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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정조 편찬 지시 전국 사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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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31  /   조회3,40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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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사서史書 8. 『범우고梵宇攷』 ①

 

 

『범우고』(사진 1)는 1799(정조 3)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전국의 크고 작은 사찰의 통계기록이다. 고금古今의 문집과 팔도의 읍지邑誌 등을 고증하여 절의 존폐와 소재·연혁·유학자의 시문詩文도 수록하고 있다. 편찬 당시 존재했던 8도의 사찰 수뿐만 아니라 조선전기에 편찬된 종합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사찰 수도 수록하고 있어 불교가 탄압받고 있던 조선시대 사찰의 증가와 감소까지도 살필 수 있다. 더욱이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정종대왕어제 제문正宗大王御製題文」이 있어 정조의 불교인식이나 『범우고』의 편찬 배경도 엿볼 수 있어 주목할 만하다.

 

“불교가 중국에서부터 해동에 이른 지가 1천 7백여 년이 된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도구로 삼아, 300의 군현郡縣에 모두 부자(夫子, 공자)의 묘廟가 있어 멀거나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어서, 이단의 학學인 도교가 마침내 전해지지 않았고, 오직 승려들만 한갓 오래된 절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짜기의 우거진 숲속이나 큰 늪 가운데는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이기도 하며 못된 무리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여, 부서簿書가 이르지도 못하며 소송訴訟이 있지도 아니하고 병식兵食을 의뢰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비구대중比丘大衆으로 진정시켜 길이길이 큰 재난에서 보호받게 하니, 대체로 승려들이 참여하여 거기에 힘을 썼다. 이것이 『범우고』를 짓게 된 까닭이기도 하며, 또한 종산서원鐘山書院에 불교 서적을 두어 주자를 위해 게시해 두고 보았던 남은 뜻을 모방한 점이 있는 것이다.”

 

 

사진 1. 『범우고』 표지. 

 


 

『홍재전서』 권 56에 수록된 『범우고』의 ‘제문題文’이다. 정조는 불교에 우호적인 왕이 아니었다. 즉위 후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했고, 성리학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반면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당願堂을 철폐하였고,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엄중히 금지하기도 했다. 이단을 혁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아 교화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 불교 억압의 배경이었다.

 

정조는 『범우고』 제문에서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 되었지만,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여 도교는 자취를 감췄고, 불교는 승려들이 절만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이단이 쇠락했음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은 나라의 법령과 제도가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하여 소송할 수 있는 길도 없으며,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대와 군량미조차도 의뢰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스님들이 존립하여 최소한의 법령과 제도가 전해지고, 군대와 군량미를 마련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에 참여하여 나라를 재난에서 구해낸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가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참여한 무학 대사나 휴정·유정과 같은 호국 스님이라든가 왕실불교와 관련된 사찰에 대해서 각별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정조는 글의 첫 부분에서 “부서簿書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예악禮樂이 우선이고, 소송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교화가 실제가 되고, 병식兵食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풍속이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불교가 비록 이단이지만, 국가 운영의 기본이기도 한 예악과 교화, 풍속의 유지에 힘쓰는 바가 지대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이유가 『범우고』를 짓게 된 까닭이라고 하였으니 편찬 목적이 불교를 탄압하거나 승려에게 잡역雜役을 부과하거나 잡공雜貢의 수취를 위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즉위 초 보여주었던 불교배척의 입장과는 달리 재위 9년에는 당시 불교계에 고질적인 병폐였던 스님들이 부담해야 했던 산성수호 부담금이었던 ‘남북한산성 의승번전南北漢山城義僧番錢’을 반감半減시켜주었고 재위 12년 7월에는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의 청으로 대흥사 청허 휴정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즉위 16년 윤4월에는 석왕사에 ‘석왕釋王’이라는 사액을 내리기도 하였다.

 

“석왕사 토굴의 옛터에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조그마한 초상이 있는데, 승려들이 모두 말하기를 휴정과 유정은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모두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하였는데, 무학 대사는 곧 개국원훈開國元勳인데도 전적으로 봉향奉享하는 곳이 없으니, 돌아가면 임금께 아뢰어 조그마한 초상을 모사하여 토굴에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소원대로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인하여 명하기를, “사액하는 일은 밀양의 표충사와 해남의 대둔사의 전례에 따르고, 대사의 호 또한 두 절의 전례를 적용하여 액額은 석왕이라 하고 대사의 호는 ‘개종입교보조법안광제공덕익명흥운대법사開宗立敎普照法眼廣濟功德翊命興運大法師’라고 하라.”

 

『정조실록』에 수록된 내용이다. 정조는 사액을 내리기 전에 이미 석왕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14년에는 석왕사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했고 다음 해에는 직접 비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심은 동년 5월 “석왕사는 왕업王業이 일어난 곳이므로 다른 곳에 비해 소중하기가 각별하다.”고 한 그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다. 급기야 호조판서 서호수徐浩修의 청으로 사액을 내렸다. 대흥사에 ‘표충表忠’, 묘향산에 ‘수충酬忠’이라는 사액을 내린 일 역시 임진왜란 당시 청허 휴정과 승군의 전공戰功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밖에 정조는 이미 퇴락한 장안사長安寺를 중수하여 다시 스님들이 머물게 해주었다. 요컨대 정조가 석왕사에 비를 세우고 대흥사와 표충사에 사액을 내린 것은 이전 시기부터 불교와 스님들이 왕조의 개창과 위기상황에서 왕조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 결과였다.

 

“승도僧徒가 시들고 쇠잔해진 것도 또한 유념을 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다. 불의의 변고에 공을 바치고 무사할 때에 힘을 얻게 되니, 의승義僧에게 복무를 면제해 주고 절간의 승려에게 세금을 덜어주는 것은 대체로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근래에 들으니 영읍營邑의 가렴주구에 시달리어 이름난 암자와 거대한 사찰이 텅 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환난을 염려하는 방도로 볼 때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만일 수령을 만나거든 면전에서 거듭 

신칙하여 소생되고 개혁되는 효과가 있도록 하라.”

 

정조가 지방의 동향파악을 위해 파견한 안핵어사按.御史 이곤수李崑秀에게 내린 글이다. 정조가 남북한산성 의승義僧에게 번전番錢을 반감시켜준 것은 스님들이 “(승려들이) 불의의 변고에 공을 바치고, 무사할 때에 힘을 얻게 된다.”는 국가·사회적 기여의 대가였던 것이다. 이밖에 즉위 12년에는 궁납宮納과 잡비雜費의 폐단에 시달리고 있었던 건봉사의 부담을 면제해주고 궁납의 폐단이 없어졌지만, 관납官納의 폐단이 생긴다면 각 관아는 보고하라고 명한 것이나 즉위 15년에 남한산성에 들어가 사는 승려 중 30년이 지난 자에게 진급시켜 주는 규정을 만들게 하고, 스님들이 부여 등 4 고을의 절에서 말린 감을 진상하는 것을 면제해 준 사실들은 그것을 스님들을 백성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조의 『범우고』 편찬의 배경 가운데 한 가지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탄압받고 있었던 스님들을 백성으로 인식하여 그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혹독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여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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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한국근대불교사론』, 『석전영호대종사』(공저), 『신흥사』(공저)등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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