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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 『불교佛敎』① - 편집인 권상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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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11:22  /   조회12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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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잡지 산책 11 / 『불교佛敎』(통권 108호, 1924.7-1933.7) ① 

 

 

『불교佛敎』(통권 108호, 1924.7~1933.7)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기관지다.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서 기관지로 펴낸 『조선불교총보』가 1921년 1월, 제22호로 종간된 이후 불교계는 교계를 대표할 공식적인 기관지가 없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비록 그 기간에 『불일』, 『금강저』라는 특색 있는 불교잡지가 등장하였지만, 교계 전체를 아우르는 기관지이자 종합지가 없는 현실은, 종교간의 치열한 포교 경쟁의 시기에 큰 한계가 되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기관지가 없던 3년 6개월은 교계가 총무원과 교무원으로 나뉘어 갈등하던 시기다. 불교유신회 측의 총무원과 기존 주지 중심의 교무원의 대립이 지속되던 중, 재단법인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 통일기관을 세울 것을 권고한 총독부의 방침, 총무원 측에서 운영한 보성고보의 재정적 어려움 등에 따라 양자는 해결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두 기관은 1924년 4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고, 기관지 간행 방침에 따라 1924년 7월 『불교』를 창간하였다.

 

 

 

사진 1. 『불교』 표지(창간호, 제11호, 제13호, 제32호).

 

 

『불교』 창간호~69호(1930.3)까지는 중앙교무원 예산으로 발행하였고, 70호~93호(1930.4~1932.3)는 불교사에서 독립적으로 예산을 운영하였다. 94호~108호(1932.4~1933.7)는 다시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의 예산으로 발행하였다.

전체 기간 동안 잡지의 편집은 두 명이 담당하였는데, 창간호~83호(1931.5)까지 7년간은 권상로가, 84·85호~종간호(1931.7~1933.7)까지 2년간은 한용운이 편집인 겸 발행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사진 1).

 

발행 목적

 

『불교』 창간호의 「창간사」에는 잡지의 발행이 “우리 불교의 기관다운 기관이 되어서 교리, 종제宗制,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조선불교로 하여금 불교다운 불교가 되게 하여서 그에 따라 우리 교역자나 신앙가도 모두 상당한 향상을 기하고자 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교리의 발달, 종제의 정리, 기타 다방면에 걸쳐 불교의 불교다움, 불교인의 향상이 궁극적인 목적임을 밝혔다. 이와 함께 실천 방안으로 참선, 교육, 법식(의례)의 정비라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창간사와 별도로 창간호에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메시지가 배치되었다.

 

창간호의 내지에는 ‘현재 조선 승려의 종조宗祖인 고려 공민왕사 태고화상의 부도’ 사진, 태고암의 전경 사진, 그리고 이성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태고화상의 신도비각 사진을 한 면에 담아냈다. 다음 면에는 <증도가> 형식을 따른 7언 절구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수록하였다.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선가禪歌 <태고암가>는 원元에 건너가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을 뵙고 자신의 득도의 징표로 바친 노래이다. 이 노래를 통해 태고는 석옹의 인가를 받고 귀국하여 해동 임제종의 초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고암가> 원문을 백파긍선白坡亘璇(1767-1852)의 분과分科에 따라 도식으로 제시하였다.

이와 함께 창간호에는 ‘안두타贋頭陀’가 북한산 태고암에 올라 태고화상의 유적을 보고 느낀 기행문 「태고암배관기太古庵拜觀記」가 수록되어 있다.

 

사진 2. 백성욱의 논문 「불교순전철학」(제7호).

 

슬프다. 이것이 당시에 일국 왕사의 지위를 점하고, 임제종풍을 직전直傳하여 선양하던 옛 도량이오, 현재 조선에 산재한 7천여 승려의 종조宗祖가 계시던 옛 가람이다. (중략) 삼십본산 위에 총 본산이 될 만한 태고암! (중략) 조선 법계의 초조初祖가 되시는 태고화상! 그 유허, 그 유적에 대하여 숭봉崇奉이 이렇게 소홀하고 관념이 이렇게 등한하기는 진실로 의외이다 아니다 말할 수 없다. 화상께서 일찍이 이 암자에서 태고암가를 지어 석옥 청공 선사에게 드렸더니 (중략) 오늘의 현상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함은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겠고, 얼굴을 들어 태고화상의 법손이라는 말을 남들에게 할 수 없게 되었다.[제1호, 41-42면, 필자 현대어 윤문.]

 

 

 

사진 2-1. 오봉산인의 시론 「조선불교의 현안을 해결하라」(제7호).

 

 

태고암은 전 조선의 7천여 승려의 종조가 계시던 곳으로 30본산의 상위에 위치하는 총본산이 될 만한 절이라는 점을 말하고, 지금의 태고암은 그야말로 남부끄러울 정도로 쇠락한 광경이어서 스스로 태고화상의 법손이란 말을 하기 어렵다는 자괴감을 토로하였다.

태고암 관련 사진과 <태고암가> 분과, 그리고 기행문 「태고암배관기」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태고보우를 종조로 하는 임제종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앞으로 『불교』가 이를 구현하는 매체로 존재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진을 선별하고 <태고암가>를 소개한 이는 물론, 기행문을 작성한 ‘안두타贋頭陀’ 역시 발행인인 권상로權相老(1879-1965)로 추정된다.

 

불교계에는 1910년대부터 태고보우를 종조로 인식하고 종통宗統을 수립하고자 하는 일련의 흐름이 있었다. 1914년 음력 3월 16일 태고사에서 불교계 주요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태고국사의 부도 앞에서 다례를 행했는데, 참가자는 태고사 주지 김용태, 30본산주지회의소 특별행례원인 선암사 주지 장기림, 해동불보사 사장 박한영을 포함하여 15명에 이르며 연례행사로 시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후 10년간 태고를 선양하고 태고암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 창간호에 배치된 태고보우 관련 글과 사진은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태고보우에게서 찾으려는 의지를 표명한 의의가 있다.

 

초기 필진-권상로와 김룡사, 대승사 인맥

 

1920년대 『불교』에 다양한 불교계 인사들의 투고가 있었지만(사진 2, 2-1), 『불교』지 초기의 투고자와 투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권상로의 주변에서 잡지의 이념과 방향을 설정하고 이끌어간 주요 필진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들은 편집인인 권상로의 주변에서 『불교』의 논조를 상의하며 기획하며 실행에 옮긴 집단적 개인으로 최취허崔就墟(1865년-?)와 안진호安震湖(1880-1965)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한국불교의 역사를 발굴하고 새로운 시대에 전통의식을 정비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고 실천하였다.

의식가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최취허는 명봉사鳴鳳寺에 귀일강당歸一講堂을 열면서 이를 기념하는 창가 <귀일가歸一歌>를 지어 『조선불교월보』(8호, 1912.9)에 소개한 바 있다.[필자는 『불교』 초기 호에 ‘각왕시자覺王侍者’라는 필명으로 일련의 시 <오인>, <공사>, <도행역시> 등을 투고한 인물이 최취허일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 3. 권상로의 찬불가 <봄마지>(제7호). 

 

20년대의 『불교』지에서 권상로는 권두언에 찬불가를 발표하고 일부는 곡조를 붙여 포교용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불교』 7호~21호에 걸쳐 발표한 14종의 찬불가 중 <봄마지>, <밋음>, <배후라>, <오섯네>, <불보佛寶>, <백종날>, <성도일 아침에> 등에는 신심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로 담겨 있다. 백우용 작곡, 권상로 작사의 <봄마지>(7호)를 비롯한 이들 작품은 근대 찬불가의 역사에서 출발점으로서 의의가 있다(사진 3). 권상로의 시도는 조학유曹學乳(미상-1932)의 <찬불가> 연작[『불교』 28호~41호, 1926.10~1927.11]으로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사진 4. 안진호의 「양주각사순례기」(제29호).

 

 

안진호는 기존의 창가, 찬불가를 『불자필람』과 『석문의범』에 수록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안진호의 더 큰 역할은 다양한 사찰 답사기, 기행문을 발표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이다. 그는 『불교』에 「양주각사순례기」, 「천불천탑을 참배하고서」, 「사찰사료수집의 길을 떠나면서」 등 당시 사찰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행문을 남겼다(사진 4). 

 

1920년대는 이광수, 최남선 등의 국토기행문이 독서계의 폭넓은 호응을 받던 시기다. 이들의 기행 바탕에 나라 잃은 지식인의 자아 찾기가 중요한 동인이 되었음에 비추어 볼 때, 『불교』지의 기행문은 우리의 역사를 찾아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자는 이 시대의 담론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기에 유입된 기자들-문예지 지향

 

『불교』지 초기에는 주요 독자를 사찰의 구성원이나 ‘신불가信佛家’를 넘어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년대 후기로 가면서 불교의 저변을 넓히고 독자층의 확장을 위해 신입 직원을 뽑아 종교지의 성격에 문예지와 종합지의 성격을 가미하고자 하였다. 1928년 5~6월에 불교사佛敎社에 입사한 직원으로는 철학박사 백성욱, 문학사 김진린, 종교학사 김태흡이 있다. 여기에 당시 문단에서 문예지 발간으로 주목받던 젊은 시인, 소설가(유엽, 방인근)와 삽화를 담당할 화가를 직원으로 영입하였다. 또한 당시 여성계에서 신여성의 이론적 실천적 선구자로 명성이 있던 김일엽을 편집진에 포섭함으로써, 『불교』지는 동시대에 명멸한 문예지 못지않은 진용을 갖추었다. 동시에 “편국偏局하던 회보의 체재를 일변하야 순전히 대중독물로 자기自期하야 문예, 학술, 온갖 방향을 모다 일초하야 고급적 학술잡지가 되게” 하고자 하는 방침과 자부심을 공표하였다[48호, 1928.6, 90-91쪽]. 그 결과 문예인사가 유입된 46·47호(1928.5)부터 62호(1929.8)까지 1년 넘게 불교사 안팎에 포진한 문인들의 시, 소설, 희곡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문예잡지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사진 5. 홍사용의 희곡 <흰젓> 91쪽(제50호). 

 

1928~1929년에 투고한 시인은 류춘섭(유엽), 백기만, 장회근, 탁상수(늘샘 와룡산인) 등이다. 소설가와 대표 작품으로는 유엽의 <범종을 울닐 때>, 방인근의 <산으로 가는 남녀>, 홍사용(露雀)의 <귀향>이 있고, 본명을 알 수 없는 큰터의 <무명지>와 백산白山의 <여인旅人>이 3회씩 연재되었다.

 

희곡으로는 박승희(春崗)의 <홀아비 형제>, 홍사용(露雀, 白牛)의 <벙어리 굿>(삭제됨)과 <흰젓>, <제석除夕> 등이 있다. 전문이 삭제된 채 제목만 전하는 <벙어리굿>은 일제의 억압 아래 자주적 발언권을 제약받은 우리 민족의 처지를 벙어리에 비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흰젓>(50·51호)은 전 6막 17장으로 구성된 희곡 작품이다. 신라 법흥왕 대 이차돈의 순교를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숭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수작秀作이다(사진 5). 이들 희곡은 그 자체의 문학적 성과를 넘어서 다중이 모인 불교회합에서 공연 대본으로 활용 가능한 작품으로서,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 

 

한편 문예지 성격을 강화하면서 잡지는 자연스럽게 국한문 혼용에서 순한글체의 비중이 커져 갔다. 특히 55·56호(1929년 1, 2월)부터 시, 신작소설, 희곡을 각 1편 이상 수록하였는데, 소설의 분량이 많아지면서 순한글체의 비중도 커져 갔다. 83호(1931.5)에 이르면 권두언이나 부록을 포함한 총 15개의 목차 항목 가운데 10항목이 순한글체로 표기되어 질적으로 한글 사용의 비중이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소설, 논설, 동요극, 불전 번역(「조선어불교성전」), 「서가여래」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이 있는데, 이는 편집인 권상로가 기획하고 젊은 직원들이 실행한 불교문화운동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종교성의 회복-국토 순례기의 대두

 

신진 필진들 그리고 외부 작가의 유입으로 문예 지면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시기는 약 1년 정도 지속되었다. 외부 문인들이 편집진에서 물러난 1929년 말부터 잡지의 문예지적 성격은 축소되었고 외부 작가의 투고도 거의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순례기를 집중 수록하여 잡지의 종교성을 강화하였다. 독자 확산을 위해 일반 문인들에게 문호를 열어 종합잡지의 성격을 가미했지만, 종단의 기관지라는 본연의 위상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보수적인 교계의 여론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진 5. 홍사용의 희곡 <흰젓> 91쪽(제50호). 

 

이 시기에 등장하는 대표적 기행문은 김태흡(김소하, 수송운납)의 「남유구도예찬南遊求道禮讚」과 「삼방약수포전도행三防藥水浦傳道行」, 안진호(만오생)의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참배하고서」, 주동원(동산인)의 「육수삼천리陸水三千里」, 강유문의 「순강천리巡講千里」 등이다. 이들 기행문은 단순한 여행기라기보다 일종의 순례기, 포교전도기, 참배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국토의 종교적 해석이라는 의미가 있다. 문학적 다양성을 추구하던 『불교』지의 내용이 이제는 국토를 불국토로 인식하게 하는 다양한 기행문으로 대체된 것이다. 한편 이는 접근이 쉽지 않았던 한반도 남부와 북부 지역의 불교 상황에 대해 일반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정보 전달의 기능도 훌륭하게 담당했을 것을 보인다.

이처럼 『불교』는 시기별로 당대의 독자층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편집 방침을 적절하게 수정하고, 소재 개발에 끊임없이 노력한 편집진의 노력이 곳곳에 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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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불교가사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불교문학의 다양한 양상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불가 한문학의 번역과 연구, 근대불교잡지의 문화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시가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근대성』 등이, 번역서로 『정토보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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