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육상원융六相圓融하는 대립 이전의 무아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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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11:51 / 조회4,916회 / 댓글0건본문
과학과 불교 17 | 대립과 연기법의 세계
대립의 세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주 많다. 같고 다름, 길고 짧음, 멀고 가까움, 크고 작음, 많고 적음, 무겁고 가벼움, 순간과 영원, 위와 아래, 상승과 하강,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증가와 감소, 밝고 어두움, 양과 음, 풍요와 결핍,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 선과 악, 삶과 죽음, 태어나고 사라짐, 생과 멸이 있다. 우리의 느낌과 관련해서도 깨끗함과 더러움, 희고 검음, 아름다움과 추함, 덥고 추움, 배부름과 배고픔이 있다. 과학 용어에서도 직선과 곡선, 운동과 정지, 입자와 파동, 변화와 보존, 평형과 비평형이 있다. 이 모든 대립적인 개념의 궁극적인 지점은 아마도 있음과 없음,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일 것이다.
사전에서 유의어와 반의어 목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언어는 대립의 개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우리 언어, 그리고 이 언어로 진행되는 사고의 상당 부분이 대립적인 개념 체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없다면 언어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으며, 늘거나 줄어들지 않으며, 더럽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나 논리 혹은 사고 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얘기일 수밖에 없다.
원운동과 단순조화진동과 삼각함수
대학교 1학년 물리책에 나오는 원운동과 단순조화진동(단진동)의 관계를 살펴보자. 용수철에 달린 물체의 운동이나 줄에 매달린 진자의 운동이 단진동이다. 이런 운동에서 물체의 속력은 중심에서 가장 빠르고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느려진다. 가장자리에서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지나왔던 경로를 되돌아간다. 마찰이 없다면 이런 진동을 무한히 반복하게 되는데, 이를 단진동이라고 한다. 단진동은 1차원 공간에서 두 지점을 왕복하는 운동이고, 원운동은 2차원 공간에서 회전하는 운동이다.
<그림 1>은 반지름이 1인 원 위의 점 P를 나타낸다. 점 P가 일정한 속력으로 원주 위를 회전한다고 하자. 점 P의 위치를 1차원으로 투영(projection)하면, 어느 축으로 투영하든 투영한 점은 모두 1과 –1 사이를 왕복하는 단진동이 된다. <그림 2>는 점 P를 x와 y축에 투영한 지점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나타낸다. 원운동을 x축으로 투영하면 코사인 함수가 되고, y축으로 투영하면 사인 함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이용하여 삼각함수를 정의할 수도 있다.
얼핏 보면 원운동과 단 진동과 삼각함수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고래와 코끼리가 아주 다르게 생겼지만, 모두 포유류인 것과 같다. 그리고 여기엔 이 셋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하다. 이를 살펴보자.
좌표에 따른 음과 양
<그림 1>에서는 점 P의 위치를 x축과 y축으로 투영하는 두 가지 방법만 보았지만, 2차원 원운동을 1차원 공간에 투영하는 방법은 무한히 많다. x축과 y축을 어떻게 잡을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으므로, <그림 3>과 같이 무수히 많은 좌표축이 가능하다. 좌표축이 달라지면 단진동을 기술하는 식도 또한 달라진다. 하나의 원운동이 있을 뿐이지만,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위상이 서로 다른) 단진동이 무수히 만들어진다. 하나의 달이 뜰 때, 천 개의 강에 물이 흐르면 천 개의 달이 나타나고 만 개의 강에 물이 흐르면 만 개의 달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림 4>의 (x', y')처럼 <그림 1>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좌표축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양이었던 점은 음이 되고 음이었던 점은 양이 된다. 음과 양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점은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니다. 좌표축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혹은 어느 좌표에서 보느냐에 따라 혹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양이 되기도 하고 음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림 4>의 (x", y") 좌표에서처럼, 점 P의 x값이 0이 될 수도 있다. 그 점은 단지 둥근 원 위에 있을 뿐이다.
전자의 전하를 양이라고 하고 양성자의 전하를 음이라고 해도 자연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일관성만 유지한다면, 물리학적 설명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양이나 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관점에 의해 우리에게 나타난 모습이고, 이에 따라 우리가 설정한 개념이고, 우리가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상相 이전의 무아無我
좌표축의 설정과 관련하여 음양을 살펴봤지만, 음양뿐 아니라 현상으로 나타나는 상相은 모두 이렇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했다. 같은 물이라도 천상의 사람에게는 보석으로 보이고, 사람에게는 마시는 물로 보이며, 물고기에게는 사는 집으로 보이고,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인다고 한다. 어떤 인연이 성립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상相이 나타나는 것은 물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결정적 본질(essence)이 없기 때문이다.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똥을 더럽다고 하고, 바닷물을 짜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말똥이 더러운 상相으로 나타나고, 바닷물이 짠 상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똥구리에게 물어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것이 말똥이라고 할 것이다. 그에게는 말똥이 집이고 밥이다. 고등어에게 물어보면 바닷물이 짜지 않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짠 게 무어냐고 되물을 것이다. 말똥구리가 더럽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똥이 본래 더럽지 않기 때문이고, 고등어가 짜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닷물이 본래 짜지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으로 나타나도 본래 더러운 것이 아니고, 짠 것으로 나타나도 본래 짠 것이 아니다.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無我이다.
물은 중생에 따라 보석으로 나타나고 마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는 집으로 나타나고 피고름으로 나타나지만, 본래 보석도 아니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사는 집도 아니고 피고름도 아니다. 말똥을 더럽다고 하지만 본래 더러운 것은 아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다. 바닷물을 짜다고 하지만 본래 짠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단지 연기緣起에 의해 이러저러하게 나타났을 뿐, 일체의 모든 것이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無我일 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하나의 점이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니듯이, 말똥은 더럽지 않고 바닷물은 짜지 않다. 모든 상相 이전의 무아無我일 뿐, 달리 무엇이 있지 않다.
육상원융六相圓融
화엄의 3조 현수법장 스님은 화엄 법계의 연기하는 모습을 육상원융으로 설명하셨다.(주1) 육상은 서로 대립하는 세 쌍의 모습이고, 원융은 원만하게 서로 융통함을 의미한다. 이 세 쌍은 총상總相과 별상別相, 동상同相과 이상異相,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이다. 법장이 비유한 대로 집으로 설명해 보자.
집이 총상이고 서까래가 별상이다. 서까래, 기둥, 대들보, 기와 등 여러 가지의 별상이 있어야 집이라는 총상이 된다. 별상이 있어야 총상이 가능하므로 총상은 별상에 의지한다. 그런데 집을 이루는 서까래는 원래 나무토막이다. 이 나무토막이 서까래가 되는 것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집의 모든 것이 나무토막에 들어오면서 그 나무토막은 서까래가 된다. 집이라는 총상이 있어야 서까래, 기둥, 대들보, 기와 등 여러 가지의 별상이 가능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총상이 있어야 별상이 가능하므로, 별상은 총상에 의지한다. 서까래가 집의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원만하고 다른 모든 것과 융통하여 집을 이루므로, 원만 융통의 원융이 성립한다. 전체와 부분이 대립하지 않고 원융하면서 서로 의지한다. 기둥과 대들보와 기와와 집도 모두 그렇다.
서까래와 기둥과 대들보와 기와는 서로 다르므로 이상異相이다. 이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긋나지 않게 가지런히 인연을 맺어 집을 이룬다. 집이라는 하나의 과果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으므로 동상同相이라고 한다. 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화합해야 집을 이룰 수 있다. 동상同相이려면 이상異相이어야 한다. 서로 다르지만 이루는 집은 하나이므로, 이상異相이지만 동상同相이다. 이루는 집은 하나지만 서로 다르므로, 동상同相이지만 이상異相이다. 같음과 다름이 대립하지 않으면서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이 원융한다.
집이 이루어지므로 성상成相이다. 집을 이루지만 서까래는 서까래로 남아 있고 대들보는 대들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집이 이루어진다. 집을 이루면서도 끌려가지 않고 자신을 지키므로 괴상壞相이라고 한다. 집을 이루지만 자신을 지키므로, 성상成相이지만 괴상壞相이다. 자신을 지키지만 집을 이루므로, 괴상壞相이지만 성상成相이다. 전체를 이루어냄과 자기 자신을 지켜냄이 서로 대립하지 않으면서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이 원융한다.
위치와 수
어느 지점의 위치를 말하려면 다른 점의 위치가 모두 정해져 있어야 한다. 다른 지점과의 관련이 없다면, 위치는 그 자체로 의미를 상실한다. 이는 어느 한 점의 위치엔 다른 점의 위치가 모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서까래에만 집이 들어와 있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점의 위치에도 다른 점이 모두 들어와 있다. 서까래 등이 연기하여 집을 이루듯이, 무수한 점들이 연기하여 공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숫자도 마찬가지다. 숫자 303에는 3이 두 번 나오는데, 앞의 3은 삼백이고 뒤의 3은 셋이다. 같은 3이라도 앞자리에 있으면 삼백이 되고 뒷자리에 있으면 셋이 된다. 앞의 3이 삼백이 되는 것은 그 뒤에 숫자가 있기 때문이다. 뒤의 두 숫자가 앞의 3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뒤의 두 수가 들어올 수 있는 것은 3이라는 숫자도 무아이기 때문이다. 303이 무아無我의 상입相入하는 연기緣起이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본다
서까래와 위치와 303처럼, 우리가 아는 모든 것에는 다른 모든 것이 들어와 있다. 의상스님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 있다고 하셨다. 작은 티끌에도 온 세상이 다 들어와 있으니, 내 안에도 시방삼세가 다 들어와 있을 것이다.
이 들어와 있음의 인연으로 바라본 세상이 세간世間이다. 우리는 우주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든 세간에 산다. 세간에서는 물이 마시는 것으로, 사는 집으로, 보석으로, 피고름으로 나타난다. 원이 아니라 단진동만 보이므로, 불구부정의 참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 세간이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연기緣起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다. 어디 다른 곳이 없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본다고 하셨다.
<각주>
(주1) 해주, 『화엄의 세계』(1998), 민족사, pp.211-2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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