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수행과 삶 연동된 학문선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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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38 / 조회6,051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4| 스즈키 다이세츠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가 태어난 해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과 함께 왕권을 부활시키고,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때이다. 그의 젊은 날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풍조로 유럽의 문물과 사조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후 제국주의, 군국주의를 거쳐 패망에 이르는 현실을 그대로 목격했다. 또한 허망한 근대국가의 몰락 후,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새 일본을 지켜보았다. 임종에 가까워 질 때, 측근인 오카무라 미호코岡村美穂子씨가 물었다. “Would you like something?” 스즈키는 “No, nothing, thank you.”라고 대답했다. 그는 우주의 심연인 공空의 세계, 그가 늘 설파한 절대무로 회귀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키가 젊은 날 고향을 떠나 불교를 정식으로 만난 것은 영문학을 배우기 위해 21세에 동경전문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가마쿠라의 임제종 사찰 원각사圓覺寺였다. 이마기타 코센과 그의 뒤를 이은 샤큐 소엔으로 부터 참선 지도를 받았다. 스즈키는 소엔으로 부터 받은 거사호이다. 마침 소엔이 시카고 만국종교회의에서 연설할 원고의 영역을 부탁받았다. 「A Short History of Buddhism(불교소사佛敎小史)」이다. 미국으로 가기 1년 전인 1896년 스즈키는 견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신종교론』을 집필했다. 다음 해, 동경제국대 철학과를 졸업한 27세의 스즈키를 소엔은 폴 케라스에게 추천했다. 미국의 오픈 코트사 출판편집부에 입사했다.
스즈키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때부터였다. 『도덕경』, 『대승기신론』 등을 영역했으며, 『Outline of Mahayana Buddhism(대승불교개론)』을 저술했다. 스베덴 보리의 『천계와 지옥』을 일역했다. 미국에서 11년을 체제한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학습원 교수를 거쳐 1921년 정토진종 종립대인 오오타니 대학 교수가 되었다. 동방불교도협회를 창립하고, <Eastern Buddhist>지를 창간했다. 가마쿠라에 동물애호자비원을 설립하고, 마츠가오카 문고를 설립했다. 평생 수없이 강연하고 강연했다. 젊은 날 선수행이 바로 삶으로 연동된 ‘학문선學問禪’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가 남긴 저작은 영문 42책, 일문 101책이다.
그가 불교를 세계에 드러내고자 했던 이유는 <Eastern Buddhist>의 창간호에 잘 실려 있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는 서양에서 매우 오해받는다. 불교가 동양의 명운을 주조하는 것 위에 의연하게 능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힘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중략) 대승불교는 현재 살아 있는 신앙임과 함께 역사적으로는 인간 혼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 탐구, 동경, 그리고 그 달성을 고하는 갖가지 경사스런 외침은 모두 그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동양만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에도 손이 미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동서철학자대회를 비롯한 여러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옥스퍼드, 캠브리지, 예일, 하버드 대학 등에서 선과 일본문화, 불교철학을 강의했다. 당대 동서양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도 교류하며 불교를 통한 동서양의 소통을 논했다.
흔히 동양의 선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그의 업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선을 전수한 초기의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의 선이 미국화 된 사찰의 곳곳에는 그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근대 서양의 학문을 자기화한 위에 동아시아불교의 정수인 선을 일본인의 프리즘을 거쳐 서양에 소개되었다는 점은 근대학문을 선점한 일본으로서는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지금도 일본의 TV에서는 세상이 팍팍하다고 느낄 때, 스즈키의 흑백 동영상을 보낸다. 삶의 본질을 설파하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그의 풍모가 새삼 근대 일본의 흥망성쇠에 일갈하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그의 선의 논리이다. 그는 선의 본질을 무분별과 즉비卽非의 논리로 본다. 「반야의 논리」에서 『금강경』의 “불타가 설한 반야바라밀이 즉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이를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른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는 구절을 인용하여 전개한다. 이를 반야계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론이라고 본다. “여기서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대신 다른 여러 가지 문자를 사용해도 좋다. 이것을 공식화하면 ‘A는 A라고 하는 것은,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는 A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이 부정이며, 부정이 긍정이다’는 것이다.” 미진이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미진이다. 32상이 32상이 아니기 때문에 32상이다. “모든 관념이 부정되고, 그것으로부터 또한 긍정으로 돌아온다.” 이는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세계이며, 이를 영성적 직각直覺이라고 한다.
그의 평생의 삶을 관통한 근대역사는 서양에서 왕권과 종교를 해체하고 나온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의 사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에 의한 과학, 소유와 지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한 자본주의가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전통을 초토화시킨 냉혹한 현실이었다. 당연히 무너질 것은 무너져야겠지만, 대량살상을 동반한 인간의 분열된 의식은 서양문명의 야만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다. 스즈키는 그 원인을 주객, 물심, 자타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서양 문명의 한계에서 찾았다. 상대화, 차별화시키고, 정복해야만 하는 인간성의 분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동양의 주객미분, 부모미생전의 소식에서 해법을 찾았다. 무분별의 분별, 자기부정의 엄격한 과정을 거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존재 자체의 절대성에 대한 무한 신뢰야말로 인류와 문명을 구하는 원천이라고 본 것이다. 헤겔 철학과 선불교를 융합하여 본격적 철학을 시도한 교토학파의 거두 니시다 기타로가 주장하는 순수경험에 기반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성의 논리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반야의 논리는 영성의 논리다. 또한 횡초橫超의 경험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횡초는 일본 최대종파인 정토진종의 조사 신란親鸞이 사용한 용어다. 타력정토문의 절대타력을 말한다. 아미타불 본원의 힘으로 미혹의 세계를 즉각적으로 벗어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시각始覺이 아니라 본각本覺에 의한 돈오돈수처럼 바로 이 자리가 무한 절대의 자리임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스즈키는 동양인의 원융자재, 사사무애의 세계야말로 지각의 극치라고 본다. 동양적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전 세계에 그 사명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나아가 17세기 활약했던 반케이 요타쿠盤珪永琢 선사의 불생선不生禪이야말로 영성적 자각이라고 보았다. 불생불멸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다.
스즈키는 “자네들이 그렇게 도망가고 싶다고 하는 생사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벗어나고 싶다는 계박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누가 자네들을 묶고 있는 것이 있는가. 누가 자네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역습해 오는 것이 선 논리의 특성이라고 한다. 마침내 “법성法性의 공空은 바로 일상에서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인사를 나누는 곳에 있다. 즉, ‘평상심시도’에 눈뜨지 않으면, ‘깨닫고 헤맨다’는 쓰라린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념으로 무념, 염념불가득의 소식을 뚫어야 처음으로 ‘너를 위해 마침내 안심시켜주겠다’는 달마의 절대 긍정이 나오는 것이다.”(『동양적인 견해』)라고 한다. 우주적 법신의 대자대비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일본적 영성의 건설이다. 그는 일본적 영성의 발현을 대지성大地性에서 찾았다. 땅과 가까이 하는 농민들이 그 주인공이다. 생명의 근원은 대지인 것이다. “그에게는 하늘은 멀고, 땅은 가깝다. 대지는 어찌되었든 어머니이다. 사랑의 대지이다. 이 정도로 구체적인 것은 없다. 종교는 실로 구체적인 것으로부터가 아니면 발생하지 않는다. 영성의 깊은 곳은 실로 대지의 좌座인 것이다.”(「일본적 영성」) 신앙의 정열로 열락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정토신앙인들인 묘호인妙好人들이야말로 이러한 전형적 종교인이다. 일상의 수행, 일상의 신앙이 기쁨으로 점철된 곳이 바로 대지인 것이다. 이성이 잃어버린 곳이다. 또한 임제의현의 일무위一無位의 진인眞人이 바로 자신의 신체와 신체 전 감각을 관통하는 영성의 작용이라고 본다. 물론 이 영성이 일본에만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폭주하는 근대문명의 운전자인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과 물질에 대해 이원적이면서도 일원적이고, 일원적이면서도 이원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은 자아를 초월해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자아의 통합이자 영성의 작용은 현실에 대한 반성, 즉 인과로 점철된 세계를 초월하여 종교적 세계가 펼쳐지는 곳에 있다. 즉 자기부정인 초개超個의 인人이 되어야 한다. 첫 저서인 『신종교론』에서 “유한의 무한에 대한, 무상의 불변에 대한, 아의 무아에 대한, 부분의 전체에 대한, 생멸의 불생불멸에 대한, 유위의 무위에 대한, 개인적 생명의 우주적 생명에 대한 관계를 감득하는 이것을 종교라고 한다.”하여 폐쇄적인 근대적 개아는 영성의 무한 절대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6조 혜능이 설한 “무념위종, 무상위체, 무주위본”에서 무념의 념, 무상의 상, 무주의 주가 또한 바로 영성적 직각이다. 절대의 무분별을 통해 분별과 무분별도 끊어진 절대무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개즉초개個卽超個, 초개즉개超個卽個의 영성이 현현하는 바로 이곳에서, 정토와 선을 일치시킨 그의 혜안으로 현대 문명에 밝은 빛줄기가 감로수처럼 쏟아진다.
그는 사사무애의 경지가 절대적 실존론이라고 하며 법계만다라를 통해 개개원성箇箇圓成의 그림으로 도식화한다. 원 안에 선을 이으면 중심이 생기는데, 그 중심에는 근대 일본을 파멸로 몰아넣은 천황과 국체가 생긴다. 이제는 이를 없애고, 원 위에 각각의 입각지가 중심이 된 연합, 회호回互, 원융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는 욕망으로 파멸된 잿더미 위의 일본에 대해 대승불법의 정수에 의한 새 길을 놓은 것이다. 비단 일본뿐이겠는가. 세계 모두는 여전히 근대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점점 상대화되고, 무질서해지는, 신의 옷자락마저 아득히 사라져 가는 포스트모던 사회로 수렁은 깊어지고 있다. 그는 언젠가 “나는 지옥에 가고 싶다. 극락은 무엇이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져 재미가 없다. 지옥에 가면 자극이 강해서”라고 했다. 지옥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을까. 스즈키가 다시 와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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