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사전 금자탑 세운 탁월한 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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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1:22 / 조회5,522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7 /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1869-1948
벌써 20년도 넘었다. 필자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중국불교사를 강의하던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에 중국의 불교학자 한 분이 연구차 머물고 있다. 어느 날 이 분이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실은 『모치즈키望月불교대사전』(사진 1)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어디나 그렇지만 가치가 있는 책일수록 고서는 정가보다도 비싸다. 이 사전은 불교학자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도구 서적이다. 교수는 자신이 사주기로 하고 학교에서 점심을 꼭 사서 먹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사전 한 질을 사드린다고 해서 우리 선조들이 받았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는가!’라고.”
일본의 조사들은 한반도와 중국으로 구법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지만, 귀국할 때는 사경한 경전들을 애지중지 보물처럼 가져왔다. 그리고 일본에 전파했다. 오늘날 일본불교는 이 경전을 통해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구법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백성들이 이들 일본 승려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말단의 관리들은 보호해주었으며, 불교인들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맘껏 불법을 배워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개방했다. 그러니 불법의 홍은을 입은 후손들이 응당 무한한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법의 역사는 이러한 것이다. 적어도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불법의 가르침인 무상보시의 정신이 모두를 하나로 묶는 연대의 힘이 아니었으랴.
사진1. <모치즈키불교대사전>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1869-1948, 사진 2)의 사전은 이처럼 시공을 초월해 하나가 되었던 불교인들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동해가 보이는 후쿠이현 중부 타케후시 출신이다. 같은 현의 정토종 사찰 원해사圓海寺에 출가했다. 4년간 법요 작법을 익히고, 교토의 총본산 지은원知恩院 내 정토종 서부 대학림에 들어가 당시 뛰어난 불교학자들의 지도를 받았다. 이어 1888년 20세에 도쿄의 정토종학 본교에 들어갔다. 그곳에 함께 입학한 와타나베 카이쿄쿠渡辺海旭, 오기와라 운라이萩原雲来와 더불어 사람들은 그들을 삼우오三羽烏로 불렀다. 이들은 당시 최고의 수재들이었다. 와타나베와 오기와라는 정토종 제1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에 유학, 인도학자 에른스트 로이만Ernst Leumann의 지도를 받았다. 와타나베는 후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와 함께 『대정신수대장경』의 도감을 맡았다. 오기와라는 범어에 기반한 근대 불교학의 기초를 놓았다.
모치즈키는 국내 유학생으로 천태종의 본산 연력사延暦寺가 있는 비예산比叡山과 교토로 갔다. 그곳에서 종수사宗粋社를 창설하여 종단 개혁을 주장했다. 잡지 『종수宗粋』를 창간해 종단의 구폐를 비판했다. 또한 염불을 비난하는 일련종과의 논쟁도 불사했다. 1899년 정토종 고등학원의 교수가 되었지만, 결국 면직되었다. 그는 오히려 이 기회에 더 넓은 세상에서 활동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지식인들과 더불어 일본종교협회와 잡지 『종교계』를 만들어 활동했다. 당시의 불교인들과 학자들의 후원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종조의 어록과 행장을 총망라한 『호넨상인法然上人전집』을 완성했다.
그리고 문연당文淵堂이라는 출판사가 『일본문학에 나타난 불교의 술어사전』을 편찬했으면 한다는 요청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기간에 걸친 불교사전 편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4·6판 수백 쪽 정도의 사전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점점 확장되었다. 그래서 천 5백 쪽의 사전이 되었고, 여기에 불교 대연표를 넣어 출판하기로 했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집을 편집사무실로 사용했다. 당시에는 고지마 세키호児島碩鳳의 『불교사전』, 와카하라 케이쿄若原敬經의 『불교기본사전』 정도였다. 이제 총 지휘관은 모치즈키가 되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불교인, 불교학자들이 총출동하여 대사전의 고지를 정복하고자 했다. 재정문제로 출판사가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908년 제1권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부록으로 예정된 「불교 대연표」를 다음해에 내놓았다. 이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2권까지 출판하고 좌절되었다. 그것은 완벽성을 꾀하고자 하는 모치즈키의 학자적 기질과도 관련이 있었다.
한편, 종교의 역사는 모치즈키를 통해 참으로 정의의 편임을 보여준다. 19011년 그는 지금의 종무총장에 해당하는 정토종의 집강執綱에 선출되었다. 43세의 젊은 지도자였다. 그는 당연히 종단의 교육제도부터 개혁하기 시작했다. 정토종은 호넨 상인이 중세 가마쿠라 신불교의 선두주자로서 큰 의미가 있는 종단이다. 최고종단인 정토진종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문명의 전환기에 대응하는 교학을 새롭게 창출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야마자키 벤네이山崎弁栄 등이 비신화적 관점에서 장례불교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현실초월의 정토신앙을 현실 구제의 사명으로 전환하고자 한 광명회光明會를 비롯해 교학수립과 교단개혁을 외친 여러 운동가들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3. 정토종 대본산 금계광명사
모치즈키는 종단의 그러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마침내 종학대학 학장, 다이쇼大正 대학 총장은 물론, 호넨 상인이 처음 초암을 지어 최초의 정토종 사원이 된, 7대 대본산 중의 하나인 금계광명사金戒光明寺(사진 3)의 주지를 거쳐 1945년 지은원(사진 4) 82대 문적門跡이 되었다. 문적은 종조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종단 최고의 지위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불교학 연구가 자신의 본령임을 잊지 않았다. 1926년 다이쇼대학이 설립될 때, 스스로 정토학연구실의 주임을 자청하여 젊은 학도들을 양성하는 데에 앞장섰다. 교학이야말로 불법을 바르게 전승하는 근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단의 중책을 맡으면서 한 순간도 이 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 중에서 사전편찬이야말로 그의 사명이었다. 이를 위해 『대일본불교전서』의 간행을 기획했다. 사전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1922년 150책, 별권 도상 10권, 목록 1권으로 불교 대총서가 발간된 것이다. 이 외에도 『대승기신론의 연구』, 『대승기신론 강술』, 『정토교의 기원 및 발달』, 『대승기신론』, 『불교사의 제 연구』, 『정토교개론』, 『중국정토교리사』, 『불교경전성립사론』, 『호넨상인과 그 문하의 교의』 등 많은 연구서가 있다. 그 중에 『대승기신론』은 물론, 『인왕반야경』, 『보살영락경』, 『범망경』 등을 중국찬술 위경이라고 주장하여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학계가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음은 물론이다. 중국의 양계초도 이에 찬동했다. 지금의 일본 학계는 인도찬술과 중국찬술의 절충안으로 인도인이 중국에 와서 찬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토종의 승려이자 교학자로서 모치즈키는 정토교의 기원이나 그 발달 과정에 대한 연구 영역을 개척했다. 『정토교의 기원 및 발달』은 경전론, 불타론, 본원론, 정토론, 실천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시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이나 경전성립사를 기반으로 전개하고 있다. 『중국정토교리사』는 동진시대부터 명대까지 정토교 발달 과정을 다룬 것으로, 특히 교리의 전개와 실제 신앙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생인론生因論, 불신불토론, 고승전 내의 정토신앙의 양상, 정토신앙과 관련된 중국찬술문헌, 불전 외의 석각 자료 등의 제시, 송대 이후 정토교 발달 과정이나 신앙의 실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대일본불교전서』를 편찬하는 와중에 여러 고찰에서 발견된 정토교 전적을 모아 『속 정토종전서』19권을 발행했다. 『정토종전서』는 1907년에 23권이 발행되어 있었다.
그런데 『모치즈키불교대사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1916년 3권을 간행하고 멈춰서있었다. 일본 최초의 교원조합인 계명회啓明會에서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의지를 되살리고 동서양 불교연구의 성과를 반영하여 출판 준비를 해나갔다. 여기에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를 회장으로 불교대사전편찬후원회가 발족되었다. 1925년 편찬소가 재가동되었다. 다이쇼대학을 졸업한 많은 문하생이 가담했다. 처음부터 다시 면밀히 검토했다. 출판발행, 경영까지 모든 책임은 모치즈키가 짊어졌다.
사진4. 정토종 총본산 지은원
이리하여 1931년 신판 제1권이 출판되었다. 1936년 마침내 제5권이 발행되었다. 총 5,088쪽에 1,600개의 도상도 들어갔다. 모치즈키는 서문에 “아아, 악전고투 만 30년, 어쩌다가 후반 인생을 이 사업을 위해 바치며, 백설이 머리에 차고, 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나 간신히 오랜 뜻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여기서 과거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할 뿐이다”라고 썼다. 이후 문하생 즈카모토 젠류塚元善隆가 주임이 되어 새로운 항목을 보완, 정리하여 연표 및 색인과 함께 세계성전간행회를 출판사로 하여 전8권을 출간했다. 후에 누락분을 보완, 2권을 더해 총 10권이 발행되었다. 현재는 CD판으로도 나와 있다.
결국 『모치즈키불교대사전』 또한 근대 불교인들의 집단 지성이 총 발휘되었던 것이다. 대장경, 불교사전, 각 종파의 종전宗典은 이렇게 종횡으로 연결되며, 불교 연구나 신행의 핵심 서적들이 된다. 근대 일본불교학의 저력은 여기에 있다. 문헌학이야말로 해석학의 근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떤 학문이든 이러한 기본학이 바탕이 되어야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학문적 헤게모니를 선취하는 길이기도 하다. 불교인들은 언어 너머를 추구하지만, 사구死句의 언어야말로 또한 언젠가는 주인을 만나 활구活句의 언어로 전환될 것을 믿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근대의 불교사를 보면 불교인들이 참으로 치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가는 전제왕권에서 전체주의,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로 돌변해 가는데 불교인들은 마치 세상의 끝에 온 것처럼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 밖의 불과 안의 불이 차원이 다르지만 어쩌면 밖의 불을 끄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근대 일본불교는 국가불교로 전락하여 지옥의 불을 끄지는 못했다. 오직 장인정신만큼은 투철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역사가 흘러 그들의 유산으로 우리가 불교의 더 깊은 진실에 도달하게 될 때, 그 의문은 풀릴 수 있을까. 모치즈키 신코가 돌아온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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