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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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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4:12  /   조회4,37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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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모시고 대담을 갖기 위해, 안거 중인데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흔히 밖에서 말하기를, 큰스님 뵙기가 몹시 어렵다고들 합니다.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부처님께 3천 배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일반인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째서 3천 배를 하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 계실 때부터 그런 가르침을 시행하게 되셨습니까? 

 

“흔히 ‘3천 배 하라’ 하면 ‘나를 보기 위해’ 3천 배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 배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절해라, 자신을 위해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3천 배 절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하는 것이 잘 안 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3천 배는 그전부터 시켰는데, 본격적으로는 6·25사변 뒤 경남 통영 안정사 토굴에 있을 때부터입니다. 또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만이라도 해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마라. 나 같은 스님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그래도 자꾸 찾아 오길래 할 수 없이 철망을 쳤지요. 그래서 성전암에서 철망 치고 한 10년 살았습니다. 철망을 치고 산 것도 겉으로 보면 도도한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부처님을 찾으시오.’ 하고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무엇으로 부처님을 대행하겠습니까. 나야 그저 산중에 사는 사람이니 산사람이지요.”

 

*요즘 세태를 보면, 날이 갈수록 인간 사회가 험악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사회에서 존립의 터전으로 내려온 기존의 가치 체계나 규범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산중에 들어앉은 사람이니 세상일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새 풍조를 보면 너무나 물질에 치중한 것 같아요. 물질에 치중해서 물질에 자꾸 끄달리다 보니 이성을 상실하고, 자연 탈선행위를 하게 되지요. 그 근본 원인을 보면, 서양의 물질문명을 너무 맹종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래도 정신문명에 있어서는 동양이 서양보다 수승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 병을 고치려면 전통적인 동양의 정신문화를 새로 복구시켜 정신이 위주가 되어 물질을 지배해야 합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고 완전히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약육강식 그대로입니다.

 

 

법문 하는 성철 스님. 

 

앞으로 우리가 참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면 물질문명을 배제한다기보다는, 물질이 없으면 살지를 못하니까, 동양의 정신이 주가 되고 물질이 종이 되어 따라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서양 문명에서도 물질이 발달할수록 인격은 더 상실되고 동시에 악행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는 그 근본책임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정신적인 지도 역할을 맡고 있는 종교인에게 있다고 봅니다. 살인, 강도 등 범죄가 있다면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신적인 지도책임을 맡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참다운 지도를 하지 못하고 참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본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독립된 현상만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희들 자신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에게도’가 아니지요. ‘에게도’가 아니고, 실제로 책임은 근본 책임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인이란 정신을 지도하는 근본책임을 맡았으니, 예전 스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극중한 죄인은 내가 아니고 누구냐?’고 했습니다. 종교인 자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종교인이라는 사람, 성직자라는 사람부터 근본 자세를 바로잡아서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정신적 지도부터 잘못되었다고 하면 밑에서 지도 받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 근본책임을 맡은 종교인, 성직자인 우리가 참회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입니다만, 물질적인 부를 인간의 행복으로 여기던 가치관, 즉 물질적인 척도로서 인간의 의미를 재려던 생각은 이제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이 의지할 가치 의식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근본 가치는 인격에 있는 것이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으려면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부터 회복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본래 인간은 절대적 존재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물질 만능에 그 존엄성이 묻혀서 인간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깨끗한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해서 아무 티끌도 없는 것인데, 먼지가 잔뜩 앉을 것 같으면 본래의 작용을 못 합니다. 즉 거울 본래의 근본 역할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본래의 깨끗한 거울, 때 묻지 않은 거울로 복구만 시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지를 닦아내야 합니다. 먼지만 닦아내면 그만이지 거울을 딴 데 가서 구할 것도 없고, 또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래 깨끗한 인간의 절대성, 인간 존엄성을 복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 회복이란 본래의 청정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지요?

 

“그렇지요. 본래의 청정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 무슨 새로운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본시 깨끗한 거울을 두고 어디 가서 새로운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거울에 낀 먼지만 닦아내면 됩니다. 그러면 본시 거울 그대로입니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 특히 토인비 같은 역사가는 현대 문명의 해독제로서 불교사상을 크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야말로 인류 구제의 길잡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의 인류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불교를 잘 안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사상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데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그리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여기에 우리 불교의 근본이 서 있습니다. ‘성불한다.’고 하여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실은 방편설입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는 것은 부처 아닌 중생을 부처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본래 부처인 이것을 바로 보고, 현실이 본래 절대 극락세계인 이것을 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중생, 중생’, ‘사바세계, 사바세계’ 하는가? 내가 늘 비유로써 말합니다. 대낮에 광명이 우주에 충만하게 쏟아져도 눈먼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설사 눈감은 사람이 광명을 보지 못해도 광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해는 떠서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감고 있어서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현실 이대로가 본래 절대인 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근본은 마음의 눈을 바로 뜰 것 같으면 광명을 따로 찾을 것도 없고 부처를 따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여기도 극락세계, 저기도 극락세계이지요.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부처님도 방편으로 서방의 극락세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감고 잘 모르니, 어떠한 표준을 말하기 위해서 서방(주1)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조 스님 말씀에 ‘동방 세계 사람이 염불해 서방 세계에 간다면 서방 세계에 있는 사람은 염불해서 어디로 가느냐?’(주2)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입니다. 전체가 본래 부처고 전체가 본래 극락세계인 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섬기자.’ 이것입니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 믿는 처음 조건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로 섬겨라,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요새 흔히 ‘구제 사업’이라 하는데, 이 말이 우리 불교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입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는 옷 없는 부처님, 양식 없는 부처님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옷이 없으니 불쌍하다, 저 사람이 양식이 없으니 불쌍하다. 그러니 불쌍해서 구해 준다는 것은 상대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불교에는 ‘구원’이란 없습니다. 구원이란 불쌍하고 못난 사람을 구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고 그냥 돕는 것이 아닙니다. 저쪽 상대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불공’이다, 이 말입니다. 남을 돕고 모시는 것이 불공이다, 이 말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만약 배가 고프다면 아버지가 불쌍해서 밥을 가져다 드립니까? 큰일 날 소리입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 불쌍하니까 구병救病한다고 하면 그것도 자기 아버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 생활을 불공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상대가 부처인 줄 알면서 부처님으로 섬기고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세계를 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로가 극락세계가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말 불공의 진짜 의미입니다. 절에서도 그렇습니다만, 흔히 부처님 앞에 무얼 차려 놓고 똑딱거리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있는데, 방금 스님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불공을 한다면, 처처處處에 부처이고 처처에 법당이기 때문에 세계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절은 불공을 가르치는 곳이지 불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탁자에 앉아 있는 부처님만 부처고 밖에 있는 부처님은 부처 아니냐는 말입니다. 탁자에 앉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것을 가르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시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순전히 나 자신, 내 가족의 명 빌고, 복 빌고,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다, 이리되면 부처님 말씀은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주 좋은 법문입니다. 간디의 저서를 보면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어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옷을 사 입을 수 있도록 일거리를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도 스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불공의 의미하고도 연관이 될 것 같습니다.

 

“일거리를 주는 그것도 좋은데, 헐벗은 부처님 중에는 혹 게으른 부처님도 있다고 봅니다. 혹자는 그런 사람도 일하게 해줘야 되느냐 하는데, 물론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흔히 보면 ‘용서한다, 용서한다.’고 말하는데, 우리 불교의 근본에는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했다는 것인데,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입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근본책임은 나한테 있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해야지 그 사람을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는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말합니다.”

 

*제가 출가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전국승려대회가 서울에서 열린 적이 있습니다. 승려대회의 목적은,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재출마간청’ 궐기대회였습니다. 그 이래로 낱낱의 예를 들출 것 없이 한국 불교교단은 정치권력 앞에 너무 나약하게 처신해 왔다고 생각됩니다. 스님께서는 종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정치권력과 종교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나간 일은 새삼 말할 것이 없겠지요. 정치와 종교는 어떤 관계이어야 하는가 할 때,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해야 됩니다. 분리해야 될 뿐만 아니라 종교는 정치 이념의 산실産室이라고 봅니다. 정치 이념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종교는 정치의 정신적인 근본 공급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어 모든 정치 이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종교가 정치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서로 전도된 것이 되어서 국가적으로 큰 위험이 오게 되며 결국에는 파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는 불교가 근본이념이 되어 우리의 5천 년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의 황금탑을 세운 시기였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종교가 정치의 지도 이념이 되었을 때는 문화가 발달한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니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며, 분리되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종교는 정치의 지도 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크게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를 비롯하여 작게는 한 기업체를 이끄는 사장에 이르기까지 바람직한 지도자가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할 것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우선 사리사욕을 버려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고 하면, 그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에라도 자기의 명리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의 사리사욕을 완전히 떠나서 오직 그 단체를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단체도 살고, 그 국가도 살고, 그 민족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동시에 자기도 사는 것입니다.

만약에라도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취하면 그 단체는 부서지고 맙니다.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 아니라 자기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기업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기업을 기업주 개인의 재산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기업주가 개인 재산을 자꾸 축적하고 키우기 위해 기업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결코 올바른 경영주가 아닙니다. 기업이란 것은 종업원 전체를 위한 기업이지 사장 한 사람, 기업주 한 사람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업주만을 위한 기업이란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주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오직 기업인 전체, 노동하는 사람 전체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인 전체가 잘사는 동시에 그 기업도 자꾸자꾸 발전해 나아갈 것입니다. 기업이든 단체든 국가든 간에 지도자는 자기 개인만을 위한 지도자가 되지 말고 전체를 위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듯이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스님의 말씀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역사적으로도 환히 증명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알기로 큰스님께서는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몹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찾아온 기자들도 번번이 만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선문정로禪門正路』(주3)란 책을 출판해서 법공양 비매품으로 종단 안팎으로 널리 나누어주셨습니다. 책을 펴시게 된 동기라 할까, 스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의 이런 생각들이 기우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불교란 것이 그 근본은 깨달음에 있는 것이고, 그 깨달음은 선禪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 자체, 견성 자체에 대해서 그만 표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견성했으면’, ‘성불했으면’ 하고 참선하는 것인데, 누구나 불교 공부한다고 하고는 사흘만 지나면, 참선한다고 해 놓고 한 사흘도 못 되어 모두 다 견성해 버리고 성불해 버립니다. 근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불교계에 큰 혼란이 오고 있습니다. 아니 혼란이 와 있습니다. 남의 말 하기는 안됐습니다만, 미국에 가 있는 일본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불교를 포교하느냐 하면, 먼저 견성을 시켜놓고 참선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즉 ‘무無’자 화두를 가르쳐 주고서 ‘무’라고 말할 줄 알면 견성했다고 하여 ‘견성단’이라고 따로 푯말을 세워 둔 곳에 앉힙니다. 견성하기 위해 참선을 하는 것인데, 이미 견성을 해버리고 난 뒤에 참선을 하는 것이니, 그 사람이 무슨 공부를 해서 무슨 견성을 하겠습니까.

 

이래서는 불교의 생명이 완전히 파멸될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피해가 심해져, 결국에는 견성이 없어져 버리고 성불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끝에 앞으로 불교 장래를 위해서는 ‘표준’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은 어떻게 공부해서 어떻게 견성했는가, 어떤 말씀을 했는가, 그러한 법문들을 여러 곳에서 모으고 구체적인 실례를 들었습니다. ‘견성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견성에 대한 표준인 고불고조의 기본 사상을 소개해서, 앞으로 견성성불에 대해 혼란이 안 오고 파멸이 안 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런 책을 내봤습니다. 사실은 부끄럽습니다.”

 

*이번 『선문정로』의 출판을 통해서 우리나라 선문의 바른 길이 열렸으면 합니다. 기왕 그렇게 출판을 통해서 스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게 되면, 앞으로도 혹시 그런 법문 등을 출판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선문정로』는 옛 조사스님들의 기본 사상체계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보다도 옛 스님들의 참으로 밝은 법문들이 많아요. 고불고조의 공안公案에 대한 법문들인데,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가 산중의 방장으로 있으면서 예전 스님들의 그런 법문에 대해 법문을 해서 모아 둔 것이 있습니다. 이왕 불교를 위해 고불고조 정신을 바로 살려 불법을 바로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으니, 그것까지 합해져야 완전한 것이 되겠다 싶어요. 앞으로 그것도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나 인간이 이상과 현실의 단절에 부딪쳤을 때 좌절감을 만나게 됩니다. 개인의 처지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70년대 말에 걸었던 어떤 기대와 희망이 요즘에 와서 단절된 데에서 오는 좌절감이 큰 것 같습니다. 특히 꿈과 미래상을 설정하여 자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추구하려는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대학생 하면 학문하는 사람 아닙니까. 학문의 근본 목적은 인격양성에 있지 기술 습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대학의 실태를 보면 인격 양성보다도 기술 습득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아요. 이 기술 습득이란 말은 그 전제가 물질문명의 발달입니다. 지금의 대학은 앞으로의 직업 준비를 위한 곳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대학이 이런 인상을 주게 된 것은 그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물질이 위주가 되고 정신이 뒤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인격 완성이 근본이 되고 물질은 추종追從이 되는 것을 목표로, 대학은 인격을 완성하는 기본 도량이라는 생각이 바로 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학문을 하기가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문교 정책을 보면, 물론 근대화 과정을 통해 필요한 인력 수급 등과 관련해서 인격 형성 쪽보다는 기술 습득 쪽에 치중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근자에는 문제가 많이 일어나서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야 전인 교육이니 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도 스님께서 하신 말씀과 비슷한 뜻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의 사고나 행동 양식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리고 청년기의 인간 형성과 자아 확립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방금도 말했듯이 대학이란 학문을 하는 곳인데, 학문은 인격 완성이 위주가 되어야지 기술 습득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그 첫 번째 목표가 ‘어떤 직장, 어떤 직위, 얼마만한 봉급’으로 항상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문하는 자체의 근본이 없어집니다. 대학은 언제든지 인격 완성을 위한 대학이어야 합니다. 또한 학문을 위한 학생이어야지 직업을 위한 학생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밥부터 먹고 봐야 하지요. 그러나 밥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지 밥에 ‘먹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즘 보면 밥을 ‘먹는’ 사람은 드물고 대다수가 밥에 ‘먹히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그 근본을 보면, 인간 자신의 존엄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절대적 존재인데, 그 절대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물질의 주구走狗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의 신봉자가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해 버렸으니 물질과 부의 신봉자가 안 되려야 안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인격 완성이나 기술 습득보다도 그 이전에 인간의 근본 자세, 인간의 존엄성부터 복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해야겠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상대방의 가치부터 알고 보면, 나도 부처 너도 부처 다 부처입니다. 부처가 부처끼리 서로서로 존경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겠지요? 서로 존경 안 할 수 없고, 숭배 안 할 수 없고, 안 도우려야 안 도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직업의식이니 물질 위주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학문도 여기에서 그 방향을 세우고 모든 기술 습득도 여기에서 습득해야 합니다. 인간이 기술의 신봉자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자살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 죽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니 인간 자신의 존엄성부터 복구시켜 놓고 보면, 참으로 남을 존경하고 남을 돕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겠느냐고 봅니다.”

 

*얼마 전 불교교단은 일찍이 없었던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주4) 승단의 많은 인사들이 사회 정화의 차원에서 제재를 받은 일이 있어 한동안 낯을 들고 다니기가 민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도 종단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불국사나 월정사 등에서 물의가 일어난 것도 그 한 예가 아니겠습니까. 스님께서는 오늘의 우리 불교교단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불교에 대해 항상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소한 파동보다도 근본적으로 볼 때 우리 불교가 일반 사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낙후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을 면하려면 불교인의 자질 향상부터 시켜야 하며, 그것은 도제 교육이 가장 기본 조건입니다.

어느 단체든지 그 장래는 2세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불교계도 자질이 저하되는 것이 사실인데, 자꾸 낙후되다 보면 나중에는 탈락하고 맙니다. 존재하지 못하지요. 이대로 나가다가는 결국 탈락 현상이 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힘을 다하여 승려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남의 단체를 굳이 말할 것은 없지만, 예수교 같은 곳은 정규 대학이 32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지금 현재 대학이라고는 동국 대학교 하나밖에 없고 승가 대학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100점으로 도제 양성을 하는데 우리는 0점입니다. 불교 장래를 위해서 불교인 2세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한창 때 정진하시던 것과 요즈음 선원이나 강원에서 스님들이 처신하는 것을 견주어 보시면 생각이 많으실 줄 믿습니다. 어린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진실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젊을 때 한 것이 다 옳고 지금은 잘못한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그때의 특기와 장점이 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란 무엇이 목적이냐 하면, 결국 대법大法을 성취하여 일체를 위해 사는 인격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개인주의여서는 안 됩니다. 출가의 목적에서 볼 때, 참으로 큰 활동을 하기 위해 세속을 버리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는 세속을 버리고 사는 것 같지만, 근본 목적은 성불해서 중생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를 위해서 수행하고 자기를 위해서 견성한다면 그것은 외도外道입니다. 수행도 남을 위해서 하고 나중 생활도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자 종점인데 요즘 가만히 보면 세속적으로도 정신 방면이 소외되고 물질 본위로 치중되고 있듯이 우리 불교도 그런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흔히 공부하는 스님들이 와서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공부하는 데 5계를 한번 지켜보라고 하지요.

첫째, 잠을 적게 잔다. 세 시간 이상 더 자면 그건 수도인修道人이 아니지요. 

둘째, 말하지 말라. 말할 때는 화두가 없으니 좋은 말이든 궂은 말이든 남과 말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끼리는 싸움한 사람같이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든 말하지 말라. 

 

셋째, 문자를 보지 말라. 부처님 경經도 보지 말고 조사 어록도 보지 말고,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참선하여 자기를 복구시키면, 이 자아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해도 설명할 수 없고 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어떤 문장이나 부처님이라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아를 완전히 깨치려면 불법도 버려야 합니다. 불교를 앞세우면 그것이 또 장애가 됩니다. 참으로 깨끗한 자아에 비춰 보면 먼지요, 때다 그 말이지요. 오직 화두만 해야 합니다. 

 

넷째,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음식은 건강이 유지될 정도만 먹지, 과식하면 잠이 자꾸 오고 혼침해서 안 됩니다. 소식小食이 건강에도 좋고 장수비결입니다.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해제하면 모두들 제트기같이 달아나는데,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이 5계를 못 지킨다면, 그런 사람은 공부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 5계를 지키며 이렇게 10년을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수백 명에게도 더 일러주었는데, 그대로 지키는 사람 아직 못 봤어요. 아마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물론 숨어서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간절한 말씀입니다. 스님께서 공양하시는 것을 보면 밥 한 공기, 콩 조금, 김 몇 쪽, 양배추, 당근 약간, 이런 것이 전부인데 아주 담백하게 드십니다. 간은 전혀 안 드시는데, 그 까닭이라도 있으십니까?

 

“나 먹는 걸 보고 다들 ‘그렇게 드시고 됩니까?’ 하는데, 내가 지금 생활하는 것이 식사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출가해서 수도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내 본래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도를 하려면 먼저 가난부터 배워라, 생활하려면 의식주가 근본인데 나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부자 모습은 안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광목 옷, 여름에는 삼베 옷, 그걸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내 나이 70이니 얼마나 살지는 몰라도 입던 것 또 기워 입고, 몸만 가리면 되니까. 요즘은 삼베가 비싸다고들 하지만, 예전엔 삼베, 광목이 제일 검소하니 그걸 택한 것이지요. 그 다음은 먹는 문제인데, 사람이 안 먹으면 못 살지요. 그래도 음식에 먹히면 안 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 적게 먹고, 둘째 맛있는 것은 안 먹고, 간 없애 버리고, 깨소금, 고춧가루 그런 거 다 없이 맨 음식 그대로 먹은 지 수십 년 됐습니다. 

 

전에는 또 생식生食을 했었지요. 그때는 쌀가루하고 채소 한 가지로 한 10년 동안 했더니 나중에는 영양실조가 되고 이가 솟아올라 건강에 지장이 있었어요. 그래도 좋은 옷 안 입고, 좋은 음식 안 먹는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참으로 수도를 하려면 최저의 생활로 최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그런 생활방침입니다.

 

그리고 사는 곳도 화려하게 안삽니다. 조그만 암자나 토굴에서 산단 말입니다. 큰절에서 안사는 것도 조용한 데 있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그저 평생 토굴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백련암에 와 보고 신도들이 왜 단청을 안 하느냐고 묻지요. 

 

나는 단청한 집에는 안 살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노스님 한 분이 단청하면 집이 오래 간다고 하더군요. 좋은 말씀이지만 20년 갈 집이 한 10년밖에 안 간다 해도, 난 단청 안 하고 10년 가는 집에서 살겠어요. 단청해서 근본정신은 썩어 버리지 않느냐 말이여. 정신은 썩고 집만 살면 뭐 하겠습니까. 집은 썩더라도 ‘정신’이 살아야지. 그렇게 한번 정한 ‘최저의 생활에서 최고의 노력을 하자’는 선을 그어 놓고, 그 선 그은 것은 잘 변경하지 않습니다.”

 

*스님 연세가 올해 70이신데, 제가 뵙기에는 60세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건강관리를 위해 무슨 운동 같은 것 하시는지요?

 

“보기에는 그래 보여도 껍데기뿐이지요. 한 가지 다행한 것은 요즘 말하는 5대 질환이니 하는 그런 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피로를 느낄 뿐이지요. 특별히 건강 비결이나 무슨 운동 같은 거는 없지만, 하루 한 차례 등산하고, 실내 체조하고 건포마찰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쉬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속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안 되나, 이렇게 봅니다.”

 

*스님의 생활신조라고 할까, 좌우명 같은 것을 들려주십시오.

 

“내가 늘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습니다. 쇠말뚝을 박아 놓고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꽂혀 있습니다. 거기에 패牌가 하나 붙어 있어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영원한 진리’라고 하면 막연하지요. 내가 불교인이니 그것은 불교밖에 없는가 하고 혹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견문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더러 책도 읽어보았는데 불교가 가장 수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교를 그대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라도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이 옷을 벗겠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내 기본자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진리를 위해 산다는 이 근본 자세는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진리에 살려면 세속적인 일체 명리는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앞서면 진리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니, 그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승려가 될 때는 신조가 있는데 여하한 일이든지, 세간일이든지, 출세간일이든지, 절일이든지, 사회적인 문제든지, 일체 관여치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회의든지 참여 안 한다! 그래서 절의 모임이나 사회의 모임에 참석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본받아야 할 좋은 교훈입니다. 백련암 장경각에 있는 장서 수는 얼마나 됩니까?

 

“몇 권 되지는 않아요. 대개는 불교 중심이고, 장경 아닌 것도 있습니다. 장경은 질책帙冊이 많습니다. 팔리Pali어 대장경도 갖추고 있지요. 티베트장경은 없습니다. 책 수는 한 5-6천 권 될는지요. 희귀본으로는 세종대왕 때의 언해판이 있습니다.”

 

*스님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 서책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내가 여러 가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로 한 것은 선禪입니다. 내가 제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조사 스님들의 어록語錄은 『조주록趙州錄』과 『운문록雲門錄』입니다.”

 

*요새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입니다. 행원품이란 모든 존재의 실상 그대로 그 자체 모든 일체가 절대라는 것을 분명하고도 해박하게 설명해 놓은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일체가 부처이니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거룩한 길이 거기 있습니다. 『화엄경』 하면 불교의 근본인데, 이 『보현행원품』은 바로 그 『화엄경』의 엑기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불교 활동하는 데에도 『보현행원품』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십니까?

 

“인류 역사상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도 참으로 많지만, 내가 볼 때는 참으로 자아 회복을 하여 그 문제를 우리에게 소개한 분은 부처님이시고, 그 뒤에 와서는 육조 스님이 계시지요.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 사바가 본래 극락이라는 것, 정토라는 것, 현실이 그대로 절대라는 그 소신을 가장 해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분이 부처님과 육조 스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한 번은 죽습니다. 많은 생물 가운데서 유달리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모든 종교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스님의 생사관生死觀을 듣고 싶습니다.

 

“생사란 모를 때는 생사입니다. 눈을 감고 나면 캄캄하듯이. 하지만 알고 보면, 눈을 뜨면 광명입니다. 생사라 하지만 본래 생사란 없습니다. 생사 이대로가 열반이고, 이대로가 해탈입니다. 일체 만법이 해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윤회를 이야기하는데 윤회라는 것도 눈감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 눈을 뜨고 보면 자유만 있을 뿐이지 윤회는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몸을 받고 또 받고 하여 이어지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윤회라고 하는데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은 모두 자유다, 그 말입니다. 대자유! 눈을 뜨고 볼 때는. 그래서 생사가 곧 해탈이고 생사 이대로가 열반입니다. ‘생사 곧 해탈’이라고 하겠지요. 생사란 본래 없습니다. 현실을 바로만 보면,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입니다. 이 현실 그대로가!”

 

*가령 친족을 버리고 이 육신을 버릴 때 어떤 각오로 임해야 할까요. 더 쉬운 말씀으로 풀어 주십시오.

 

“혹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 생명 자체를 사람에 비유하면 이 육신은 옷이지요. 옷이 떨어져서 벗었다 하여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지요. 70, 80년이 되어서 옷이 다 떨어지면 딴 옷을 입게 됩니다. 옷을 아무리 바꿔 입는다 해도 사람은 본래 사람 그대로이니 옷을 따라갈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옷을 볼 필요도 없고, 옷이 떨어져서 아무리 바꿔 입는다 해도 하나 아까울 것 없고, 평생 입은 옷이니 옷이 오래되면 떨어지고 떨어지면 바꿔 입는 것은 정한 이치 아닙니까. 육신을 옷에 비하면 결국 영과 육을 구분해 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혹 생각할지 모르나, 알고 보면 옷도 또한 절대이니 분리할 것 없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옷을 갈아입는다 해도 자유한 생활, 해탈이라는 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이지.”

 

*스님께서 다음 생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으시다면 무엇인지요.

 

“사실 ‘다음 생’이란 본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옷을 가지고 그 한계성을 잡아서 옷이 다 떨어지고 새 옷을 갈아입을 그때를 이 다음 생이라 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 자체에서 볼 때는 옷 떨어졌다고 이 다음 생이라고 할 수 있나요. 본시 과거도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항상 그 사람은 그 사람일뿐이지요.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빈천한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노력을 해서 어떻게 하면 모든 상대, 무정물無情物까지도 부처님같이 받들고 부처님같이 모실 수 있나 하는 이것이 세세생생世世生生의 원이고, 또 그 이상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현재의 이 생활에 만족하시는지요.

 

“대궐 속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가려 하겠소.”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다가옵니다. 새해를 맞으며 이 풍진 세상 살아가는 데 길잡이가 될 시원한 법문을 들려주십시오.

 

“거듭 말하지만, 내가 볼 때는 전생도 없고 내생도 없고, 항상 금생뿐입니다. 새해라는 것도 달력을 만들어 놓고 그것 바뀌는 것일 뿐, 새해 구해 구별할 것 없이 중생이 본래 부처다, 우리가 본래 광명 속에 산다, 광명 속에 살뿐만 아니라 우리 자체 이대로가 광명입니다. 그런 좋은 광명을 눈감고 못 보며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둡다, 어둡다’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눈을 바로 떠라, 마음의 눈을 밝게 뜨자, 그리하여 일체 모든 상대세계가 절대 세계 아닌 곳이 없으니 미래겁이 다하도록 모든 부처님을 모시고 받들고 섬기자, 이 말만 하고 싶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우리 모든 존재가 광명 세계 속에 살고 또 자체가 광명인데, 이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 합니다. 그 본지풍광을 바로 보고 바로 알아서 모든 상대를 부처님으로, 부모로, 스승으로 모시고 섬기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극락세계를 딴 데 가서 구할 것 없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 아니냐 말입니다. 근본 요점은 어떻게 하든지 하루바삐 이 영원하고 무한한 절대 광명에서 마음의 눈을 뜨고 광명을 한시바삐 보자 이것입니다. 그러면 본시 마음의 병이 있는가? 이것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되는데, 본시 마음에는 병이 없습니다. 아까도 명경 이야기를 했지만, 본시 명경은 환하게 온 천지 모든 것을 다 비춥니다. 그런 거울에 먼지가 앉으면 아무것도 비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이라고 하니 무슨 마음을 새로 만들고 새 눈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본래 눈을 되찾자, 이것입니다. 거울의 먼지를 닦으면 본래 거울 그대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음 거울에 낀 때를 닦아내고 본마음을 찾을 수 있나?

 

제일 빠른 것은 참선을 해서 화두를 바로 깨치면, 그때는 거울에 있는 일체 때가 다 벗겨져 버립니다. 본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 광명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이 거울에 묻은 때는 욕심 때문에 묻어 있는 것이니까 욕심을 버리자 이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남을 돕는다는 말입니다. 자꾸 남을 돕는 생활을 하면 차차로 업이 녹아서 없어집니다. 욕심이 다 없어져 버리면 마음거울에 때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온 천지광명을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행복한 것은, 천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본시 천당에 살고 있고, 본시 극락에 살고 있고, 본시 해탈한 절대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나쁜 것인가, 흙덩이인가, 똥 덩어리인가 착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전체가 다 진금眞金입니다. 본시 순금인 줄만 알아도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만 알아도 얼마나 행복하냐 말입니다. 천하부귀를 다 누린다 해도 내가 본시 진금인 줄 아는 이 소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근본 가치는 본시 이대로가 절대라는 것, 광명이라는 것, 이것을 알았으니 욕심을 버리고 남을 돕자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해에는 더욱더 귀가 밝고 눈이 밝아져 찬란한 광명 속에서 본지풍광을 드러내며 날마다 좋은 날 이루기를 빌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 1982년 1월1일, 법정 스님과 대담·이은윤 기자 정리 |

 

 

주) 

(주1)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준말로 정토 경전에서 극락세계는 ‘서쪽으로 십만 억 국토 지난 곳에 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주2) 『六曹大師法寶壇經』 (T48, 352a), “東方人造罪, 念佛求生西方, 西方人造罪, 念佛求生何國?”

(주3) 1981년 도서출판 장경각에서 ‘성철스님 법어집 제2집 제2권’으로 간행한 책. 선문의 돈오법頓悟法을 바로 알리기 위해 60여 권의 경론과 선서禪書 등을 인용하여 19장으로 구성된 책이다. 1990년 내용을 보완하여 제3판을 발간하였으며, 2006년에는 『선문정로 -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는 제목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 책은 80년대 말부터 한국불교계에 돈점논쟁을 촉발시킨 저술이라는 점에서 불교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주4) 1980년 10월 27일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을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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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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