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꿈 속에서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는 꽃인가
페이지 정보
서종택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4:34 / 조회5,783회 / 댓글0건본문
시詩와 선禪 선과 시 1 - 남전모란
모란과 작약
모란꽃(사진 1·2)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란꽃을 보러 갑니다. 모란과 작약은 정말 아름다운 꽃이지만 그리 흔한 꽃은 아닙니다. 특히 모란은 더욱 보기 쉽지 않은 꽃입니다.
모란과 작약은 꽃 모양이나 색깔은 물론 크기도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습니다. 꽃이 피는 시기도 비슷하고 잎 모양까지도 비슷합니다.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이라 겨울에는 뿌리만 살아 있습니다. 모란은 예로부터 모든 꽃의 왕이며, 최고의 아름다움이었고, 부귀의 상징입니다. 모란이 피었다면 좀 멀더라도 가서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절집에서는 모란이 부귀의 상징이라고 모란 대신에 작약을 많이 심었습니다. 작약을 흔히 ‘가시 없는 장미’라고 부릅니다. 장미처럼 아름답지만 가시가 없으니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작약은 그렇게 해서 성스러운 식물이 되었습니다.
모란은 나무에 피는 작약꽃이니 훨씬 더 아름답고 귀한 꽃입니다. 모란이 십 수 년을 자라면 사람 키만큼 자라고 수백 송이의 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처럼 화려한 모란은 보지 못했지만 몇 송이 모란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측천무후가 모란을 좋아했고, 후대에는 양귀비를 모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구양수는 천하의 진정한 꽃은 오로지 모란뿐이라고까지 예찬했습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는 봄이면 모란을 보기 위해 성을 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갔다고 합니다.
유독 우리나라에는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줄 압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란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다 더 사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삼국사기』 선덕왕 본기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선덕여왕’이라고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선덕왕’입니다.
모란꽃은 향기가 없을까
“선덕왕이 즉위하였다(632년).
왕의 이름은 덕만으로 진평왕의 장녀고, 그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 그런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임금으로 세우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사진1. 모란꽃
전왕(진평왕) 때에 당나라로부터 얻어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왕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덕만이 대답하기를,
‘이 꽃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대체로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아주 아름다우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이겠습니다.’ 꽃씨를 심어 보았더니 과연 말한 것과 같았다. 덕만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주1)
물론 이 기록은 여성으로서 최초의 여왕이 될 만큼 선덕이 지혜로웠다는 일화입니다. 그런데 정말 모란에는 향기가 없는 걸까요? 우리는 진짜 모란을 보기 전까지는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역사책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모란꽃에는 품종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향이 있습니다. 스스로 꽃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왜 『삼국사기』에는 향기가 없다고 적어 놓았을까요?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들이 원전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를 김부식이 썼다고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은 김부식은 편찬 책임자이고 여러 명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입니다.(주2) 그들이 옛날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서술했고, 후학들은 『삼국사기』의 서술을 그대로 사실인양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배운 대로 받아들이는 교육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서술에는 반드시 서술한 사람의 이름과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서술이 사실은 어떤 한 사람의 주장인 점을 알게 하여 출처의 신빙성을 스스로 따져 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를 길러주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책이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도 없고, 책이 없으면 우리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서경』이라는 경전도 전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주3) 책에 쓰인 대로 다 믿는다면 차라리 책이 없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책이든지 그 책이 써진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을 궁리해가면서 읽어야 합니다. 책은 항상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며 그 일부는 믿되 전부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모란을 보면서 우리는 책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은 장미와 함께 흐드러진 꽃잎이 너무나 수려하여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중국에는 꽃잎이 300장도 넘는 모란이 있어 보는 사람을 숨넘어가게 합니다. 꽃 한 송이가 피워내는 화려함에서 모란만한 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진 속 모란꽃잎을 한 장 한 장 직접 세어보니 16장이었습니다. 하늘하늘한 16장의 꽃잎이 만들어내는 화려함은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합니다. “모란꽃 밑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류가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흐드러지게 핀 모란꽃을 좋아하는 사람도 언젠가 꽃이 떨어지는 줄 알고 봅니다. 세상 또한 이런 것인가, 내일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부귀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도 모란꽃을 보면서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다실을 장식하는 꽃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꽃은 쓰지 않았습니다. 너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이 다실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실에서는 동백꽃도 꽃봉오리만 쓴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봄날 한 때, 모란도 꽃봉오리라면 다실에 꽂아두고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모란꽃을 보기에는 오전 10시가 가장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후가 되어 꽃이 지나치게 피면 아름다움이 오히려 생기를 잃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말들은 다 경지가 있고 함축성이 있는 말이라 스스로 가만히 생각해볼 만합니다.
모란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시가 있고, 너무 많은 그림이 있고, 이야기 또한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마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듯합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주4)
12행의 짧은 시이지만 유려한 가락 속에 모란의 희로애락을 남김없이 담았습니다. 직유나 은유의 도움 없이도 모란에 대한 기다림을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들게 하는군요. 화려한 모란의 낙화를 통해 ‘설움’을 표출하면서도 ‘찬란한 슬픔’의 개화를 기다리는 시인이 자못 아름답습니다. 모란에 대한 가장 심원한 메시지는 1,200년 전 중국 한복판에 있는 안휘성 남전산 산속에서 나왔습니다. 남전 선사가 찾아온 육긍 대부와 문답을 하는 가운데 뜨락에 핀 모란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2. 모란꽃
“대부, 요즘 사람들은 이 꽃을 보더라도 꿈속에서처럼 희미하게 밖에 못 본다네.”(주5)
범부라 하더라도 이 한 말씀을 듣고 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꿈에서 깨어나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더 생생하고 아름다울까요. 비록 전해 듣는 말이라 할지라도 이런 말을 알게 되면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전 선사의 말씀을 생각하며 모란꽃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전체 풍경이 확 달라지면서 참으로 생명이 세탁되는 것 같은 신선한 느낌을 받습니다.
주)
1) 『三國史記』 券第五, 「新羅本紀」 第五, 「善德王·眞德王·太宗王」: “善德王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金氏摩耶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對曰: ‘圖花無蜂蝶, 故知. 大抵女有國色, 男隨之; 花有香氣, 蜂蝶隨之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2) 編纂委員: 金富軾, 崔山甫, 李溫文, 許洪材, 徐安貞, 朴東桂, 李黃中, 崔祐甫, 金永溫, 鄭襲明, 金忠孝 등 11명이 仁宗의 명을 받아서 편찬하였다.
3) “『서경』의 내용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오히려 책이 없는 편이 더 낫다. 나는 『서경』 「무성편」의 글은 두세 구절만 받아들일 뿐이다.”(『孟子·盡心下』: “盡信《書》, 則不如無書, 吾於「武成」, 取二三策而已矣.”)
4) 김영랑, 『영랑시집』, 詩文學社, 1935.
5) 『從容錄』第九 「十一則」: “南泉牡丹. 泉庭前牡丹指云: ‘大夫! 時人, 此一株花見夢如相似.’”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