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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건축 이야기]
아웅다웅 사람을 담은 그릇 요사寮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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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09:53  /   조회3,4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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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건축 이야기 12 | 대중의 공간, 요사寮舍

 

 

불교 건축을 오랫동안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손에 꼽히는 건축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화려한 공포의 법당도 훌륭한 건축 중에 하나이고, 눈부신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문루도 그렇다. 그리고 좁은 길을 가다 모퉁이를 돌아 들어설 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일주문도 감동을 준다. 하지만 이런 보기 좋은 건축 보다는 나는 아옹다옹 침이 튀어 냄새가 밴 요사가 더 좋다. 

 

대중종교로 거듭나는 불교

 

사찰 건축을 보면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하지만 확고하게 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변화는 대중을 수용하는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불교가 지배층 중심의 종교였지만 이제는 기층 백성의 종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분명한 근거 중에 하나가 바로 대중 공간의 확장인 것이다.

 


장곡사 설선당 전경. 

 

성리학자들이 지배층이 된 조선은 자신의 생활 전반에 불교적 습관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공적으로는 불교를 멀리했다. 간혹 불교와 관계를 맺더라도 그것은 조상에 대한 효孝 차원의 제사나 산소 관리 정도이며 부득이 하는 일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더 이상 지배층만을 바라보고 살 수 없었다. 때마침 사회적 불안과 빈곤에 처해 있던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선각자라도 있었던 것일까? 불교는 백성의 고통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희망이 무엇인지 제시하기 시작했다.

 

 

 

사진 1. <대각국사중창건도기>의 선암사.

 

 

 

정성을 다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으며, 이를 믿고 따른 백성들은 그에 합당한 위로를 얻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불교는 지배층의 종교였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선순환 속에서 점차 많은 대중을 수용해 나가던 사찰은 제한된 재화로 큰 법당보다는 요사를 짓게 된 것이다. 물론 법당이 필요했겠지만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사찰을 찾아오는 대중들을 위해 요사를 지은 것이다.

 

 

사진 2. 송광사 건물 위치도 및 평면도(1928년).

 

 

 

대형 요사의 등장은 필연

 

<사진 1>은 선암사에 전해 내려오는 <대각국사중창건도기>의 선암사 표현 부분이다. 이 그림은 18세기 중반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회색으로 칠해진 부분은 ‘口자형’요사를 표현한 것이다. ‘口자형’요사는 제한 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방을 드리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평면인데, 이것만 골라도 당시 선암사에 요사가 9동이나 된다.

 

선암사는 1754년 일 천 수백 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몰려 화엄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교통이랄 것이 없었던 당시, 전국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 정도의 인파가 몰릴 정도라면 화엄학에 대한 대중들의 열기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대회가 3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니, 이 그림에서 나타난 선암사의 모습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광사의 상황도 비슷했다. 송광사는 조선 초부터 이어지던 가람이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위기를 겪었으나 전소되는 피해는 입지 않아서 옛 모습에서 조금씩 변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송광사 건물 위치도 및 평면도’(사진 2)는 1928년에 작성된 사역의 배치도인데, 이 그림이 작성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요사터를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터까지 모두 합치면 송광사도 선암사에 뒤지지 않는 대형 요사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두 사찰은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조하며 법등法燈을 이어 온 사찰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는 사찰의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요사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로 사찰로 사찰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요사의 진화

 

요사란 생활 공간으로 처음부터 크게 지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을 통해서도 요사의 규모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남아 있는 요사를 관찰하는 것이다. 

 

개심사 심검당, 장곡사 설선당(사진 3), 환성사 심검당, 봉정사 해회당 등은 기존의 요사에 필요한 실室을 부가하는 방식으로 규모가 커진 요사들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요사는 2~4칸 정도의 작은 규모이면서 ‘일자형一字形’으로 단순한 평면을 하고 있었다. 이후 요사를 확장할 필요가 생기면 여기에 새로운 실을 부가하면서 확장되었는데, 터가 좁아 꺾어지는 평면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서 안마당이란 중심 영역이기 때문에 이곳에 면하는 건축인 법당法堂, 누樓, 그리고 좌우의 요사 등이 사찰의 중심 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4>의 옥천사 적묵당처럼 안마당에 인접한 변에서 문루에 가까운 모서리에 부엌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사정에 따라 요사에 부엌을 두지 않고 난방만 하는 아궁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엌을 두어 취사와 난방을 함께할 수 있게 해서 한 건물에서 독립된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진 3. 장곡사 설선당 평면도(회색이 원래 크기)

 

 

 

부엌에 바로 면해 큰 방(대방)을 두고 있는데, 큰 방에서는 발우공양을 하거나 염불을 하는 등 대중들이 모임을 갖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상당수의 사찰에서는 이 큰 방을 법당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간단하게 불단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인법당因法堂 또는 법당, 큰 방 등으로 부른다. 이렇게까지 명칭이 다양한 것은 아직까지도 인법당에 대한 정의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대방(큰 방) 위에는 다시 지대방을 두는데, 대개 한 칸 규모로 휴식을 취하거나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용도이다. 대방과 마주하는 반대편은 공루空樓(다락과 같이 물건을 보관하는 공간)를 두거나 객실 등과 같은 방을 드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외에 ‘날개채’라고 하는 위편과 아래편에도 비슷한 용도의 실을 두는데, 주로 아랫 날개채는 방, 윗 날개채는 공루와 같이 창고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안쪽으로는 쪽마루나 툇마루를 두어 신발을 신지 않고도 방끼리 이동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안쪽 뜰을 중심으로 소통이 원활한 최적의 평면이 ‘口자형’인 것이다.

 

사찰계의 성행

 

대형 요사의 유행과 함께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는 바로 사찰계의 증가이다. 사찰계는 신앙과 수행은 물론 친목과 보사補寺(사찰에 대한 경제적 지원)까지를 포함하는 활동을 했는데, 사찰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사찰이 구성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여건이 불비하단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사찰을 중심으로 모여든 대중들이 계를 통해 보사활동을 전개 할 만큼 적극적이고 활발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현재 사찰계는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 당시 계가 없는 사찰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찰에서 계가 성행했다. 특히 18세기 이후로는 사찰 재정 기반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뚜렷한 활약을 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 4. 고성 옥천사 적묵당(상)과 안동 봉정사 해회당(하). 

 

계의 활동은 계원이 모여 식리殖利와 수행에 관해 의논하고, 신행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에 맞는 공간이 필요했을 텐데, 바로 그것이 대형 요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사찰에서 대형 요사의 확산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는데, 특별한 행사 때나 사람이 모이던 이전과는 달리 상시 사찰에 비교적 많은 대중이 상주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사찰이 운영되던 새로운 패턴이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굴곡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지배자인 성리학이 아니라 지배당하던 불교이다. 격변을 거치던 조선 사회에서 그 누구도 정확히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몰랐던 것은 유불儒佛이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불교는 대중과 함께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모으는 데는 성공하여 버틸 체력은 길렀지만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암튼 이런 아쉬움은 있지만 조선시대 사찰 건축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은 화려하게 장식된 법당이 아니고, 구불거리는 기둥과 약해 보이는 서까래를 썼어도 힘주어 요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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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건축학 박사. 전 금강산 신계사 추진위원회 연구원, 전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전 조계종 전통사찰전수조사연구실 책임연구원, 현 동국대 강사 및 은평구 한옥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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