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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일제강점기 민족의식 고취한 욕계의 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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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5:00  /   조회4,72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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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然尋牛逍遙 7| 사천 봉명산 다솔사

 

當年豪傑在何處

堂前樹風掃因緣

 

  봄날에 남해안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일은 일품이다. 그래서 남도南道에는 매화가 추운 겨울을 지나 얼굴을 내밀 때부터 매화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여기 저기 분주하다. 섬진강을 끼고 활짝 핀 매화꽃을 보러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아마도 이런 연유이리라. 심춘간화尋春看花, 즉 봄을 찾아 꽃구경을 나선 것이다. 넉넉한 지리산을 지나 남해안쪽으로 오면 한반도의 땅은 낮아지고 평화롭다. 진주에서 광양으로 가든 광양에서 진주로 가든 봄날에 새싹의 푸른 기운이 황토색 대지를 물들이며 펼쳐지는 한가로운 풍경은 유년幼年의 느린 시간을 떠올리게 하면서 왠지 익숙하다. 

 

  봄날의 나른함에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아무데나 누워있고 싶어진다.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잠시라도 등을 붙여보면 그야말로 하늘을 이불삼고 천하를 집으로 삼아 누워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전설로 남아 있는 진묵(震黙, 1562-1633)대사는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노래했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아 산을 베고 누웠으니

 月燭雲屛海作樽. 달은 불 밝히고 구름은 병풍 되니 바다가 술단지로다.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하여 벌떡 일어나 환희의 춤을 추노니 

 却嫌長袖掛崑崙. 아서라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 것 같도다.

 


사진1. 다솔사 대양루. 

 

​  다솔사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에 있는 봉명산(鳳鳴山, 400m)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산에 있어도 들판을 지나 조금만 들어가면 다다를 수 있으니 내왕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동네에서 사찰 어귀로 들어서면 소나무, 측백나무, 삼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울창한 숲속에 들어온 것 같다. 옛날에는 사찰이 방치되다시피 하여 그해 겨울에 왔을 때에는 인적이 드문 당우와 함께 이 숲마저 을씨년스러웠다. 요즘에는 잘 단장하여 야트막한 숲속으로 산보散步를 즐길 수 있는 산책로도 만들어 놓았다.

 


사진2. 다솔사 대양루와 중건비. 

 

  창건연대를 보면, 다솔사는 503년 신라 지증왕(智證王, 500-514) 4년에 연기 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때가 언제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견해가 분분한데, 263년 미추왕(味鄒王, 262-284) 2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 화상이 전했다는 견해와 소지왕(炤知王, 479-500) 때 전했다고 하는 견해 사이에는 약 200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소지마립간麻立干 다음이 지증마립간이다. 창건주 연기 조사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인도 승려라는 연기 조사도 있고,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의 고승이라는 연기 조사도 있다.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의 창건주로 전하는 연기 화상이라면, 1978년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의 사경발문에 나와 있듯이, 연기 화상은 황룡사皇龍寺의 승려이고,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 사람이다. 아무튼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기다려본다.

 


사진3. 다솔사 적멸보궁.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 5년 636년에는 자장(慈藏, 590-658) 율사에 의하여 당우 2동을 세우고 다솔사陀率寺라고 하였다. 그 후 676년 문무왕(文武王, 661-681) 16년에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영봉사靈鳳寺로 다시 바꾸었다가 경문왕(景文王, 861-875) 때 도선 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중건하고 다시 다솔사로 이름을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그 이후 다솔사는 1326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1313-1330, 1332-1339) 13년에 나옹(懶翁, 1320-1376) 선사가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중수되었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전화戰火에 당우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1686년 숙종(肅宗, 1674-1720) 12년에 이르러 복원하였으나, 1748년 영조(英祖, 1724-1776) 24년에 건물이 대부분 소실되었고, 1758년에 이르러 명부전冥府殿, 사왕문四王門, 대양루大陽樓 등을 중건하였다. 일제식민지 시기인 1914년에 화재로 인하여 대양루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불타버렸는데, 1915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대양루를 제외한 건물은 1915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사진5. 다솔사 안심료. 

 

  다솔사라는 절의 이름이 독특하다.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우리말 솔과 한자어 다가 합쳐진 것을 이두식 한자로 다솔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방장산의 모습이 대장군과 같이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多率]처럼 보여 그런 의미에서 다솔이라 했다는 속설도 있으나 이해하기 어렵다. 불교 개념으로 보면, 석가모니불을 이어 성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미륵불이 살고 있는 욕계欲界 6천天 중 제4천의 정토가 도솔천兜率天인데, 산스크리트어로 만족스럽게 된 경지를 뜻하는 뚜쉬타Tusita라고 하고 두솔타兜率陁라고 한역한다. 이를 한자어로 의역意譯할 때는 지족知足이나 묘족妙足 또는 희족喜足, 희락喜樂 등의 단어로 사용하고, 음역音譯할 때는 도솔, 두솔, 다솔 등으로 부른다. 여기서 도솔이나 두솔을 다시 한자로 표기할 때는 兜率로, 다솔은 多率로 쓰기 때문에 다솔사는 곧 지족암知足庵이나 도솔사兜率寺로 이름을 지어도 되는 미륵 보살이 있는 정토를 뜻하는 말이다. 다솔사는 이렇게 미륵신앙의 본처로 이름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붓다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로 바뀌어 있지만 말이다. 

 


사진6. 김정설, 최범술의 다솔사 강연 장면. 

 

 다솔사의 경내로 들어서면 여느 절과는 달리 일주문一柱門과 천왕문天王門은 없고, 고색창연한 대양루를 바로 맞이하게 된다. 대양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있는 부처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 대양루는 사찰의 구조에서 부처가 있는 영토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불이문不二門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문루이다. 부석사에서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안양루가 가지는 의미와 같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전체 건물 길이가 13m에 이르는 맞배지붕의 2층 누각이다. 장중한 모습이 다솔사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다. 대양루는 아래 1층을 막아 창고 등으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절집 살림이 넉넉지 못하여 공간을 아껴 써야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원래는 1층 기둥 사이를 지나 적멸보궁으로 나아가는 출입 문루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막아놓은 1층 공간을 틔워 열린 공간으로 만들면 훤칠한 대양루의 모습이 살아날 것 같다. 그렇지만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니 손대기가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사진 1). 

 

 옛 사진에서 볼 수 있었던 대양루 2층의 6개 기둥에 걸려있던 영련楹聯은 없어졌는지 현재는 걸려 있지 않다. 요즘에는 정자, 누각, 서원, 사찰 등에 걸려 있던 현판이나 주련, 심지어는 석등이나 석탑도 떼어내 돈으로 바꾸겠다고 거래하는 천박한 일이 흔한데, 대양루 주련은 그런 경우가 아니기를 기대해본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거래되는 현판, 주련, 석등, 석탑, 동자상 등을 모두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놓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이 있으면 좋겠다. 시민들이 이러한 것을 발견하는 대로 사진을 올리고 그것의 원래 자리를 확인해주는 사이트를 만들어 활동하면 쉽게 할 수 있다.  

 


사진7. 동춘차. 

 

 대양루로 올라가는 계단 옆 넓은 터의 한쪽에 숙종 30년(1704)에 세운 다솔사 중건비가 서 있는데, 이 비에 ‘朝鮮國 慶尙右道 昆陽郡 北智異山 靈嶽寺 重建碑’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봉명산의 원래 이름이 영악산이었고, 창건 당시에 절 이름을 이 산 이름에서 따와 영악사라고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도 해본다. 비문은 시와 문장으로 명성을 떨친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지었고, 명필로 이름을 떨친 함경도관찰사 함흥부윤 이진휴(李震休, 1657-1710)가 이를 썼다. 전액篆額은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1612-1699)의 아들인 대사헌 권규(權珪, 1648-1722)가 소전小篆으로 썼다(사진 2). 권규는 당시에 전서를 잘 쓰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진휴는 종조부인 명필 이지정(李志定, 1588-1650)의 후손인데, 이하진(李夏鎭, 1628-1682), 이서(李溆, 1662-1723), 이익(李瀷, 1681-1763) 등 이 가문의 학자들은 대대로 명필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통도사의 ‘사파교주석가여래영골사리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舍利浮屠碑’도 이 세 사람이 똑 같이 짓고, 비명과 전액을 썼다.  

 


사진8. 한용운 식수 향나무. 

 

  대양루를 옆으로 돌아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한 단 높은 지대에 경봉(鏡峯, 1892-1982) 대선사가 쓴 현판이 걸린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사진 3). 이곳은 원래 대웅전이었는데, 1979년 응진전應眞殿에 모셔져 있던 아미타여래불상 속에서 불사리佛舍利 108과가 나오자 불사리탑을 조성하고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바꾸어 개축하였다. 적멸보궁 오른쪽 뒤에 응진전이 있다.  

 

  적멸보궁 옆에 있는 요사체에는 ‘죽로지실竹露之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세로로 된 ‘방장산方丈山’이라는 현판과 ‘다솔사多率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오래전에 왔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걸려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사진 4). 1934년 다솔사에 광명학원을 설립하고 농촌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던 당시에는 이곳이 경남 지역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사상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기도 했는데, 공산주의자인 하필원(河弼源, 1900-?), 박락종朴洛鍾, 정희영(鄭禧泳, 1902-?) 등이 ‘고려공산당 선언’을 한 장소도 이곳 ‘죽로지실’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19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안심료安心寮와 붙어 있는데, 이 안심료에서는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있었다(사진 5). 항일독립운동을 한 시승詩僧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은 다솔사에 근거지를 두고 서울의 망월사望月寺 등을 오가며 불교혁신운동과 독립운동 등을 할 때에도 안심료에 자주 머물렀다. 만해선생과 다솔사의 인연은 깊다. 이런 역사에는 다솔사 주지를 맡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崔英煥, 1904-1979) 선생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평생 만해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활동했다.

 

 


사진9. 다솔사 광명학원 1회 졸업생. 

 

 

  만해 선생은 그 삶 전체가 역사라서 많은 부분 우리가 알고 있다. 1909년 만해 선생은 일본 불교계와 새로운 문명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자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서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여 친일불교세력과 대항하면서 실천적 활동에 나섰다. 1919년 그는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다솔사에서 집필하고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 등과 논의 끝에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와 본인이 쓴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채택했다. 독립선언사건으로 3년 징역형을 살고 나온 후에도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승려의 결혼자유도 조선불교혁신의 하나로 맹렬히 전개하고, 스스로 결혼도 하였다. 이런 승려의 결혼자유운동은 불교계에 파장을 주어 적지 않은 승려들이 결혼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승려의 결혼은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지금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을 거치면서 승려에게는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되었지만, 일제식민지 시기에는 그렇지 않은 분위기였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당시에 종교개혁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교회의 부패 이외에 성직자의 혼인자유였다. 결국 기독교는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 카톨릭과 혼인을 인정하는 개신교로 분리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만해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효당 선생은 12세 나이에 다솔사에 입문하고 1919년 15세의 나이로 친일승려인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 주지로 있는 해인사에서 피 끓는 동지들과 함께 기미독립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인 박열(朴烈, 1902-1974)과 함께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결성하고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동지들과 함께 암살, 폭탄 투척 등 행동주의적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불교공부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입정立正 중학교를 마치고 대정大正 대학에 다니던 시절인 1928년에 다솔사 주지로 피선되었고, 동경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을 결성하고 범산凡山 김법린(金法麟, 1899-1964), 강유문姜裕文, 허영호許永鎬 등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불교학, 역사, 철학, 불교예술 등을 광범하게 공부하고 1933년에 귀국하였다. 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친일불교세력에 대항하며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하고, 서울에 명성여학교(현 명성여중고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일하면서 다솔사에는 ‘다솔강원多率講院’을 설립하여 조선의 천재로 불린 범보凡父 김정설(金鼎卨, 1897-1966) 선생, 김법린 선생 등과 함께 강사로 나서 동서양 철학, 불교학, 기독교, 새로운 학문과 지식 등에 관하여 강의를 하였다. 당시 자주적인 교육기관이 변변치 않던 시대라 이 강의를 듣고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사진 6). 대양루를 보면서, 암울하던 시대에 그래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힘을 길러가던 지식운동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다솔강원은 이후 해인사 강원에 통합되고, 1936년에는 다솔사에 다시 불교전수강원이 설립되어 김정설 선생과 김법린 선생 등이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여 다솔사 근처 가옥에 생활하면서 지식운동과 함께 만당의 비밀항일운동도 같이 전개하였다. ‘동춘차東春茶’를 법제하여 우리 차의 전승에 힘쓰고 있는 박동춘(朴東春, 1953-) 선생에게 초의 선사의 제다법을 전해준 응송應松 박영희(朴暎熙, 1893-1990)화상도 이 시절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하였다(사진 7).      

 

  김정설 선생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의 후손으로 19세에 최준(崔浚, 1884-1970)과 안희재(安熙濟, 1885-1943)가 설립 운영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장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東洋 대학, 도쿄東京 대학, 교토京都 대학 등에서 공부를 하면서 접한 동서양학문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사상인 풍류사상, 화랑정신, 불교, 주역 등 문사철文史哲 모든 부문에 박학다식하여 귀국 후에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는 등 종횡무진으로 지식과 사상을 펼쳐나갔다. 특히 해방 후 근대 국가를 건국할 경우 국가철학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에 관하여 여러 방면에서 건국방략을 설파하며 건국철학을 전개하였다. 해방 전후의 지식사회에서 김정설 선생은 건국 논의의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1950년에는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58년에는 건국대학교에 동방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역학 등 동양사상을 강의하였는데, 황산덕(黃山德, 1917-1989) 선생, 이항녕(李恒寧, 1915-2008) 선생, 이종익(李鍾益, 1912-1991) 선생 등 기라성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선생에게 영향을 받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1961년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장군이 거사를 한 다음 곧바로 김정설 선생을 찾아가 국가철학과 새 국가의 방략 등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한 일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진10. 효당본가 반야로차. 

 

 

 김법린 선생은 14세에 은해사로 출가하여 기미독립운동 때에는 범어사梵魚寺를 기반으로 하여 경남 지역 만세운동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려고 한 계획이 좌절되자 1921년 프랑스 파리 대학으로 유학하여 철학 공부와 함께 해외 독립운동을 모색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8년 귀국하여 경성불교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도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고 1930년 5월 만해선생의 지도하에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만당의 비밀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마자와駒澤 대학에서 불교를 연구함과 동시에 최범술 선생과 만당 도쿄지부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말 만당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김정설 선생, 최범술 선생과 같이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고, 출옥 후 다시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의 중심에 섰고, 1948년 5·10 총선거를 관리할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교육제도를 정립하는 일을 하였다. 1954년 민의원民議院 의원으로 활약하는 등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삶 전체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이런 와중에 1939년 8월 29일 만해 선생은 다솔사에서 화갑을 맞이하여 여기를 거점으로 하여 출입하던 인사들과 자리를 함께하며 나라의 앞날에 관하여 논의를 하고 그때 향나무를   직접 심었는데, 지금도 푸르른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사진 8). 

 

  최범술 선생은 일제식민지시기에도 이러한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1948년 제헌국회로 나가 제헌의원으로 대한민국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을 건국·출범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선생과 최초 사립대학인 건국대학을 건립하는가 하면 해인 대학, 계림 대학 등을 운영하는 등 교육제도의 기초를 구축하는 일에도 열성을 다했다. 학문과 서예, 예술, 다도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가지고 활동하였기에 1978년 다솔사를 떠날 때까지 문인, 묵객, 학계, 예술계, 종교계 등의 많은 저명인사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1919년 해인사 홍제암에 주석하고 있던 임환경(林幻鏡, 1887-1983) 화상의 상좌로 들어가 함께 수학한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 선생과는 평생 형제같이 지냈는데, 그 인연의 흔적은 청남 선생이 쓴 응진전의 주련으로 남아 있다. 서예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진 효당 선생은 청남 선생이 진주 의곡사義谷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서예가로 왕성한 활동을 할 때에도 늘 함께 하는 도반道伴이었다. 특히 효당 선생은 평생 원효 대사에 관하여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며 원효불교를 설파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근래 와서 원효의 불교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최범술 선생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다솔사의 역사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지성사에서도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나는 그 당시 활동하던 김범부 선생이나 김법린 선생, 최범술 선생이 해방 이후 대학에 들어가 교수로 활동하며 그 지식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활동을 하였으면 우리나라 대학이나 지식사회나 교육이 발전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 많다. 동국대학교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본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불교, 철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으로 키워나갔다면, 불교연구와 철학에서 가장 왕성한 세계적인 대학으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가장 아쉽다. 지금이라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11. 효서여연.

 

 다솔사에서 김정설 선생, 김법린 선생, 최범술 선생이 중심으로 활발한 지식공동체가 형성되어 활동하고 있을 때, 김정설 선생의 동생인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선생도 가족과 함께 1934년 다솔사에서 설립한 광명학원光明學院으로 와 교사로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광명학원이라고 해봤자 김동리 선생 한 사람이 교사였고, 학생들은 아동부터 어른까지 다양했다. 한글과 기초지식을 가르쳤다(사진 9). 김동리 선생은 1940년까지 다솔사 안심료에 머물면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쳐가는 동시에 이 선생들로부터 우리 불교의 역사와 전통사상 등을 들었다. 신라의 지장地藏 김교각(金喬覺, 695-794) 화상의 등신불等身佛 이야기를 들었고, 역사, 철학, 불교 등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가면서 그의 소설을 써갔다. 1935년 발표한 「화랑花郞의 후예後裔」(1935)로 시작하여 「산화山火」(1936), 「무녀도巫女圖」(1936), 「바위」(1936) 등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조선 문단의 새 지평을 여는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60년대 발표한 소설 「등신불」도 이곳 다솔사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최범술 선생은 다솔사의 앞 동네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기까지 60여 년을 이곳에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특히 일제식민지 시기에 일본차가 성행하고 우리 차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여 다솔사 인근에 자생하던 차나무에서 씨를 받아 절 뒤쪽 비탈에 차밭을 가꾸어 우리 차를 다시 살리고 차도茶道를 새로 정립하는 활동도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차를 마시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고 다솔사 인근에서 자라는 자생 차나무의 잎을 따서 차로 만들어 끓여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일본에 차가 생활화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의 전통 차와 차의 역사, 차도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초의草衣 선사(1786-1866) 이후로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한국 차도를 다시 살려내고자 다솔사에 차밭을 일구고 차를 법제法製하고 차를 마시는 법을 정립하였다. 초의선사가 저술한 「동차송東茶頌」을 처음 소개하고 번역하여 대중에게 알리면서 중국에 당나라 육우(陸羽, ?-804)의 「차경茶經」이 있다면 이 「동차송」은 한국의 차경이라고 그 위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효당본가曉堂本家에서 증차법蒸茶法으로 만든 이 차를 ‘반야로차般若露茶’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간에 다솔사를 방문하던 차 동호인들로 차석茶席을 가지던 일을 체계화하여 1977년 국내 처음으로 차도를 추구하는 전국적인 모임인 ‘한국차도회韓國茶道會’를 발족시켰다. 서울지회장은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 1917-2004) 선생이, 부산지회장은 오제봉 선생이, 광주지회장은 의제毅齋 허백련(許百鍊, 1981-1976) 선생이 맡는 등 당대 많은 명망가들이 참여하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차를 전해준 이후 일본에서는 차도가 활발하게 발전하였는데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차도가 소멸되다시피 하였는데, 최범술 선생에 의하여 비로소 차도를 다시 정립하고 발전시킬 기틀이 만들어진 셈이다. 효당 선생 사후에는 채원화蔡元和 원장이 반야로차도문화원般若露茶道文化院을 설립하여 효당 선생의 증차법에 따라 차를 법제하고, 효당차도를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차회와 차도교육활동을 국내외적으로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사진 10). 오늘날에는 차인들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지만, 이런 불씨를 지핀 주인공들은 다솔사를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사진12. 다솔사 차밭. 

 

 

 어느 해인가 나는 강진康津 백련사白蓮寺에 들렀을 때, 유서 깊은 자생차를 가지고 차를 만들고 차도를 이끌어 가시는 여연如然 화상의 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방에 들어서자 눈에 익은 글씨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안광석 선생의 글씨다. ‘효서여연曉誓如然’. 그래서 ‘이 글씨가 왜 여기 있는가요?’라고 물었더니, 당신께서 차도를 공부하며 다솔사를 출입하던 때인 1977년 겨울에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죽로지실에서 차호茶號로 원효의 ‘효曉’자와 신라 서당誓幢의 ‘서誓’자를 따서 ‘효서’라고 짓고 옆에 계시던 청사 선생이 붓을 들고 법명과 함께 써주신 것이라고 하였다(사진 11).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청사 선생이 즐겨 쓰시던 호인 대연大然과 여연 화상의 여연, 그리고 청사 선생이 나에게 지어주신 당호 거연居然이 그간에 서로 보이지 않은 인연으로 맺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연을 생각하시고 나에게 당호를 거연으로 지어주신 것인지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여연 화상은 효당 선생으로부터 이름을 받은 ‘반야차般若茶’를 백련사에서 만들고 초의 선사의 다도의 맥을 발전시켜 지금까지 많은 차인들이 함께 공부하며 이 차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떠 있는데도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햇살에 반짝이는 빛 가득한 차밭을 상념에 젖은 채 천천히 걸었다. 옛날과 달리 차밭이 잘 정돈되어 있고, 차밭을 산책할 수 있게 소로小路도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사진 12). 지난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온갖 일들이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그중에서 나는 한국지성사라는 관점에서 다솔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새겨보았다. 사람마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한 세월 진지하게 산 그 사람들은 이야기만 남겨 두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나른한 시간에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이 긴 빗자루로 텅 빈 안심료 앞마당을 쓸고 있었다. 속세에 쌓인 온갖 인연을 영겁의 세계로 쓸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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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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