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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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0:37 / 조회5,496회 / 댓글0건본문
시詩와 선禪 선과 시 2 | 조주끽다趙州喫茶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가 가져다주는 따스함의 문제라고 리처드 브라우티건(미국 소설가, 1935-1984)이 어딘가에 썼습니다. 커피에 대해 쓴 문장 가운데 이 글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습니다. 한 잔의 차에도 이처럼 심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심원한 세계일수록 일상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차를 한 잔 마시며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하고, 차로써 친구를 사귀거나 만나기도 하며, 손님을 접대하기도 합니다. 손님이 왔을 때 가장 큰 환대도 바로 환영의 의미로 차 한 잔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손님이 갑자기 찾아와도 차 한 잔 대접할 수 있으면 당황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 차나 한 잔 할까요” 하면서 장면을 전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차 생활의 기쁨 중 하나입니다. ‘차 한 잔도 주지 않는 것’은 손님을 내쫓는 것과 같습니다. 잡념 없이 물을 끓여 차 한 잔 우려내어 마실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파스칼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진 1. 차 한 잔.
“인간이란 아무리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만약 누군가가 그의 마음을 딴 데로 돌리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 동안만큼은 행복해지는 존재이다. 기분전환이 없으면 기쁨이 없고, 기분전환 거리가 있으면 슬픔이 없다.”(주1)
파스칼 식으로 말하자면 차를 마시는 행위로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동안만큼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퇴직 얼마 후에 만나보면 폭삭 늙어버린 친구도 있습니다. 기분 전환 거리가 없으니 기쁨이 없고 삶이 지루해지는 겁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기분 전환을 하는 일입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우리들의 물러터진 일상에 탄력을 줍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의 의미는 원대합니다.
밥 먹고 나서
백거이
밥 먹고 한숨 자고 나서
일어나 두어 잔 차를 마시네
고개 들어 해 그림자 보니
벌써 서남쪽으로 기울었구나
즐거운 사람은 해가 빨리 감을 아쉬워하고
걱정 많은 사람은 세월이 느리다고 답답해하네
나야 근심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길건 짧건 한평생 살아갈 뿐이라오(주2)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문자를 모르는 할머니에게 들려준 뒤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한 부분은 알아들을 때까지 고쳐 썼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서민적 감각을 중시했던 위대한 시인의 풍모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일자무식한 할머니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시이지만 그 속에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풍모가 드러납니다. 밥 먹고 차 마시는 가운데 시인은 즐거움도 없지만 근심도 없는 평온한 하루하루의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의 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헛다리를 짚기 일쑤입니다. 시는 종종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하니까요.
이 시가 지어진 때는 시인이 멀리 남쪽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어 있던 시기입니다. 그는 주제넘게 직언했다는 게 빌미가 되어 조정에서 밀려나 좌천되었으니 시에서는 ‘근심도 즐거움도 없다’지만 실제 심정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기 이후부터 시인은 불경과 노장 서적을 열심히 읽고 ‘얼굴에 근심과 기쁨의 기색 드러내지 않고, 가슴으론 시시비비를 깡그리 없앤’ 채 세속의 욕망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경』을 쓴 육우(?-704)는 끽다의 의례화 된 행위가 삶의 자각과 찬미 행위라 믿었습니다. 육우는 차를 마시는 순간은 일상의 다망함에서 벗어나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기회이며, 차 의식을 인생의 필수요소인 아름다움과 평온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차에 대한 가장 심원한 메시지는 당나라 말기 9세기에 살았던 한 가난한 선승에게서 나왔습니다. 조주(778-897)는 80세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작고 가난한 절의 주지가 되어 그 후 12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시절 조주가 남긴 간결한 메시지, ‘끽다거喫茶去’는 지금은 공안公案이 되었습니다. 공안이란 부처님과 역대 조사 선지식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기연機緣이나 오도悟道 인연, 또는 선문답을 가리킵니다.(주3)
“스님께서 새로 온 두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들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차나 마시게!’
또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와 본 적이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원주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와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그만두고라도, 무엇 때문에 왔던 사람도 차를 마시라고 하십니까?’
스님께서 ‘원주야!’ 하고 부르니 원주가 ‘예!’ 하고 대답하자
‘차나 마시게!’ 하셨다.”(주4)
조주 스님은 가난한 절이라 맛이 별로 없는 일상 차를 주며 오직 ‘끽다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끽다거’라는 말 자체도 일상에서 늘 주고받는 평범한 일상용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상용어로 화두를 던졌기 때문에 세 사람 가운데 누구도 그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주가 남긴 ‘끽다거’의 의미는 심원하고 다양하지만 그냥 평범한 일상용어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얇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주의 스승이었던 남전의 ‘평상심이 도’라는 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주5)
사진 2. 차 한 잔.
조주는 불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부처님을 구하고 하나의 경계를 구하느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차나 한 잔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 경계가 바로 보리입니다. 갈구하는 마음이 잠시 쉬면 그것이 곧 보리라는 걸 깨우쳐 주려 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주6)
살아 있다는 느낌은 ‘지금, 여기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것이니, 지금 여기서 눈앞에 놓인 차 한 잔을 그저 편안하게 마시라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불법은 가능태가 아닌 현실태로 이미 눈앞에 완전한 상태로 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공안에 대한 해설은 우리들의 분수가 넘는 일입니다. 해설은 없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말씀이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작은 지식이 큰 지혜를 가리기 때문에 종종 아는 사람이 더 어두워지기 쉽습니다. 그냥 저잣거리 담벼락에 낙서한 글도 읽다 보면 사람의 마음에 섬세한 울림을 줄 때가 있습니다. 쿤밍의 어느 찻집 담벼락에 갈겨 쓴 낙서입니다.
“옛날이 좋았지
아부지 따라 차 먹으러 가던 때가
찻집 문 앞에서
조개껍질 비비며 흙장난하던 때가”(주7)
인생은 때로는 한 잔의 차가 주는 따스함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차로 말미암아 추억은 또 얼마나 따뜻해지는 걸까요. 이처럼 ‘일상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차’, ‘평범한 차’가 차의 이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기본적인 고뇌에서 해방되면 사람은 티미해집니다. 사회에서 볼 때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존재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보폭을 잃지 않고 평범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차 한 잔 마시며 녹진하게 인생을 써내려가는 필묵이 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주)
1) 파스칼, 『팡세』, 1670.
2) 白居易 「食後」, “食罷一覺睡 起來兩甌茶 擧頭看日影 已復西南斜 樂人惜日促 憂人厭年賖 無憂無樂者 長短任生涯.”
3) 공안公案은 원래 상부의 공문, 법령, 규칙, 판례 등을 가리키는 행정·법률 용어이다. 그러나 본래 자의字意는 재판관이 공적으로 안건을 심리할 때 쓰던 큰 책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4) 『五燈會元』 卷四 「趙州喫茶」, “師問二新到, ‘上座曾到此間否?’ 云: ‘不曾到.’ 師云: ‘喫茶去.’ 又問那一人: ‘曾到此間否?’ 云: ‘曾到.’ 師云: ‘喫茶去.’ 院主問: ‘和尙! 不曾到敎伊喫茶去, 卽且置. 曾到, 爲什麽, 敎伊喫茶去?’ 師云: ‘院主!’ 院主應諾. 師云: ‘喫茶去.’”
5) 『無門關』 第十九則, “南泉, 因趙州問: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6) 『楞嚴經』, “狂性自歇, 歇卽菩提.”
7) 왕증기, 『맛 좋은 삶』,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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