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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모든 중생에게는 여래의 덕상德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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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10:50  /   조회5,4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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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깨치라고 하는가? 자성自性을 깨치라고 하는데,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자성을 깨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일체 만법의 근본인 자성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각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의 덕상이 있건마는 분별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菩提樹下에 初成正覺하고 歎曰하사대 奇哉奇哉라 一切衆生이 皆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妄想而不證得이로다.(주1)

 

부처님의 이 말씀은 불교의 시작이면서 끝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많이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처럼 명백하게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도사상에 범아일여凡我一如(주2)라고 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다릅니다.

 

이 선언의 의미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스스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만 발휘되면 모두가 스스로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부처가 따로 있고 절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우주에 있는 인간의 능력을 부처님이 처음 소개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법의 역사가 시작된 사르나트 초전법륜지[鹿野園]에 있는 다메크스투파의 모습.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해는 언제든지 맑은 하늘에 떠 있지만 구름이 앞을 가리면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우리의 지혜덕상智慧德相도 항상 밝아서 시방세계를 비추고 있지만 분별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같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발견이라고 모두 탄복하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어야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광이 없다면 아무리 땅을 파도 금이 나오질 않습니다.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일을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금광맥이 없는 곳을 파듯, 헛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중생에게 무진장한 대광맥이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계발하고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문자 없는 경

 

여기에 대해서 제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사람이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보다 훨훨 날아다니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망상과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그런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리에 왔다 갔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영원하고 자유로운 것을 늘 모색하다 보니 이런저런 책, 특히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책을 광범위하게 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영원하고 자유로운 길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용운(주3) 스님이 저술한 『채근담 강의菜根譚講義』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는데 

종이나 먹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다.

펼치면 한 글자도 없는데

항상 큰 광명을 놓는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라.(주4)

 

 

이 글을 보니 무척 호기심이 났습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종이에 그려 놓은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라 진정 내 마음 가운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하는 그런 경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글자 하나 없는 이 경을 읽을 수 있을까?” 하고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 뒤에 항상 큰 광명을 놓는 경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찾아본다고 참선을 익히면서 스님이 된 지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만, 그저 허송세월만 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의 덕상을 가졌다는 이 글자 없는 경, 말하자면 자아경自我經, 곧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을 분명히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어와 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마디 할까 합니다.

 

언어 문자에 대한 비판

 

어떤 사람이 왕궁에서 일을 하는데, 임금이 늘 책을 보고 있어서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대왕이시여, 무엇을 보십니까?”

“이전의 현인들과 달사達士와 철인哲人들이 저술해 놓은 좋은 책이다.”

“그 현인과 철인들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

“아니다. 다 돌아가셨다.”

“죽고 없으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대왕이시여! 술을 마시려면 술을 먹어야지 술찌꺼기는 소용없습니다.”(주5)

 

언어와 문자는 옛사람[古人]의 술찌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술은 벌써 다 걸러 마셨는데 술찌꺼기는 뭐 하러 씹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임금은 이 말에 자기의 마음을 돌려서 문자란 것이 실제로 고인의 술찌꺼기이지 그 현묘玄妙함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언변이 좋고 문장이 좋아도 근본 기술은 절대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 자식에게도 못 전합니다. 오직 심득心得, 즉 마음으로 얻어야 합니다. 자기가 깨우쳐서 마음으로 얻어야지 언변으로도 전하지 못하고 문자로도 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주6) 이렇듯 불교에서만 언어와 문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교外敎에서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대개 언어와 문자의 폐단을 지적해서 배격합니다.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워진다.

廣學多智하면 神識이 轉暗이라.(주7)

 

이것은 달마스님 말씀으로 전해 오는 『혈맥론血脈論』에 있는 내용입니다.

망상을 더는 것에 대해서 흔히 비유로 드는 명경明鏡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명경은 늘 밝은데, 그 위에 먼지가 자욱하게 앉아 있습니다. 먼지를 계속 문질러 닦는 것은 도를 닦고 선을 닦는 것이지만, 먼지를 하나라도 더하는 것은 망상을 더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더하는 것을 교학에 비유합니다. 본래는 망상을 더는 선을 해야 되는데, 글자 한 자 더 배우면 한 글자만큼의 망상을 더하고, 두 자 더 배우면 두 글자만큼의 망상을 더하게 됩니다. 자꾸 배워서 더하게 되면 먼지가 더해져서 명경은 더 어두워집니다. 이는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워진다.”라는 말씀과 통하는 것입니다.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던다.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니, 무위이면서 못하는 것이 없다.”

爲學日益이요 爲道日損이라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니 無爲而無不爲라.(주8)

 

이 구절은 노자老子의 말씀입니다. 노자도 실제로 도의 수행이 어느 정도까지 깊이 들어간 분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함이 없어서 못 할 게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 즉 만능萬能이라는 것입니다. 덜고 또 덜어서 또 자꾸 덜어서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니 마침내 못 할 게 없는 만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능이 되려면, 자꾸자꾸 덜고 덜어 또 덜고 해서 참말로 함이 없는 데까지 덜어 버린 뒤에야 만능이 되는 것이니, 언어와 문자를 따라가서 명경明鏡에 먼지를 보태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자꾸자꾸 쉬고 쉬는 것이 덜고 더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체 망상을 다 쉬어 버리면, 그렇다면 그것이 함이 없음[無爲]인가? 절대 아닙니다. 일체 망상을 다 쉬어 버리면 불교에서는 제8아뢰야식 경계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무심경계無心境界인데,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 무심경계까지도 완전히 덜어야 합니다. 무심경계도 역시 병이기 때문입니다. 유심有心에 대해서는 무심無心이 약이지만 무심에 들어가서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 또한 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심에 들어가서도 진여眞如를 깨치지 못하면 실제로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노자의 무위無爲, 즉 ‘함이 없음’은 부처님의 정각하고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 기본 뜻은 어느 정도 통하지만 부처님의 정각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노자의 ‘함이 없어서 못 할 게 아무것도 없다[無爲而無不爲]’는 것은 제8아뢰야 근본식, 즉 무심식無心識, 무기식無記識과 같은데,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마저도 완전히 부숴야 참으로 부처님 같은 원만구족한 정각을 이루는 것입니다.

 

- 『백일법문』(2014) 상권, ‘제2장 불교의 절대적 인간관’ 중에서 발췌 정리.

 

 

<주>

(주1.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51(T10, 272c), “어느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으나 다만 망상으로 전도되고 집착하여 증득하지 못한다.[無一衆生而不具有如來智慧, 但以妄想顚倒執著而不證得.]”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2. 범아일여凡我一如: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凡과 개인의 본체인 아我가 같다는 우파니샤드의 사상이며, 정통 바라문 계통인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의 근본 사상이다.

(주3. 한용운韓龍雲(879~1944):우리나라의 승려·시인·독립운동가이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호는 만해萬海, 법명은 용운龍雲이다.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민족의 현실과 이상에 대해 노래한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에도 앞장섰다.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과 시집 『님의 침묵』 등이 있다.

(주4. 만해스님의 『정선강의精選講義 채근담菜根譚』 ‘개론槪論’편 제30에 “사람마다 마음속에 참 문장이 있지만 옛사람의 하찮은 말에 모두 막혀 버리고, 사람마다 마음속에 참 풍류가 있지만 세상의 난잡한 가무에 모두 묻혀 버린다. 배우는 사람은 하찮은 외물을 쓸어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찾을 때 참된 수용이 있으리라.[人心有一部眞文章, 都被殘編斷簡封錮了. 有一部眞鼓吹, 都被妖歌艶舞沒湮了. 學者須掃除外物, 直覓本來, 纔有個眞受用.]”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만해스님이 강의한 내용 중에 이 구절이 나온다.

(주5. 이 대화는 『장자莊子』 외편外篇 13, ‘천도天道’에 나온다.

(주6. 『장자』 외편外篇 13, ‘천도天道’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히 깎으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꼭 끼게 깎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않고 꼭 끼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의 감각이 마음에 호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법도가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것을 저의 아들에게 가르쳐줄 수가 없고, 저의 아들도 그것을 저에게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 노인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게 된 것입니다.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주7. 『소실육문小室六門』(T48, 375a)에 수록된 『혈맥론血脈論』에는 “廣學多知無益 神識轉昏.”라고 되어 있다.

(주8.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48장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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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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