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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 이끼 짙게 낀 부도 생생한 수행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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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1:22  /   조회6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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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1

남원 지리산 실상사 


實相本無相 向有亦今有

 

지리산을 감돌아 전라북도 남원南原으로 접어들어 산내면 입석리로 가면 신라시대 창건된 실상사實相寺를 만난다. 한동안 비가 내리다 그치고 지리산智異山의 산허리를 감싸고 있던 구름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 저 너머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는 풍광 속에 빠져있으면 평지에 있는 절에 있어도 속세에서 멀리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통일신라시대 홍척(洪陟 ?-? 또는 洪直) 화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해서 흥덕왕興德王(826-836) 3년인 828년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며 창건한 세운 절이 실상사이다. 원래는 그 이름이 지실사知實寺였는데 고려 초기 실상사로 바뀌었다. 그는 헌덕왕憲德王(809-826) 때 당나라에 가 중국의 남종 혜능慧能(638-713) 선사의 법맥을 계승한 마조 도일馬祖道一(709-788) 선사의 고제자였던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선사로부터 마조선馬祖禪, 즉 홍주종洪州宗의 선법을 익히고 그 법통을 받아 826년에 귀국하여 남악인 지리산으로 내려와 실상사에 주석하며 전법傳法하였다. 

 

 

사진 1. 홍척 대사 탑비.

 

 봉암사 동암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정광淨光 화상에 의하면, 남종선의 해동海東 전래시기의 선후에 있어서는 도의 화상이 홍척 화상보다 먼저 당나라로 들어가 공부하고 홍척 화상보다 5년 먼저 신라에 들어와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지장 선사에게서 체득한 심인법心印法을 설하였는데 이를 듣고자 모여든 사람이 산에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가지산문迦智山門이 실상산문보다 먼저 형성되었으니 남종선의 전래 선후는 도의 화상이 홍척 화상에 앞선다. 그런데 홍척 화상이 어떤 선법을 설하였는지는 이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사진 2. 수철 화상 부도탑.

  

당시 많은 유학승들이 당나라에 가서 조사들 문하에서 몇 년간 유학하고 오면 이미 ‘깨달음’을 얻고 법을 얻은 것인지 의문이 들고, 또 그때 말하는 ‘깨달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하게 밝혀놓은 바가 없다. 당시 교법과 선법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자신이 배운 선사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들어와 그런 내용을 신라에 전파한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의 깨달음’을 터득한 것인지 등에 관해 상세하게 전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깨달은 사람에게서 깨달은 사람에게 구전으로 비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을 텐 데 아쉽게도 이에 관해서는 분명한 것이 없다. 

 

교학을 중시하는 법상종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도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불교사에서 논란이 있는 ‘구산선문’은 그 명칭이 신라 말기에 정해져 불린 것은 아니고 고려시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도 개산조開山祖의 교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자 대에 와서 해당 문파의 성쇠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스승만 있는 상태로 있다가 제자 대에 내려와 개산조의 산문을 중흥시켜 선문을 형성하며 실상, 동리桐裏, 사굴.., 성주聖住, 희양曦陽, 수미須彌의 이름을 붙인 6산문과 제자 대에 와서 비로소 새로 산문을 형성한 가지, 봉림鳳林, 사자獅子의 3산문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정광 화상이 정리한 내용이다.

 


 사진 3. 천왕문.

 

아무튼 흥덕왕은 홍척 대사의 감화를 받아 당시 상대등上大等이던 그의 아우 선강宣康 태자太子 김충공金忠恭(?-835)과 함께 이 절에 귀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승려이외에 홍척의 법을 이은 사람으로 흥덕왕과 선강 태자가 이야기되기도 한다. 선강 태자는 흥덕왕 시절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바다에 빠져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흥덕왕은 친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13세에 즉위한 애장왕哀莊王(800-809)을 죽이고 형이 먼저 헌덕왕憲德王(875-886)으로 재위하고 그 후사가 없자 형을 이어 왕이 되었다. 사실 애장왕은 어렸지만 흔들리는 신라왕실의 현실을 인식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당시 귀족들이 방만하게 사찰을 건립하고 비단과 금으로 치장을 하고 기물을 헌정하는 행위를 강력히 통제하였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러한 조치들에 대하여 반발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재위 기간 중인 802년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화상에 의해 해인사海印寺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인사는 왕실에서 경영하였다.

 


 사진 4. 보광전.

 

흥덕왕은 즉위한지 두 달 만에 장화章和 부인夫人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이하고 그 후에도 평생 후비를 두지 않는 삶을 살았다. 삶과 죽음의 허망함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청해진淸海鎭을 지키게 한 것이라든지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 지리산에 심었던 일도 흥덕왕 시대에 있었다. 물론 차나무는 그 이전에도 신라에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유언에 따라 장화 부인과 같이 합장되었고, 후사가 없이 죽자 사촌동생인 상대등 김균정金均貞(?-836)과 그의 조카이자 원성왕元聖王(785-798)의 아들인 김제륭金悌隆이 왕위를 두고 궁궐에서 격전을 벌인 결과 김균정이 살해되고 김균정과 그의 아들 김우징金祐徵(?-839)을 타도한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836-838)이 되었다. 아들 없는 흥덕왕에게는 동생이 있어 그가 선강 태자로 되었지만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흥덕왕이 죽은 다음에는 그 후계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 5. 계단이 남아 있는 국내 유일 석등.

 

아무튼 희강왕도 왕위쟁탈전에서 패를 갈라 싸운 끝에 삼촌을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그를 옹립한 세력들이 다시 자신의 측근들을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왕위를 포기하고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희강왕이 자살한 다음에 왕위에 오른 이가 민애왕閔哀王(817-839)인데, 선강 태자의 아들이다. 민애왕도 즉위하자 마자 장보고 세력에 의지한 김우징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다가 결국 살해되었고, 김우징이 바로 즉위한 후 4개월 만에 죽게 되는 신무왕神武王 (839-839)이다.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신라는 하대로 오면서 이렇게 왕위쟁탈전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사진 6. 보광전 건칠 보살입상. 

  

이 시기에는 이미 신라의 왕실은 중심을 잃었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떨어진 각 지방에서 중심세력들이 힘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중앙권력의 와해와 지방 호족세력들의 난립으로 통일신라는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교종 중심의 불교와 각 지방의 호족들과 결탁한 선종 중심의 불교로 나타나고, 특히 각 지방에서 새로운 불교가 선종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속으로 전파되어 갔다. 이들은 각자 자기들만의 특색을 강조하는 사찰을 중심으로 자기의 법맥을 강조하면서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수백에서 천명을 넘는 승려들이 각자의 산문을 열어 활동하였다. 이는 중국에서도 선종이 분화를 하고 각자 자기들의 파를 형성하고 집단화하면서 자기들만의 특색을 강조하고 법맥상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이러한 법맥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서로 경쟁하다보니 속세의 족보와 같이 법맥상의 족보를 만들었고, 이런 가운데 계보도를 창작하여 끼워 맞추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없는 족보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홍척 대사가 머문 실상사는 왕실의 관심을 받은 절이라 이후 선종이 크게 일어나면서 실상산파를 이룰 정도로 세력이 번창하였다(사진 1). 홍척 대사를 이은 수철秀澈(817-893) 화상에 와서 선문인 실상산문을 형성하게 이르렀고, 3대 편운片雲 화상을 거치며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본격적으로 떨치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9647-653)때 법랑法郞(?-?)이 당나라로 가서 4조 도신道信(580-651)의 법을 도입해오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북종선이 전해지고 당나라와 같이 북종선이 강한 시기가 있었지만 서당 지장 선사에게서 공부한 도당유학승인 도의, 홍척, 혜철惠哲(785-861) 화상 등이 중국에서 돌아와 각 지방에 선문을 열고 남종선을 전파하면서 선종은 점차 남종선으로 통일이 되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교종은 있었다.

 


 사진 7. 실상사 동종.

  

홍척 선사의 제자로는 스승의 법을 이어 실상산문을 형성한 수철 화상과 3조 편운 화상 그리고 음광飮光 화상 등이 있었다(사진 2). 실상사에서 3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조계암터 부근에 있는 뚜껑이 덮힌 향완香. 모양의 편운 화상 부도탑에는 정개正開 10년에 건립한 것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 정개라는 연호는 후백제 견훤이 사용한 연호이며 이로서 건립연대가 910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모아 신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때였음을 고려하면 이런 기록은 견훤이 편운 화상의 부도를 건립하여 주면서 실상산파를 자기 세력권내로 포섭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렇다면 전후 사정으로 보건대, 수철 화상의 세력이 신라의 왕실 편에 섰던 반면 편운 화상의 세력은 견훤의 편에 섰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음광 화상은 수철 화상 비碑를 세울 때 비석에 글자를 새긴 사람이다. 절에서 비를 세울 때 스님들이 글자를 새기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후대에 불경 목판을 새길 때에도 스님들이 글자를 새긴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의 문집을 간행할 때 절에서 한지를 만들거나 목판을 새기는 일이 흔하였다. 목판 한 장을 제작하는 비용이 오늘날 가격으로 4백만원 정도였으니 절의 재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사진 8. 실상사 보광전과 쌍탑.

  

번창하던 실상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8년 세조世祖(1455-1468) 14년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여 년 동안 폐사가 된 채로 거의 방치되었고, 승려들은 중국의 백장 회해百丈 懷海(749-814) 조사의 이름을 딴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겨우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왔다. 백장암도 원래는 백장사로 그에 딸린 당우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실상사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숙종肅宗(1674-1720) 때에 와서 전각들이 다수 세워지고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도 지었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에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이 절터를 빼앗으려고 절에 불을 질러 절이 소실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불상에 보물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나 도굴꾼들이 드나들며 유물을 많이 훼손하였다. 유물을 훔쳐간 인간들도 나쁜 인간들이지만 돈을 주고 이런 불교문화재를 사들이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엇을 없애야 이런 일이 사라질지 생각해볼 일이다. 근래 조계종은 각 사찰의 재물을 조사하고 목록을 작성해 통일적인 관리와 감찰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실상사에 있는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수백 권의 사경寫經과 인경印經 그리고 고려판高麗板 『화엄경소華嚴經疏』 등 희귀한 문적도 있었는데, 일부는 도난당하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아무튼 실상사는 역사로 보면 신라고찰이지만 목조 건물들은 화재로 소실되는 일을 다반사로 겪어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시대에 다시 지었거나 근래에 지은 것들이다. 

 

 

사진 9. 극락전 건칠 아미타불좌상.

 

 

실상사는 지리산 중턱에 있는 산지 사찰이지만 요즘은 자동차도로가 주위를 지나고 상가나 집들도 많이 세워지면서 산지 사찰의 원래의 멋은 사라져가고 있고 주차장과 사역이 같은 평지에 있어 마치 평지에 있는 사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쳐진 절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먼저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이 천왕문의 편액은 교육자이자 서예가인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1924-2008) 선생이 편액을 썼다(사진 3). 천왕문을 지나 바로 앞으로 보이는 영역에는 동서 양옆으로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뒤로 석등이 서있으며, 그 석등 뒤에는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1금당 쌍탑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이다(사진 4). 보광전 앞에 있는 석등은 계단이 남아 있는 석등으로 국내 유일하다(사진 5). 

 

1884년 원래의 웅장한 금당 터 기단위에 기단을 다시 만들고 자그마하게 지은 보광전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 보살을 건칠乾漆로 조성한 입상이 서 있고(사진 6), 1694년(숙종 20)에 만든 동종이 있다(사진 7).  

보광전 앞 마당에 서 있는 동서의 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데, 불국사의 석가탑에 상륜부가 없어져 복원할 때 이 탑의 상륜부를 본떠 복원하기도 하였다(사진 8). 진전사의 삼층석탑에는 상륜부가 없지만 사면의 부조가 있어 여기의 삼층석탑보다 아름답다. 

 

 사진 10. 약사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극락전極樂殿은 1832년에 의암 화상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부도전에서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홍척 대사의 부도가 있어 부도전이 아닌가 하는데, 어쨌든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사진 9).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2.69미터에 이르는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수철 화상이 4,000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것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철불이며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빼어난 작품이다(사진 10). 통일신라시대 말에는 여러 선종 사찰에서 철을 녹여 불상을 많이 주조하였는데, 이 철조여래좌상은 이런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사진 11). 

 

실상사는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백장암의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하여,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보물 제33호),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의 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 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 삼층석탑(보

물 제37호) 2기가 있다. 홍척 대사의 부도탑과 비를 말하는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의 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의 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보물 제420호), 실상사 약수암목조탱화實相寺藥水庵木彫幀畵(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사진 11. 철조여래좌상.

 

 

증각대사탑證覺大師塔은 홍척洪陟 대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이는 극락전을 바라보고 왼쪽에 서있으며, 그의 제자인 수철 화상의 승탑은 그 반대편인 오른쪽에 서 있다. 홍척 화상의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 원당형圓堂形의 모습이다. 8각 2단의 아래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는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보살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몸돌은 단면이 8각으로 모서리마다 기둥이 있고, 앞뒷면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으며, 문비의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아름답고 고졸한 맛이 역사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이 승탑은 홍척 대사가 입적한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사진 12). 실상사에는 담장 밖에 있는 편운 화상탑을 비롯하여 곳곳에 승탑이 많은데, 이는 실상사의 비중과 찬란했던 시기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수철 화상에 대해서는 역사 문헌이나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실상사에 서 있는 수철 화상 탑비에 의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수철 화상은 815년 진골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연허緣虛 율사에게 출가하고 실상사의 증각證覺 대사, 즉 홍척 대사 아래서 공부했다. 수철 화상은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는 경문왕景文王 (861-874) 때 왕의 부름을 받아 왕경에 가 왕으로부터 교와 선의 차이에 대해 물음을 받고 설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헌강왕과 서신도 주고받았으며, 진성 여왕의 청에 따라 다시 왕경을 방문하였고, 단의장端儀長 옹주翁主의 청에 따라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여러 곳의 사찰로 옮겨 다녔으며 양주의 영원사瑩原寺에 주석하다가 제자인 수인粹忍, 의광義光, 음광 등 문도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돌아와 893년에 입적하였다. 진성 여왕은 시호를 ‘수철’, 탑호를 ‘능가보월楞伽寶月’로 내렸다. 

 

 사진 12. 홍척 대사 부도탑.

 

 

수철 화상 비는 905년에 세워진 것으로 신라시대 대부분의 비석이 거북 모양의 귀부를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것은 사각모양의 받침대, 즉 방부方趺를 만들어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의 제액題額에는 ‘능가보월탑기楞伽寶月塔記’라고 써져 있다. 이 비는 원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1586년 남원에 사는 양대박梁大樸(1543-1592) 선생이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보았을 때는 비의 일부가 깨진 채로 길거리에 넘어져 있었다고 한다. 1690년 이 절을 중창하고 1714년에 이 비를 다시 세울 때 절의 승려들이 깨진 비석이 바로 서지 않으니까 파손된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된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로 세우기 위하여 파손된 부분을 더 깨어내고 편편하게 만들어 받침대 위에 세웠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가로 세로의 균형이 맞지 않는 이상한 모습이 되었고, 내용도 일부 멸실되어 버렸다(사진 13).

 

이 비문은 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었는데, 1919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리며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이 비문의 해석과 번역을 놓고 없어진 부분을 추론 보완하거나 있는 그대로를 번역하거나 하는 등 전문가들의 노력이 이어져왔다. 이 비문을 누가 짓고 썼느냐에 대해 그간에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최치원의 글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한 최영성 교수는, 이 비문은 신라 효공왕 8년인 904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고, 이 비문을 지은 사람은 최치원이 아니고,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합격하고 귀국 후 수금성군守錦城郡 태수太守를 지내는 등 활약하며 왕명으로 장흥의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명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銘」과 제천의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명月光寺圓郞禪師大寶禪光塔碑銘」을 지은 김영金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사진 14). 

 


 사진 13. 수철 화상 비 앞면. 

 

 

실상사는 장엄한 지리산 자락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절 곳곳에 이끼 낀 고승들의 부도탑들이 있어 사역寺域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수행자들이 살다가 간 공간임을 강하게 느낀다. 그들이 터득한 깨달음은 과연 무엇일까?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을 깨달은 것인가? 인간의 문제는 인간에게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이를 해결하는 길도 인간에게서 찾아야 하며, 그것은 모든 것이 공한 것임을 깨우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 만물이 공한 것임을 깨우치면 욕망도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지면 고통이나 두려움도 없어지고 싸움도 하지 않고 겸허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온 생명체가 함께 평화롭고 자유로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이를 실천하여 보임으로써 그 진리를 증명한 것인가?

 

그런데 왜 불교를 수용한 인간들은 여전히 권력투쟁을 하고 죽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했으며 권력을 쥔 자들은 백성들을 죽이고 쥐어짜며 그들의 호의호식을 추구하였는가? 그때 구도의 길을 간다고 한 수행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으며 무슨 영향을 끼쳤는가? 화엄세계니 대동大同 사회니 하는 것은 과연 유토피아를 제시한 것인가? 이것이 유토피아라면 한편에서는 인간을 교화하고 희망을 가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의 모순과 악과 불의를 은폐시키고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눈가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예나 지금이나 가시지를 않는다. 

 


 사진 14. 수철 화상 비 뒷면. 

 

불교가 타력신앙이 아니라 자력신앙인 점에서는 종교로서 탁월한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제멋대로 ‘불교가 이런 것’이라고 각자 떠드는 바람에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봉암사 태고선원장을 지내신 정광 화상의 아래와 같은 말이 눈과 귀에 들어온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이 불립문자不立文子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맹신하여 전적典籍을 무조건 문외門外한다. 그러나 옛 선지식들은 반드시 경론經論을 수학하고 율장律藏을 익힌 후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지취旨趣들을 읽고 배웠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 제자로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봉행하지 않고, 조사의 가풍을 금과옥조로 여기지만 어록語錄 읽는 이가 드물다. 병이 골수에 들어도 자각하지 못하니 이것이 오늘의 선가풍토禪家風土다.” 

 

부처님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보여준 바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알아야 길을 나서는 발걸음을 재대로 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못하면, 방이 비어가고 레스토랑으로 팔리거나 숙박시설로 전용되는 서구의 수도원의 모습이, 우리나라에도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바이블』 주석서가 늘어나고 성직자들의 대중적 잡문들이 때로 시중市中의 종이 값을 올리는 일이 더러 생겨나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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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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