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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인과 사랑에는 무아의 정신 결여 단순히 ‘현재’에 안주하는 종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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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1:46  /   조회3,2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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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9

인순印順 1906-2005② 

 

 

인순印順(1906-2005)은 다른 존재와 달리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를 언급하였다. 첫째, 인간은 기억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체법을 분별 사유하여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인식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의식이 쉬지 않고 되돌아보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특별히 발달한 것과 인간의 풍부한 기억력, 사색력 등은 모두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확실히 모든 동물과 천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인간의 특색이라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인순스님

 

 

 

‘인간 불교’의 기본 구도

 

둘째, 인간은 범행梵行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아함경』에는 “세간에는 참懺·괴愧라는 두 법이 있어 여섯 부류의 가축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나온다. 인간은 부자, 사제, 부부, 친우 등이 있음을 안다. 이 참괴심이 있어야 비로소 마땅한 인륜 관계를 세울 수 있다. 어지럽고 인륜에 어긋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참괴심이 없어서라고 보았다. 참·괴의 도덕적 발전은 주변 모든 중생을 이상 대상으로 보는 데까지 도달한다. 이는 유학에서 가정을 본위로 한 윤리 범위에 제한되는 것과 같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셋째, 인간은 용맹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인간은 내심의 바람에 따라 굳은 실천적 의지를 이끌어내서 정신으로 행동할 때 아무리 어려운 일이 눈앞에 있어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간다. 이 강건하고 용맹한 의지력이 인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성불’을 목표로 한다. “불성은 붓다의 성덕性德이니, 인류의 특성 중에서 이끌어내어서 부처로 향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은 나무속에 불의 성질이 있다는 것과 같아서, 나무 중에 불빛과 열이 있어 그것을 끌어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미혹하고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미혹한 정식情識을 근본으로 하므로, 보살성·불성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결국 철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인순은 “인류가 부처를 배우는 것은 단지 인간의 입장에 의거하는 일이다. 인간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인간의 바른 행위에 장애를 주지 않으면 불성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성의 완성은 무조건적인 신앙에 의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무념무상의 자기 투기에 의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자기 속의 인성·불성을 신뢰하고 인간에 의지하여 여법한 수행을 해나가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앞의 세 특성을 가지고 있어 기억이 뛰어나고, 범행이 뛰어나며, 용맹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지혜의 힘[智=大智], 덕의 행위[仁大=悲], 용맹함[勇=大用]이 있으니, 이러한 인성에 의지하면 그 결과로 불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불성을 완성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순이 창도한 ‘인간 불교’의 기본 구도이다.

 

일반적 도덕 대對 불교화 된 도덕 

 

인순은 불교에 일반적인 도덕과 상통하는 요소 외에 불교만의 특색 있는 도덕이 있다고 보았다. 인류가 공존하려면 도덕이 중요한 요소가 되므로,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일반적인 도덕부터 실천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순은 ‘자비를 가지고 살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도덕이라고 단언하였다. 불교에 따르면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 자애이고, ‘고통을 애주는 것’이 자비이다. 이러한 자비는 일반적으로 ‘인자仁慈’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순 역시 “도덕의 기초는 인자仁慈이니, 이는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과 ‘고통을 없애는 것’이다.”고 확언하였다. 그는 이러한 불교의 ‘자비’가 유학의 ‘인仁’, 노자의 ‘자애’, 묵자의 ‘겸애兼愛’, 서양 기독교의 ‘사랑’과 같다고 보았다. 이것은 유학과 불교의 도덕을 일치시키고, 동양과 서양 종교의 도덕적 핵심을 하나로 보는 시선이다. 결국 인순이 보기에는 자비, 인자, 인애가 모든 종교와 사상의 도덕적 핵심인 것이다. 이는 곧바로 인간 불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인순은 불교의 자애慈愛가 도덕적 근본으로 일반적인 도덕률에 해당하며, 유학의 인仁과도 일치한다고 보았다. 인仁·자慈·애愛가 일반 도덕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 “자기가 서고자 하면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다른 사람을 도달하게 하는 것”은 유학의 인仁에 대한 해석이지만, 인순에게 그것은 불교의 자비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개념인 것이다. 또한 그는 도덕의 근본인 자비는 결코 ‘변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사진 1. 곽붕郭朋 지음, 『인순불학사상연구印順佛學思想硏究』, 북경: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1.

 

 

반면에 인순은 “이러한 자비는 유학의 인, 기독교의 사랑과 가까운 듯 보이나 여기에는 무아無我의 자비가 없으니, 실제로는 아주 다르다.”고 단언하였다. 불교에서 도덕의 근본이 되는 자비가 유학의 인이나 기독교의 사랑과는 다른 이유는 그들 사상에는 불교가 가진 ‘무아’라는 중요한 핵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교화된 도덕은 반야般若 위에 세워져 있다. 즉 무아無我 지혜의 반석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나를 깨뜨리고 집착을 없애는 것이 이 지혜가 포섭하고 이끌어낸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착상은 일체 중생의 입장에서 일체를 보는 것이다. 일체법이 무아임을 깨닫게 되면, 참된 자비가 내심에서 살아 뛰놀며 개인적인 정과 애욕은 바로 단절된다.” 인순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일체 중생의 입장에서 일체를 보는 관점이다. 무아의 지혜에 근본을 둘 때, 참된 자비가 내심에서 살아 뛰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자비가 유학의 인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이고, 인순이 불교도이자 ‘인간 불교’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반 도덕은 그 외의 것과 상통한다. 오직 반야般若에서 유출된 무루無漏의 덕행이야말로 불교와 다른 종교의 공통되지 않은 도덕이다. 도덕과 진리의 지혜가 혼용混融하여 불교화 된 도덕의 특색을 형성한다.”고 단언하였다.

 

인간학으로의 종교관

 

기본적으로 인순은 “나는 불교도이다. 나의 종교관은 불교의 견지로 종교를 보고 종교의 가치를 보며 종교의 깊이를 보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인류 의욕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각 종교는 그 신앙과 형식이 다르며 신과 인간의 관계로 파악하지만, 인순은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였다. 종교는 서양에서 보듯 신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인순의 주장은 바로 그의 ‘인간 불교’적 시각에 바탕 한 것이다. 이것은 서양신학에서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입장을 천명한 불트만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표현, 구체적으로 인간의 자기 의욕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통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거의 혁명적인 관점의 전환이다. “신은 인류 자신의 객관화이다.”는 그의 말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류 자신의 의욕이 환경 중에 표현된 것이다. 불평등하지만 평등을 구하고, 부자유스럽지만 자유를 희망하며, 항상恒常 되지 않지만 영원히 항상恒常 되기를 희구한다.” 인순은 종교란 결국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럽고 항상 되지 못하게 불안정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평등과 자유와 ‘항상됨’을 지향하는 의욕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역할과 가치 역시 불평등 속에서 평등을 지향하고,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바라며, 항상恒常되지 못한 불안정 속에서 항상恒常된 안정을 지향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종교가 이를 지향하지 않고 내세나 천당이라는 명목으로 현실의 불평등과 부자유, 불안정을 묵인한다면, 이것은 종교의 역할을 방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산속 깊이 들어가 ‘현실을 나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현실 속에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부조리를 함께 겪으며 인간의 바람, 의욕을 표현하고 지향해가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된다. 인순이 ‘산중의 전통 불교’가 아니라 ‘인간 불교’를 지향하게 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역할-‘자기 강화’와 ‘자기 정화’

 

인순은 종교의 가치를 두 가지 측면으로 보았다. 첫째는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를 정화하는 것이다. 자신을 강화하는 것 외에 자기의 정화, 자기 극복의 다른 측면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믿으면 자기 마음이 편안하게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아도취에 불과하고, 심지어 악의惡意로 보자면 종교를 아편으로 삼은 것이다.” 종교가 아편이라면 이것은 종교가 하나의 범죄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인순은 ‘현실 감각과 현실 변혁에의 의지가 없이 그저 현재에 안주하게 하고 자기를 강화하는 것에 그치는 종교’를 승인하지 않았다. 자기 정화라는 측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순의 이러한 종교관, ‘인간 불교’가 대만 불교에서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가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종교의 역할을 ‘자기 강화’와 ‘자기 정화’로 본 것은 인순의 인간불교가 갖는 근대성을 반영한다. 일반적인 종교의 역할이 ‘자기 정화’에 한정되고 있는 반면에 인순은 자기 정화와 함께 ‘자기 강화’를 말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를 ‘자아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종교가 추구하는 것 중에 ‘평등’과 ‘자유’가 포함되고, 이는 전통 불교에서 영원, 복락, 지혜, 자비만을 구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전통 불교의 역할은 자기 강화라기보다는 일반적 의미의 자기 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반면에, 인순의 인간 불교는 자기 강화적인 측면이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민권론적民權論的 시각의 반영이다. 인순은 이러한 자아 종교에 불교는 물론 기독교, 회교, 인도의 베단타교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 역시 기존 종교의 테두리에 제한되지 않고 종교의 핵심을 ‘인간’ 자신에게 두고 파악하는 그의 열린 시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경미 작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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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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