긴 호흡에서 본다면 불교는 결과적으로 유교식 상량문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긴 상량문’을 작성하더라도 말미에 불사에 참여한 모든 인물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유교식 상량문을 수용하되, 불교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공덕신앙과 공동체의식을 유지하면서 유교식 상량문을 수용했다고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사진 6. 보문사 극락전 관계자 명단).
사진8. 보문사 상량의식.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교가 ‘긴 상량문’을 수용했다는 것은 큰 틀에서 유교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갔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상 왜란과 호란을 거푸 거치면서 『주자가례』를 강조하는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자들이 득세하며 사회는 급격히 보수화되는데, 이러한 격랑 속에서 불교는 더욱 유연하게 변화하는 사회분위기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지도적 위치의 스님일수록 불유佛儒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교적 글쓰기에 적극적이었는데, 상량문의 수용도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왕실은 물론 유력가문에서 사찰을 후원하며 상량문을 직접 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유교식 상량문에 영향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유교와는 달리 조선후기가 되면서 종이에 먹으로 쓴 상량문을 종도리 속에 넣는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수리하면서 확인된 상량문 및 같이 발견된 유물을 통해 당시 사찰에서 상량식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사례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불교에서는 상량식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사진 7. 보문사 극락전 상량유물 일괄).
19세기 들어서는 상량문을 넣는 종도리 홈에 상량문만을 넣는 것이 아니라 경전, 오색실, 오곡, 약재, 구슬, 동전, 다라니, 악세사리 등을 같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물목物目이 들어갔다는 것은 같은 시기 정형화된 불상의 복장의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불상에 복장을 한다는 것은 조각품에 종교적 생명력을 넣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량문과 함께 종도리 홈에서 이러한 물목이 확인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시기가 내려올수록 상량문과 함께 복장유물과 비슷한 구성을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는 사례가 더욱 빈번해지는데, 특히 불자들이 평소 몸에 지니던 악세사리를 상량문과 함께 기문장처에 넣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자 하는 대체신체代替身體를 의미한다. 이는 불상의 복장에 평소 입고 있던 저고리를 넣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같은 상량식을 해도 불교에서는 상량문의 형식은 물론, 의식의 과정까지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꿔가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사진 8. 보문사 상량의식).
그런데 상량유물이 이렇게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음에도 당대에 주요 의식을 정리하고 있는 『작법귀감』(1826)이나 『석문의범』(1935)에 상량식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는 점은 정말 특이하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서는 『조상경』에 근거한 복장의식과는 달리 뒤늦게 상량식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 의례적으로 정비하여 통일해야할 필요성이 아직 충분하게 제기되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말기의 격랑 속으로 빠져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상량문과 상량문을 넣는 의식 모두 불교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던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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