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대립·차별 떠난 평등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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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28 / 조회6,236회 / 댓글0건본문
법수(4)/ 일심一心
『삼장법수三藏法數』는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사진 1)의 약칭인데, 명나라의 석일여釋一如 스님이 1419년 왕명으로 대장경 중에서 법수의 명목과 이에 따른 해석을 모아 한자의 획수에 따라 배열한 책이다. 50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1,600여 불교술어가 수록되어 있다. 한역 대장경 해석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불교사전이다. 이 『삼장법수』의 첫 번째 표제어가 ‘일심(一心, eka-citta)’이다. 『삼장법수』에서는 ‘일심’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일심이란 한 생각의 마음[一念之心]이다. 마음의 성품은 모든 면에 두루 퍼져 있으며, 허공을 관통하듯 신령스럽게 서로 통한다. 흩어지면 만 가지 일을 거두어 가지지만, 줄이면 ‘한 생각’이 된다. 따라서 선과 악, 성자와 범부도 모두 이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은 본래 만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능히 온갖 일들을 성립시킨다. 경에 이르되, 삼계에는 차별의 법이 없으나 이 한 마음이 짓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삼계란 욕계・색계・무색계이다[[出華嚴經] 一心者, 一念之心也. 心性周偏, 虛徹靈通. 散之則應萬事, 斂之而成一念. 是故若善・若惡, 若聖・若凡, 無不皆由此心. 以心本具萬法, 而能成立衆事. 經云: 三界無別法, 惟是一心作, 是也. 三界者, 欲界・色界・無色界也].”
위 설명은 일심을 대승불교의 시각에서 해석한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만약 일심을 이와 같이 해석하면 자칫 ‘일심’이라는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엄격히 말하면 마음은 실체가 없다. 마음이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할 뿐이다. 이른바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 마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은 너무나 빨리 변화하기 때문에 좀처럼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일반 불자들이 가장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불교술어가 바로 ‘일심’이다. 대장경에서 일심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술어인 ‘일심一心’과 순우리말 ‘한마음’의 의미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순우리말 ‘한마음’은 사전에서 ‘하나로 합친 마음’ 또는 ‘변함없는 마음’으로 풀이하고 있다.
『대정신수대장경』에 일심이라는 단어가 19,358회 나온다. ‘일심’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대략 네 가지로 쓰인다. 즉 ①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평등한 마음. ②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은 마음, 즉 통일된 마음. ③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④아뢰야식阿賴耶識 등이다.
첫째는 일심이 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평등한 마음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불설적지과경佛說寂志果經』에서 “일심을 평등하게 하여 바른 계를 닦고 익혀야 한다[一心平等, 修習正戒也].”고 했다.
둘째는 일심이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잡아함경』 제20권 제549경에서 “혼자 한마음으로 고요히 생각하면서 선정의 묘한 즐거움 맛본다[一心獨靜思, 服食妙禪樂].” 또 『장아함경』 제1 「대본경大本經」에서 “가섭불의 낱낱의 털, 일심은 난잡한 생각이 없다[迦葉一一毛, 一心無亂想].” 초기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용례이다. 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서도 가장 많이 쓰인다.
이를테면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에 전념한다는 의미로 일심이 쓰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아미타경』에 나타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이 그 대표적인 용례이다. 『법화경』 제7 보문품普門品에 “관세음보살이 있음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즉시에 그 음성을 알아듣고 고뇌에서 해탈하게 한다[聞是觀世音菩薩, 一心稱名, 觀世音菩薩, 卽時觀其音聲, 皆得解脫].” 천친天親의 『왕생론往生論』에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을 다해 시방무애광여래에게 귀명합니다.” 이처럼 정토신앙에서의 일심은 어떤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마음을 뜻한다.
셋째는 일심이 절대로 둘이 아닌 심성心性의 뜻으로 쓰인다. 즉 만유萬有의 근본 원리인 진여眞如 또는 여래장심如來藏心을 의미한다. 『화엄경』 제25 「십지품十地品」에 “삼계는 허망하며, 다만 이 일심이 지은 것이다[三界虛妄 但是一心作].” 이른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일심관一心觀이 그 대표적인 용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사상으로 전개된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심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후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곧 유식종에서는 능변식심能變識心으로 보고 있고, 천태종에서는 망심妄心으로 보았으며, 화엄종에서는 이 심을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으로 보고 있다. 이 여래장자성청정심의 근거가 바로 ‘삼계허망 단시일심작’이다. 『화엄경』에서는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화엄원교華嚴圓敎에서는 일심을 원명구덕일심圓明具德一心으로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체體로 보기 때문이다. 『입능가경入楞伽經』 제1 청불품請佛品에서 “적멸이란 일심이며, 일심은 여래장이다[寂滅者, 名爲一心, 一心者, 名爲如來藏].”
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따라서 일체법은 근본을 쫓아 이미 들어왔으며, 언설의 모양을 떠났으며, 이름의 모양을 떠났고, 심연心緣의 상相을 떠난다. 결국에는 절대 평등의 세계로서 변하거나 뒤바뀌는 일[變異]도 없고, [외부의 힘에 의해] 파괴될 수도 없는 일심뿐이기 때문에 진여眞如라고 한다[是故一切法, 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故, 名眞如].” 이 진여 혹은 여래장심을 일컬어 일심이라고 한다. 즉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을 만유의 근본 원리로 본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에서는 화엄의 사상을 계승하여 “삼계는 다 허위요, 오로지 마음이 지어냈을 뿐이다. 마음이 없으면 [우리가] 감각으로 느낀 이 세계 또한 없다[三界虛爲, 唯心所作, 離心則無六塵境界].”고 말한다. 위에서 인용한 『삼장법수』의 일심은 이 세 번째 해석에 해당된다. 즉 일심을 만유의 근본 원리로 이해한 것이다.
한편 선불교에서 말하는 ‘한 물건[一物]’을 일심으로 혼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조선 중기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이 지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사람이 송頌 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겠는가?’ 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고 죽는 것도 아니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名不得狀不得. 一物者, 何物?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위에 인용한 ‘한 물건’에 대한 설명은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ātman, 自我)의 설명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한 물건’을 ‘일심’으로 간주하면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일심은 불변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일심이 유일의 근본식根本識의 뜻으로 쓰인다. 즉 만유萬有 능변能變의 마음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것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에 “자기 마음의 집착에 의해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사현하여 전변한다. 그 인식대상[所見]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오직 한마음[一心]뿐이라고 말한다[由自心執著, 心似外境轉, 彼所見非有, 是故說唯心. 如是處處說唯一心].”(T31, p.10c)
그러나 천태종에서는 일심을 불변하는 어떤 실체로 간주하면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세 가지로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다. 일심삼관이란 일심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공가중空假中의 세 가지 측면에서 관하는 관법을 말한다. 일심삼관을 공관空觀・가관假觀・중관中觀이라고도 약칭하며, 공가중空假中 삼관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삼관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의 ‘종가입공이제관從假入空二諦觀, 종공입가평등관從空入假平等觀,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을 바탕으로 하여 정립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삼관을 닦는 방법으로는 이 세 가지 관법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고, 그 다음에 세월을 두고 관하는 별교別敎의 삼관과 일념一念 가운데 공가중空假中이 융화된 진리를 관하는 원교圓敎의 삼관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원교의 삼관은 일념의 마음이 대상이 되는 것으로, 일심이 공空하면 일체가 공하고 일심이 가假이면 일체가 가이며, 일심이 중中이면 일체가 중이라고 하였다. 즉 일심을 관조하여 대상에 사로잡히는 마음을 파하고 모든 현상을 살필 뿐만 아니라 절대의 세계까지를 체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일심삼관이란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주시하는 공관空觀,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고 주시하는 가관假觀, 공空이나 가假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리를 주시하는 중관中觀은 서로 원만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있으므로 한 마음으로 동시에 닦는 수행법을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심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일심을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즉 만유의 근본 원리인 진여 또는 여래장심으로 해석할 경우, 바라문교에서 주장하는 불변하는 아뜨만(ātman, 自我)의 개념과 조금도 차이가 없게 된다. 일심은 불변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일심을 아뜨만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불설에 어긋난다. 우리는 이 점에 특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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