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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이능화가 기획한 마지막 불교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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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4:19  /   조회4,01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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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잡지 산책 ⑤『조선불교총보』 (통권 22호, 1917.3-1921.1)


발행기관과 발행인

 

1917년 1월 삼십본산연합사무소三十本山聯合事務所의 임원인 본산 주지들이 각황사에 모여 총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불교계』 종간(1916.6) 이후 국내에 불교잡지가 없던 상황에서 이들은 주요 의결 사항으로 연합사무소의 기관지를 펴내기로 결의하였고, 그 결과 그해 3월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이하 총보)』가 창간되었다.(사진1) 총보는 창간호(1917.3) 이후 1917년에 1~7호(7회), 1918년에 8~13호(6회), 1919년에 14~18호(5회), 1920년에 19~21호(3회)로 줄어들다가 결국 22호(1921.1)로 종간되었다.

 

삼십본산연합사무소는 포교 활동을 진작시키기 위해 1917년 2월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를 출범시키고 각황사에 본부를 두었다. 그동안 승속의 대표자들이 구성한 불교진흥회의 활동에 따라 『불교진흥회월보』와 『조선불교계』가 창간되거나 종간되는 현상을 전 호에서 살펴보았는데, 마찬가지로 1917년 2월에 불교옹호회가 발기되고 인가되는 시점과 맞물려 『총보』가 창간되었다. 『총보』 발행의 계기 혹은 동력은 불교옹호회의 등장과 길항 관계가 있는 것이다.

 

 


1. 조선불교총보 표지(3호) 

 

불교옹호회는 일제가 조선 불교계에 영향력을 더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기획하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서 추진한 친일불교단체다. 기존 승속 연합체인 불교진흥회에서 승려진이 빠지고 친일 귀족들이 유입된 형국이다. 발기인에는 이완용, 권중현, 한창수 등 친일 고위 관료가 대거 포진하였다. 1917년 10월 3일 개최한 제1회 역원회役員會에서 회주 권중현, 부회주 한창수, 평의원장에 이완용이 선출되었고, 평의원에 일본 관료와 조선의 거사들이 다수 포진하였다. 이사 이능화, 재무위원 이명칠, 서기 양건식, 송헌옥은 옹호회의 실무진이다.

 

삼십본산연합사무소는 총보를 간행하는 행정조직이고, 불교옹호회는 연합사무소의 포교를 위한 단체로서 두 기관은 총보 간행의 행정적 토대가 된다. 총보 이전에 간행한 『불교진흥회월보』와 『조선불교계』의 발행인인 이능화는 불교옹호회의 이사직을 겸하면서 총보의 제작을 책임졌다. 이능화의 제자로서 앞선 잡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양건식은 여전히 서기로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2. 조선불교총보 발간사(이능화, 1호) 

 

불교옹호회가 2월에 인가된 후 3월에 『총보』가 창간되었고, 그해 10월에 불교옹호회의 임원 선출이 이루어졌다. 『총보』에 옹호회의 활동이 기사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옹호회의 조직 활동과 총보의 편집, 제작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상기한 임원들은 『총보』에 투고한 예가 거의 없으며,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위원장들이 총독부의 시책을 홍보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나, 잡지 내용은 이능화가 발행한 이전의 두 잡지와 마찬가지로 불교사 자료의 발굴과 근대불교학의 소개, 포교와 교육 발전을 위한 시론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사진2)

 

발행 목적과 방침

 

『조선불교총보』는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기관지로 본사와 말사의 주지 임면 소식, 사찰재산 관련 내용, 기타 행정 정보를 「관보官報」란에, 본말사 동정을 포함한 불교계 소식을 「휘보彙報」란에 소개하였다. 총독부의 종교시책은 실시간으로 전달되었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총회 소식, 선출된 위원장의 담화와 동정이 빠짐없이 보도되었다.

 

이상의 기사는 총보를 감싸는 행정적 외피같은 것인데 이는 잡지의 전부가 아니다. 『총보』에는 다양한 학술적 글이 담겨있어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잡지에 대해 선행 연구자는 “잡지의 편집원칙은 30본산연합사무소의 설립 취지가 불교의 흥학과 포교였기에 자연히 편집의 기준도 그에 준하였다”고 하였고, “편집의 구성 원칙은 정하여지지 않았으나 교리, 사상, 사적, 사찰소개, 문예, 관보, 휘보 등을 담으면서 30본산연합사무소의 제반 활동을 전하였던 불교 종합잡지”라고 규정한 바 있다.(김광식,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해제』, 민족사, 1996. p.26)

 

 


3. 조선불교통사 광고(신문관, 6호) 

 

별다른 디자인을 가미하지 않은 단조로운 단색 표지의 총보에는 별도의 편제 없이 매호마다 10편 정도의 글을 수록하였다. 이들은 시론을 제외하면 대부분 학술기사이며, 잡지 전체적으로 문학이나 문화적 방향으로 대중성을 강화하는 적극적인 모색은 보이지 않는다. 총보는 1910년대 초반의 첫 잡지인 『조선불교월보』가 보여준 대중불교운동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지가 보이지 않으며, 암울한 시대 분위기와 함께 학술적인 무게감이 가중된 잡지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연구가이자 종교사학자인 이능화 자신의 학술적 성향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억압 속에서 출판문화의 자율성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총보 판권장의 ‘주의’ 사항은 『조선불교계』와 동일하다. 제5항은 정치적 이야기와 시사에 관한 시비를 담은 내용은 게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표명하였다. ‘정치 치담侈談과 시사 득실을 제除한’ 글을 투고해달라는 주문이다. 3.1운동 이후 발간된 17호에는 「사고社告」란을 통해 시사정담時事政談과 관련된 기사는 투고하지 말아 달라는 주문과 함께 기고문은 ‘출판 허가의 순서’에 따라 게재한다고 하였다. 20호의 「사고」에서도 매월 발행하지 못하는 이유로 ‘출판허가의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제도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으며, 잡지의 활력은 이로 인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4. 「원효저술일람표」(정황진, 13호)  

 

이러한 상황에서 잡지가 발행되던 시기와 겹치는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대한 잡지의 논조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위원장 김용곡은 3.1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노정하며 불교의 근본 목적을 강조하며 불교도에게 종교인의 본분을 지킬 것을 촉구하였다.

 

금반에 소요사건의 발발한 이래로 종종의 착오가 발생하며 제종의 풍설이 훤전하야 전민족의 사상계가 동요되는 동시에 보통사회는 물론하고 특히 오교에까지 기 영향이 파급하야 종교인의 본분을 자실하는 자ㅣ 多ᄒᆞ니 심히 유감되는 바이라. 제군은 현명한 총지와 명철한 두뇌로 고찰할지어다. 원래로 종교와 정치는 기 부분과 목적이 전연 別物이라.” (16호, 김용곡, 「警告法侶」)

 

『조선불교총보』는 근본적으로 당시 현실의 여러 측면과 시국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어려웠고, 일제의 사찰령과 시행규칙을 준수하는 일 방향의 주장을 담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측면은 『총보』 전과 후의 잡지에도 일정하게 작용하는 외적 기제임은 분명한데, 『총보』가 발간된 시기의 특수성, 『총보』 전체의 구성, 내용, 문체가 주는 고답적 분위기로 인해 그러한 측면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능화 국학연구의 정점_조선불교통사

 

『불교진흥회월보』와 『조선불교계』를 통해 자료를 발굴하고 축적한 이능화는 이를 집대성하여 1918년 3월 10일 『조선불교통사』(3권 2책, 신문관)를 펴냈다. 『조선불교통사』가 간행된 3월은 총보 8호가 간행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능화는, 심혈을 기울인 불교사 영역에 국한해 볼 때, 총보의 1, 2, 3호에 불교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9호와 20호에 두 편의 글을 수록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연구 성과를 수록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적 탐구의 정점이자 귀착점이 바로 『조선불교통사』인 것이다.(사진3)

 

 


5. 「속사쇄언」(이능화, 3호) 

 

이능화는 자신의 저서 출판 경과를 『총보』에 게재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조선불교통사』가 간행되기 전인 6호 1면에 실린 신문관新文館의 책 광고에 이 책이 ‘천오백 년에 초유한 책’으로 육당 최남선의 교열을 거치고 현재는 신문관에서 인쇄 중이라 하면서 ‘저술의 동기’, ‘재료의 수집’, ‘결구結構의 내용’, ‘이백품제二百品題’, ‘출판의 찬성贊成’으로 나누어 상세히 소개하였다.

 

책이 간행된 직후에는 김일우(<朝鮮佛敎通史의 出現을 歡迎>, 9호), 우좌미宇佐美 외(<朝鮮佛敎通史著者李能和殿>, 10호), 최동식(<天地禎祥으로 佛敎通史가 現世>, 10호), 그리고 최남선(11, 12호)의 평가와 상찬이 이어졌다. 최남선의 글 <조선불교의 대관大觀으로부터 조선불교통사에 급及ᄒᆞᆷ>은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종교사적, 역사적, 학술사적 의의를 설파한 명문이다. 이 글은 단순한 치하의 글이 아니라 조선불교사의 맥을 다양하게 고찰한 교양서이자 개론서이며, 비분강개의 어조로 독자들의 자각과 분발을 촉구한 격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보 6호와 7호에는 ‘인쇄 중’인 신문관의 『조선불교통사』 광고가 한 면에 수록되었고, 9호에는 이능화가 직접 쓴 광고가 실렸는데, 저술 동기를 제시한 후 책의 요점과 장점을 18개 항목으로 제시하였다. 이능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2호 <광고>란에 보유편 자료를 편찬하겠다는 내용으로 자료 수집 협조를 당부하였다.(<謹告諸方> 조선불교통사의 보유를 편찬ᄒᆞ야 방금 진행 중이오니 귀사 고덕의 비문행장, 계첩문, 기타 사원, 탑상, 鍾鑪, 도구 등 일체 舊蹟을 유루의 歎이 無히 左記졸자의 주소로 謄送ᄒᆞ심을 千萬切望ᄒᆞ나이다.) 다만 이후 보유편이 간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신진 불교유학생의 유입

 

불교계에서 선발하여 일본의 각 대학으로 유학 보낸 불교 청년들이 1918년 봄부터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유학시절 『불교진흥회월보』와 『조선불교계』에 시론과 학술기사를 송고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918년 봄에 귀국한 졸업생 이지광(조동종대학, 건봉사), 김정해(조동종대학, 용주사), 이혼성(조동종대학, 유점사), 그리고 1919년 5월에 귀국한 이종천(동양대학, 통도사), 김영주(해인사), 조학유(풍산대학, 해인사) 등이며, 그 후배격인 김경주(동양대학 동양윤리교육과, 1923졸), 김도원 등이 포함된다.

 

이지광, 김정해, 이혼성, 조학유, 김경주는 귀국 후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 등장하여 일본에서 습득한 근대불교학의 성과를 지면에 소개하였다. 이들이 소개한 불교윤리학, 불교철학개론, 불교심리학, 종교론, 포교법은 자신들의 졸업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이지광, 이혼성, 김정해는 귀국하자마자 총독부, 연합사무소, 각 본사, 중앙학림 등지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는데, 당시 종단 권력이라 할 수 있는 요직에 발탁되면서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6. 화혼법 소개 글(이능화, 4호) 

 

이들 외에 다수의 유학생이 등장하나 특별히 기억할만한 인물은 정황진이다. 그는 쌍계사에서 개별적으로 보낸 사비생寺費生으로, 혈혈단신 일본에 유학하여 6년을 고생하다 귀국했다는 기사가 16호의 「휘보」에 소개된 바 있다. (‘조선승려의 모범적 인물’, ‘불교유학생귀성’ 조). 정황진은 문헌실증적 방식으로 신라불교사를 연구하여 새로운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기존 유학생과 다른 성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술사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대각국사」(8호) 외) (사진4)

 

불교어휘, 풍속론과 화혼식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불교문화 탐구 결과물로 권상로와 이능화의 글이 주목된다. 권상로는 1~4호에 걸쳐 불교 어휘를 고찰하였는데, 「산가어휘山家語彙」라는 제목을 달고 매 호마다 친근하면서도 유래를 알기 어려운 불교어를 국한문 현토체로 풀이하여 연재하였다.(佛, 法堂, 僧尼/1호. 彌勒, 佛供, 齋, 磬, 搖鈴/2호. 衲, 鉢, 木柝, 曲冠(곡갈), 動鈴, 笠/3호. 知殿, 副殿, 澡罐, 金鼓木魚/4호)

 

이능화는 3~5호에 걸쳐 「속사쇄언俗事瑣言」이라는 제목으로 불교풍속사의 여러 단면을 특유의 박학다식한 자료를 들어 정리하였다.(사진5) 예를 들어 ‘기무출처妓舞出處’는 세조 당시의 영산회상곡에서 유래한 정악正樂, 구운몽을 배경으로 한 성진무性眞舞, 화청고무에서 유래한 승무, 원효의 무애가에서 유래한 무애무無㝵舞 등을 들어 기녀의 가무 속에 내재된 불교문화사적 의의를 소상하게 밝혔다.

 

이능화는 기존 불교문화에 대한 연구 외에도 <의정불식화혼법擬定佛式花婚法>(4호)을 제정하여 불교 의식의 하나로 기대하는 근대적인 혼례 의식의 절차를 제정하였다. 그리고 이 절차에 따른 실제 혼례가 거행된 사례로서 1919년 1월에 각황교당에서 거행된 화혼례식을 15호의 「휘보」에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사진6) 이는 화혼식이 새로운 불교의식으로 수용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근대 종합 불교의례서인 『석문의범』(1935)에는 이러한 근대식 화혼례가 좀 더 정제되고 대중적인 형태로 수록되었다. 이를 보아 이능화의 불교문화에 대한 기여는 다양한 영역에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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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불교가사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불교문학의 다양한 양상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불가 한문학의 번역과 연구, 근대불교잡지의 문화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시가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근대성』 등이, 번역서로 『정토보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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