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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방송과 연극 등으로 불교대중화를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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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09:21  /   조회4,24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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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14 | 김태흡金泰洽 1899~1989  

 

김태흡金泰洽(1899~1989)은 식민지기 조선 불교계의 미래를 짊어질 전도유망한 학승이었다. 법호는 대은大隱, 소하素荷이고 금화산인金華山人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포교사로서 활동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대중화를 추구했고 문필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또 불교사에도 관심을 가져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시각에서 조선불교의 현실을 고민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친일 행보를 걸었고 이것이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태흡의 생애는 자전적 성격의 글인 「나의 개안」(1975), 유고집으로 나온 『대은대종사 문집』(2009)의 「대은대종사 연보」와 「대은당 소하대선사비」에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다만 연도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김태흡의 이력과 유학생활

 

김태흡은 1899년 4월 4일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고 3세에 서울로 이사했는데 군관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1906년 외할머니의 권유로 7세의 어린 나이에 철원에 있는 심원사로 출가했다. 처음에는 범패를 익히다가 191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미과의 교재를 배웠다. 이후 건봉사·용주사·마곡사·법주사 등에서 조선후기 이래 전통적 승려 교육과정인 이력과정의 사집과·사교과·대교과를 순차적으로 이수하였다. 1918년 법주사에서 최고 단계인 대교과를 마쳤고, 다음해에 21세 약관의 나이로 진하축원에게 전강을 받고 법주사의 강사가 되었다. 축원은 『선문재정록』을 지어 19세기 선 논쟁의 대미를 장식한 이였다.

 

 

사진 1. 김태흡金泰洽(1899~1989). 

 

1920년 봄에 김태흡은 문경 대승사의 초청으로 강주가 되어 학인들을 지도했는데, 이때 앞서 법주사에서 만난 적이 있던 이영재와 재회했고, 그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영재는 한국불교사를 연구한 학승 김영수에게 교학을 배웠고, 1920년 일본의 니혼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재일조선불교청년회 창립을 주도했고, 기관지 『금강저』의 편집을 맡았다. 이후 도쿄대학 인도철학과에 들어가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를 공부하고, 1925년 원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갔다가 1927년 풍토병으로 요절했다. 이영재가 1922년 신문에 연재한 「조선불교혁신론」은 민주 공화정 이념과 권력 분립을 기조로 하는 혁신 교단 건설과 불교 근대화, 그리고 사찰령 철폐를 주장한 글이다.

 

김태흡은 1920년 가을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중등 과정을 속성으로 마치고 도요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여 2년간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는 다른 유학승들과 달리 사찰의 지원을 받지 않고 신문 배달, 인력거꾼 등 막노동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1923년 한국인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한 관동대지진을 겪었고, 1924년에는 이영재, 최범술 등과 함께 『금강저』 창간을 주도하고, 7~15호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또한 방학 때마다 귀국하여 전국을 돌며 불교 강연회를 열었다. 1926년 3월에는 니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했는데 당시 『불교』지 소식란에는 “우리 유학생으로서 문학사가 된 효시이다.”라고 평했다. 이후 그는 귀국할 때까지 도쿄제대 사표편찬소에서 편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집필 활동과 주요 논지

 

김태흡이 학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종교와 사회사업 발달의 연구」는 1926년 7월부터 1928년 7월까지 『불교』지에 연재되었는데 논문의 총론부분을 옮긴 것이다. 그 내용은 종교와 사회사업, 사회사업의 개념, 사회사업의 역사적 관찰의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에서는 종교의 발생과 본질, 불교와 기독교의 사회사업, 응보주의와 연대 책임 문제 등을 다루었다. 2장에서는 사회사업의 의의, 목적과 분류, 사회의 질병과 진찰, 빈곤의 원인과 사회사업 발생에 대해 서술했다. 3장은 서양 사회사업의 연혁을 고대, 중세, 근세에 걸쳐 정리했고 이어 중국과 일본, 한국의 사회사업 발달에 대해 검토했다.

 

1927년 5월에는 『불교』 35호에 「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민족주의적 입장의 글을 투고했다가 당국에 의해 일부 내용이 삭제되었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 그리고 의승장으로 8도에 명성을 떨친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등의 활약상을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분충서난록』, 일기를 비롯한 각종 문헌과 사적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했는데, 묘향산 보현사에 있는 「봉안어용사적」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여 주목된다. 또한 국왕이었던 선조와 휴정의 개인적 인연과 의승 궐기와 관련된 상황을 서술한 점도 흥미롭다. 

 

휴정은 1589년 정여립의 역모 사건 때 무고로 추국을 받았는데, 그의 글을 선조가 읽고 감동하여 방면하고 그림과 시를 내린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휴정은 “나라 안의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설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문 곳에서 수행하며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소집하여 종군하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은 비록 역을 지고 조세를 내는 부류는 아니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성상의 은혜와 훈육을 받고 있는데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목숨을 바쳐 충심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아뢰고, 전국 사찰에 격문을 띄워 5,000의 의승군을 일으켰다. 이때 황해도에서는 의엄, 강원도는 사명유정, 전라도에서는 뇌묵처영이 궐기하는 등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승군이 들고 일어났다. 

 

「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에서는 또한 유학자 만능시대인 조선시대의 배불훼석 풍조를 언급하면서 이때 의승병이 일어나 유학자도 미치지 못한 충렬의 전공을 세웠음을 거듭 강조했다. 김태흡은 이를 인도나 중국 불교사에서 볼 수 없는 영웅적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임진왜란 의승 외에도 국가의 폐불, 선종의 분기, 신유학을 포함한 중국불교사, 삼국부터 조선까지의 한국불교사를 간단히 정리했고 부처 당시의 인도 상황과 비교하여 그 특징을 부각시켰다.

 

최초로 방송활동을 펼친 불교인사

 

김태흡은 1928년에 귀국하여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운영하는 경성각황교당의 초대 포교사로서 7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매주 토요일·일요일 설법은 물론 서울과 평양에서 거리 포교도 행했는데, 당시 ‘포교 미치광이’, ‘포교왕’이라는 평판을 들었다고 스스로 회고하고 있다.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강의했고, 이와 함께 라디오 방송과 강연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불교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경성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했는데, 1929년 1월과 10월에 ‘소크라테스의 윤리철학과 불교의 실천도덕’, ‘가정평화의 묘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사진 2. 불교계 인사로 최초로 김태흡이 방송활동을 했던 경성방송국 전경. 

 

한편 불교 현대화를 위한 그의 다방면의 노력은 불교합창단과 불교극단을 조직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1930년 이후 다수의 찬불가와 희곡 작품을 지었고, 1932년에는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가 쓴 대중포교서도 내용이 쉽고 문장이 간결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으로 『석가여래약전』(1932)은 1940년대까지 4판이 인쇄되며 총 4만여 부가 팔렸다고 한다. 

 

『불교시보』의 발행과 친일

 

이처럼 학승이자 포교사로서 불교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김태흡은 1935년 8월에 창간된 친일적 성격의 『불교시보』의 발행을 맡으면서 변절과 시류 영합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창간사에서 “종교 부활·정신 작흥·신앙 고취를 부르짖는 심전개발운동에 기여하는 것”이 『불교시보』의 사명이자 목적임을 밝혔다. 그는 『불교시보』를 1944년 4월까지 펴내면서 총독부가 전시체제 하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추진한 심전개발운동을 적극 선전하였고, 내선일체, 황도불교 등 식민지 통치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글들을 실었다. 이뿐 아니라 대동아 공영권, 학도병 동원 및 국민 총력운동 등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시국강연에 나서면서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1938년 7월에는 일제의 괴뢰정권이 세워진 만주국 봉천 관음사의 주지를 겸하기도 했고, 1945년 만주 지역 사찰을 관리하는 ‘개교 감독’에 임명되었지만 바로 해방을 맞이했다.

 

 

사진 3. 김태흡이 발행한 『불교시보』 창간호.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까지 전시체제기에는 불교계의 자주권 추구 및 혁신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대신 모든 종교와 사회단체를 동원하여 추진된 심전개발운동에 학계와 종교계의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국민총동원에 의한 전쟁 수행과 황민화를 위한 심전개발운동은 천황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체를 각인시키고 감사와 보은의 마음을 갖게 하는 정신계몽운동이었다. 불교계도 개신교, 천주교, 유교 등 다른 종교 및 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시국 강연, 학병 동원, 군수물자 기부 등에 동참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김태흡은 주지 분쟁으로 공석이 된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 주지를 살해하도록 사주했다는 혐의로 8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일로 그는 5년 동안 복역했지만 출소 직후 진범이 잡혀서 누명이 벗겨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그는 대외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저술과 강원에서의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그 외에는 1961년 팔만대장경 번역편찬위원, 1968년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 위원 등 오직 대장경의 한글 번역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는 저술로 『석가여래일대기』(1974), 『신앙의 등불』(1975) 등을 남겼는데, 이 책들은 불교의 교리와 사상, 신앙을 알기 쉽게 쓴 대중 입문서였다. 1989년 4월 13일 서울 상도동 사자암에서 입적했으며 당시 법랍 84세, 세수 91세였다.

 

김태흡은 1920년대에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 지식인이었고, 불교의 역사와 당면한 불교 대중화 및 현대화에 관한 많은 글을 잡지에 실은 학승이었다. 또 불교 포교의 일선에서 뛰며 다양한 장르에 걸쳐 창작 활동을 했던 시대의 선구자였다. 비록 한국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불교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에 깊은 이해를 가지면서 미래의 길을 모색하려 한 개척자였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말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그의 삶과 종교적 지향은 도매금으로 넘어갔고, 세간의 기억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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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 학위 취득(2008). 저서로 『韓國佛敎史』(2017, 東京:春秋社), 『토픽 한국사12』(2016, 여문책),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 법통과 교학전통』(2010, 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및 한문불전 번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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