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선사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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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14:19 / 조회8,743회 / 댓글0건본문
제104호 | 중국선 이야기 12 |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③
『육조단경』(이하 『단경』)에서 자신의 마음[自心]과 ‘자성自性’, 그리고 우리가 늘 접하는 사람들의 인성[世人性]으로부터 ‘불성’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깨달음으로 ‘돈오頓悟’를 강조하며 계정혜 삼학에 대하여 ‘정혜등학定慧等學’을 세웠다면, 그에 대한 수행론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단경』의 앞부분에서 혜능선사가 설하는 ‘법요法要’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전하여 온 이래로 돈頓·점漸 모두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는다.(주1)
이로부터 혜능선사 선법의 ‘종宗·체體·본本’이 ‘무념·무상·무주’임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체·본’에 대하여 송대宋代 명교대사明敎大師 설숭契嵩은 『육조대사법보단경찬六祖大師法寶壇經贊』에서 “무상위체無相爲體는 존귀한 대계大戒이고, 무념위종無念爲宗은 존귀한 대정大定이며, 무주위본無住爲本은 존귀한 대혜大慧이다.”(주2)라고 하여 ‘계정혜’에 배대하여 해석하고 있다. 이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지니지만, 이른바 ‘반야般若’의 ‘실상實相’에 대한 세 가지 측면의 궁극적인 면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무념·무상·무주’를 흔히 삼무三無라고 칭하고, 바로 『단경』에서 설하는 선사상의 핵심을 선언한 것이라고 하겠다.
『단경』에서는 이를 이어서 ‘삼무’를 하나씩 설명하고 있다. 우선, ‘무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념이란 생각함[念]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不念]이다.(주3)
이로부터 ‘무념’은 ‘염念’의 작용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생각함에 있어서[於念]’라는 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작용을 긍정하고 있음을 말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不念]’은 어떠한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단경』에서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없다[無]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생각한다[念]는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이상二相의 모든 번뇌에 치달림[諸塵勞]을 떠난 것이고, 생각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하는 것이다.(주4)
이로부터 『단경』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도 세속의 생활도 모두 번뇌에 치달리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다만 ‘진여본성’을 생각해야 함을 ‘무념’이라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념’을 생각이 없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반복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백물百物을 헤아리지 않고서 생각이 다하여 제거하였다고 하지 말라.
일념一念이 끊어지면 바로 죽음이니, 다른 곳에서 생生을 받는다.(주5)
만약 백물을 헤아리지 않으면 생각이 끊어지게 되고, 바로 법에 얽매임[法縛]이 되고, 바로 변견邊見이라 칭한다.(주6)
이로부터 명확하게 ‘무념’이 ‘염’이 없는 상태가 아님을 밝히고 있으며, 도리어 우리 존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항상 ‘염’의 작용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념離念’을 강조하는 북종北宗의 선사상(주7)을 겨냥한 측면도 있지만, 여기에는 도교道敎에서 불교의 열반涅槃을 죽음으로 매도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을 배움[學死]’이라는 비판(주8)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고 하겠다. 사실상 우리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염’의 작용이 필수적이어서 그것이 끊어진다면 바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경』에서 ‘무념’을 논하는 것은 철저하게 ‘반야’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 ‘무념’을 통하여 ‘반야삼매般若三昧’를 깨닫는다고 설한다.
‘반야삼매’를 깨닫는 것은 바로 ‘무념’이다. …… 육진六塵 가운데서 떠나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으며 오고 감이 자유로운 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자재해탈自在解脫이어서 무념의 행行이라 칭한다.(주9) 만약 해탈을 얻는다면 바로 ‘반야삼매’이고, ‘반야삼매’는 바로 ‘무념’이다. …… 육진 가운데 물들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며 오고 감에 자유롭고 통용通用하여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자재해탈이어서 무념의 행이라 칭한다.(주10)
이로부터 ‘무념’과 ‘반야삼매’를 이른바 호환互換의 경지로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경』에서는 “‘무념’을 ‘종’으로 세우게 된 것은 바로 미혹한 사람이 경계에 연緣하여 ‘염’을 일으키고, ‘염’에서 사견邪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치달리는 망념妄念이 이로부터 생한다.”(주11)라고 설하여 ‘종’으로 시설한 까닭을 밝히고, 나아가 이러한 무념의 증과證果에 대하여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만법에 모두 통하고,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제불諸佛의 경계境界를 보며, 무념無念의 돈법頓法을 깨달은 자는 불위佛位에 이른다.”(주12)라고 하여 ‘불위’에 오를 수 있는 근거로써 무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단경』에서 ‘무념’을 ‘종宗’으로 삼는 까닭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단경』에서는 ‘무념’에 이어서 ‘무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상’이란 상相에 있어서 상을 떠난 것이다.(주13)
이로부터 ‘무상’은 ‘무념’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는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상相’과 ‘실상무상實相無相’으로서의 ‘상’, 즉 『단경』에서 논하는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말한다. 앞에서 무념의 설명에 인용했던 “없다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이상二相의 모든 번뇌에 치달림을 떠난 것이고, 생각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것과 동일한 논리를 ‘무상’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단경』에서는 “밖으로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 ‘무상’이고, 다만 능히 ‘상’을 떠날 수 있어야 성체性體가 청정淸淨하다. 이것이 바로 ‘무상’을 체體로 삼는 것이다.”(주14)라고 설한다.
『단경』에서는 ‘무주’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주’는 사람의 본성本性이 됨이다. 염념念念에 머물지 않고, 전념前念·금념今念·후념後念이 염념에 상속相續하여 단절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일념一念에 단절斷絶이 있다면, 법신法身은 곧 색신色身을 떠나게 된다. 염념 가운데 일체법에 머묾이 없음이다. 만약 일념이 머문다면, 염념이 바로 머묾으로 계박繫縛이라고 부른다. 모든 법에서 염념이 머물지 않는다면 바로 무박無縛인 것이다. 따라서 ‘무주’를 본本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주15)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다. 세간에서 선, 악, 아름다움, 추함, 내지 원수이거나 친함, 말로 상처 주거나 속이고 다툼이 있을 때, 그 모두를 공空으로 삼아 갚아서 해침을 헤아리지 않으며, 염념 가운데 앞의 경계를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전념 금념 후념이 염념에 상속相續하여 단절이 없음을 계박繫縛이라고 칭한다. 제법諸法에서 염념이 머물지 않는다면 바로 무박無縛이다. 이것이 ‘무주’를 본本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주16)
이러한 인용문으로부터 ‘무주’는 ‘무념’·‘무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끊임없이 상속되어 발생하는 염념에 단절이 발생하면 ‘법신이 색신을 떠남’, 즉 죽음이지만 그렇다고 ‘일념이 머문다면’ 바로 ‘계박’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염념에 ‘단절’을 일으켜서는 안 되지만, ‘머묾’이 일어나면 법에 묶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일견 모순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보본에는 “만약 일념에 단절이 있다면 법신은 곧 색신을 떠나게 된다.”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고 돈황본이 모순된 논리를 전개한 것이 아니라 앞의 ‘무념’·‘무상’에서의 이중적 논리로 이해한다면 결코 모순된 논리가 아니라 ‘반야공관’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단경』에서 논하는 ‘무념 무상 무주’의 삼무는 그 내용으로 볼 때, ‘무념지념無念之念’·무상지상無相之相’·‘무주지주無住之住’라고 바꾸어 말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러한 용어들은 구마라집鳩摩羅什 이후 다양한 문헌에서 출현하고 있으며, 이 바탕에는 이른바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는 ‘반야’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반야법에서 ‘실 상’을 제시한다면 자체모순이 발생하지만, 그러한 ‘실상’의 상태가 바로 ‘무상’이라는 방식으로 그 모순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념 무상 무주’의 삼무는 사실상 『단경』에서 설정한 ‘돈오’에 이르는 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삼무’는 단순한 수행론이 아니라 궁극적인 경지로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돈오’에 이른 경계를 바로 ‘무념 무상 무주’라고도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념 무상 무주’의 삼무에 입각한다면, 종래의 수증修證에 필연적으로 변화가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돈오’가 ‘단계’, ‘점차’를 부정한다면, 기존의 수증관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단경』에서는 ‘수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간정看淨을 말하자면, 인성人性은 본래 깨끗한데 망념이 진여眞如를 덮고 있는 까닭에 망념을 떠나면 본성은 깨끗해진다. 자성自性이 본래 깨끗함을 보지 못하고서 마음을 일으켜 ‘간정’하면 오히려 ‘정망淨妄’이 일어나니, 허망함은 있는 곳이 없다. 이런 까닭에 본다고 하는 것[看]은 오히려 허망함을 알아야 한다. 깨끗함은 형상이 없는데, 오히려 정상淨相을 세워서 이를 공부라고 말한다. 이렇게 지어서 보는 자는 스스로의 본성에 걸림이 있어 오히려 깨끗함에 묶이게[淨縛] 된다.(주17)
만약 착정著淨을 말하자면, 인성은 본래 깨끗한데 망념이 ‘진여’를 덮고 있는 까닭에 다만 망상妄想이 없다면 본성은 스스로 청정해진다. 마음을 일으켜 ‘착정’한다면 오히려 ‘정망’이 일어나니, 허망함은 있는 곳이 없다. 집착함[著]이란 허망한 것이고, 깨끗함은 형상形相이 없는데, 오히려 ‘정상’을 세워서 이를 공부라고 말한다. 이렇게 지어서 보는 자는 스스로의 본성에 걸림이 있어 오히려 깨끗함에 묶이게[淨縛] 된다.(주18)
이는 북종 신수神秀의 ‘간심간정看心看淨’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지만, 이는 앞에서 논한 ‘무념 무상 무주’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상위개념으로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깨끗함에 대한 망집인 ‘정망淨妄’이 되고, 그에 따라 ‘정상淨相’을 세우게 되며, 나아가 그에 묶여 자유로울 수 없는 ‘정박淨縛’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입장도 그 바탕에는 ‘돈오’의 사상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으며, 사실상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이른바 ‘무수지수無修之修’와 ‘무증지증無證之證’의 ‘무수무증無修無證’이 전개된다고 하겠다.
『단경』에서 설하는 ‘무념 무상 무주’의 삼무뿐만 아니라 앞에서 논한 ‘ 자성自性’, ‘자심自心’, ‘세인성世人性’으로서의 ‘불성佛性’, 그리고 ‘정혜등학定慧等學’ 등은 모두 ‘돈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상들은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단경』에서 설한 ‘계’, 즉 ‘무상계無相戒’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를 이를 이어서 고찰하고 자 한다.
<각주>
(주1)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善知識! 我此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善知識! 我此法門, 從上以來, 先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주2) [宋]契嵩撰, 『六祖大師法寶壇經贊』,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46c), “無相爲體者, 尊大戒也. 無念爲宗者, 尊大定也. 無住爲本者, 尊大慧也.”
(주3)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無念者, 於念而不念.”;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주4)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無者無何事? 念者念何物? 無者離二相諸塵勞, 念者念眞如本性.”;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b).
(주5)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莫百物不思, 念盡除卻. 一念斷卽死, 別處受生.”;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만약 다만 百物을 헤아리지 않음을 생각이 다하여 제거하였다고 한다면, 一念이 끊어지면 바로 죽음이니, 다른 곳에서 生을 받을 것이며, 이는 커다란 착오이다.[若只百物不思, 念盡除却, 一念絶卽死, 別處受生, 是爲大錯.]”
(주6)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若百物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b).
(주7) 『大乘無生方便門』(大正藏85, 1273c), “이른바 覺義란 心體가 생각을 떠남[離念]이요, ‘離念’은 佛義이고 覺義이다.[所言覺義者, 心體離念, 離念是佛義覺義.]”
(주8) [梁]僧祐撰, 『弘明集』卷8(大正藏52, 48a), “『三破論』에서 말한다. ‘道家의 가르침에서 妙는 정밀하게 사색하여 하나[一]를 체득하여 죽지 않고 入聖함에 있다. 佛家의 가르침에서 妙는 三昧禪을 통하여 無生을 바라는 것이고 죽음을 泥洹(涅槃)이라 칭하지만, 죽음을 배워서 죽음에 들지 않음을 본 적이 없다.’[三破論云: 道家之敎妙在精思得一, 而無死入聖. 佛家之化妙 在三昧禪通無生可冀, 詺死爲泥洹, 未見學死而不得死者也.]”; 앞의 책(大正藏52, 51c), “論에서 말한다. ‘泥洹이란 죽음이니, 죽음을 배워서 長生을 얻은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이는 종족을 멸하는 가르침이다.’[論云: 泥洹是死, 未見學死而得長生, 此滅種之化也.]”
(주9)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自在解脫, 名無念行.”
(주10)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1b),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般若三昧, 卽是無念. …… 於六塵中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自在解脫, 名無念行.”
(주11)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立無念爲宗, 卽緣迷人於境上有念, 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念從此而生.”;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무엇 때문에 無念을 宗으로 삼는가? 입으로는 見性을 말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外境에서 念을 일으키고 念에서 邪見을 일으킨다. 모든 번뇌에 치달리는 妄想이 이로부터 생한다.[云何立無念爲宗? 只緣口說見性, 迷人於境上有念, 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想從此而生.]”
(주12)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0c),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1b).
(주13)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無相者, 於相而離相.”;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주14)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是以無相爲體.”;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外離一切相, 名爲無相. 能離於相, 卽法體淸淨. 此是以無相爲體.”
(주15)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卽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爲本.”
(주16)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無住者, 人之本性. 於世間善惡好醜, 乃至冤之與親, 言語觸刺欺爭之時, 並將爲空, 不思酬害, 念念之中不思前境. 若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不斷, 名爲繫縛. 於諸法上念念不住, 卽無縛也. 此是以無住爲本.”
(주17)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若言看淨, 人性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性淨. 不見自性本淨, 起心看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故知看者, 却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 障自本性, 却被淨縛.”
(주18)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b), “若言著淨, 人性本淨, 由妄念故, 蓋覆眞如, 但無妄想, 性自淸淨. 起心著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著者是妄,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工夫. 作此見者, 障自本性, 却被淨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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