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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선경仙境과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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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10:21  /   조회3,84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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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선禪 선과 시 10 |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떠가니

이곳은 인간세계가 아닌 

별천지라네”

 

일흔이 넘어서도 작은 배낭을 등에 메고 걸어가는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비가 오는 가운데 왜관읍 석전리 무성그린맨션 앞 주차장에 모여서 비가 그친 다음 호국의 다리를 건너갑니다. 호국의 다리는 6·25 동란 때 폭파됐던 옛날 경부선 철교를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아치형 난간이 없는 부분이 6·25 때 폭파된 부분입니다.

 

호국의 다리를 건너

 

1950년 8월 16일, 왜관 건너편 약목 쪽에 4만의 인민군이 집결했습니다. 그 유명한 B29 폭격기 98대가 그곳에 26분간 960톤의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4만 명의 인민군 가운데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고 대한민국은 살아남았습니다. 낙동강 전선과 다부동 일대는 그런 의미에서 호국의 성지입니다.

 

낙동강변을 걸어갑니다. 이 길은 호젓하고 아름답습니다. 대자연 속으로 걸어가노라면 도시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들이 만들지 않은 대자연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의 세계가 있고 신비로운 삶이 있습니다. 나무도, 풀도, 새도, 물고기도 모두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오직 사람만이 무언가 근심 걱정으로 어두워 보입니다.

 

사진 1. 관호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관호산성으로 올라갑니다. 길에는 낙엽이 쌓여 있어 밟으면 바스락 소리가 납니다. 사람들은 꽃 피는 봄을 좋아하지만 낙엽이 땅에 쌓여 얼어붙는 겨울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낙엽을 밟고 걸어가면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깊은 정감에 젖어듭니다. 【사진 1】 

 
사진 2. 관평루의 원경.


관평루는 해발 86m, 낮은 언덕에 불과하지만 평지에 솟아올라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관평루에 올라 멀리 아득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작은 언덕에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속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자신의 일에 너무 바빠서 알아차릴 겨를이 없는 겁니다. 【사진 2】 

 

왕유의 사슴 키우는 울타리

 

새들은 노래 부르고, 나무들은 수많은 새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햇살은 숲 사이로 스며들어 이끼 위에 떨어집니다. 1300년 전에 이런 농밀한 풍경을 놓치지 않고 노래한 사람이 있습니다.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두런대는 소리만 들리네 

석양빛은 숲 속 깊숙이 들어와 

다시금 푸른 이끼 위에 비치네(주1)

 

시불詩佛이라 불리던 당나라 시인 왕유(699~761)의 시, 〈녹채鹿柴〉입니다. 녹채란 사슴을 키우는 울타리를 말합니다. 녹야원鹿野苑입니다. 그가 만년에 녹채라는 골짜기에서 살면서 석양의 풍광을 노래한 시인데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 속에 석양빛이 스며들어 푸른 이끼 위에 비치는 광경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이런 조용한 풍경은 서둘러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입니다. 

 

 

사진 3. 관평루에서 보이는 낙동강 원경. 

 

왕유가 묘사하는 공산空山, 석양빛[返景], 푸른 이끼[靑苔]는 절묘합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이끼를 들여다봅니다. 푸른 이끼는 왕유가 깨달은 인생의 은유입니다. 그는 자연 속 이끼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 시는 평범한 듯 보이는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낸 선시禪詩이고, 그 경계는 선경仙境입니다. 【사진 3】

 

현재의 풍경을 조용히 관조함으로써 시인은 사라지고 오직 세상을 보는 맑은 눈만 존재합니다. 풍경을 지각하는 사람은 없고 풍경만 존재합니다. 이 시에서 풍경과 시인은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으며, 둘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산은 그처럼 순수하게 ‘본다’는 것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일단 산에 들어가 대자연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자아가 사라져 마음의 안정은 저절로 나타나고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자아自我야말로 행복의 걸림돌입니다. 비록 왕일지라도 자기를 생각하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주2)

 

〈녹채〉가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더 낮은 곳, 평소보다 훨씬 농밀한 세계입니다. 낮은 곳, 공기가 농밀한 그곳에서는 산이며 나무는 물론 이끼마저 온갖 것이 고루 행복한 세계입니다. 

 

복사꽃 피는 이태백의 유토피아

 

왕유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이태백(701~762)은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왜 벽산에 사느냐고 묻는 말에

웃으며 대답하지 않지만 마음은 편안하다네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떠가니

이곳은 인간세계가 아닌 별천지라네(주3)

 

벽산碧山은 허베이성에 있는 산 이름입니다. 이태백은 25세에 집을 떠나 이곳에 10년 정도 머물며 결혼도 하였는데, 이 시는 대체로 30세 전후에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왜 벽산에 파묻혀 처가살이를 하고 있느냐고 누가 물었겠지요. 혹은 그게 마음에 걸려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쓴 시인지도 모릅니다.

 

 

사진 4. 관호산성(신라 토성) 올라가는 길.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는 소이부답笑而不答 네글자에는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은 편안하다고 했지만 어쩌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이어지는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열네 글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 열네 글자로 이태백은 자신이 사는 곳을 단번에 별천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 벽산에 사느냐고? 여기가 바로 유토피아라네.”

이태백은 더 이상 벽산에 묻혀 사는 꾀죄죄한 젊은이가 아니라 별천지에서 노니는 신선이 되는 것입니다. 복사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타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상징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우리들 마음속에도 흐르는 물에 복사꽃이 아련하게 떠가는 모습이 무릉도원처럼 나타납니다.

 

이처럼 자연을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유토피아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관조에 몰입하는 순간, 근심 걱정이 사라진 별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마치 우리들이 직접 별천지에 있는 듯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납니다. 새들은 계속 노래 부르고 꽃은 피었다가 떨어집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이런 찬란한 세계를 들여다보려면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시력視力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맑은 눈을 가진 ‘보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이태백은 우리에게 별천지를 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별천지는 이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만, 일시적이며 쉽게 사라집니다. 우리들 보통사람은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의식하자마자 우리는 다시 근심 걱정으로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홀로 자연과 대면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주변 경치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홀로 있으면 사람들 모습이 쓸쓸하고 음울하며, 서먹서먹하고 적의를 품은 듯이 보입니다.(주4)

 

낙동강 7백리 갈대밭

 

우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짐짓 웃으며 신라시대 토성 유적지를 향해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이 언덕도 98m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정상다운 경치를 보여줍니다. 이런 완만한 언덕을 설렁설렁 올라가는 일, 그것 또한 행복한 일입니다. 신라 토성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절벽을 끼고 내려갑니다. 【사진 4】

 

발목이 푹 빠지도록 낙엽이 쌓여서 하마터면 발목을 삘 뻔하지만, 주변에 친구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경험의 질은 높아지고 정신은 명랑해집니다. 이제야 꽃 피우는 야생화도 있군요. 관호산성과 신라 토성 곳곳에 낙엽 사이로 까마중 하얀 꽃이 별처럼 빛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꽃을 피우는 일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강변으로 나오니 낙동강 700리에서 손꼽히는 갈대밭 군락지가 펼쳐집니다. 갈대밭을 끼고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오토캠핑 중인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갈대밭 사잇길을 걸으면서 마치 세밀한 동판화 사이로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진 5. 낙동강변에서 얼음 밑으로 오는 봄을 느끼며. 

 

강물이 우리들의 눈과 귀에 찰랑이며 부딪칩니다. 생각으로 골치 아파하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유쾌하게 인식하는 데에는 강가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주5) 찰랑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우리는 마음속 잔물결을 응시합니다. 아, 아, 하는 사이에 칠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강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거나 서성입니다. 강물처럼 흘러간 옛날을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소년 소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진5】 

 

강변에 서 있는 왕버들은 수많은 가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산다는 것은 왕버들처럼 멋진 일입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토록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여주는 일이로군요. 14,000보를 걸어 여기에 올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농밀한 하루입니다.

 

주)

1) 『唐詩選』 卷六, 『王右丞文集』 卷四,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2) 파스칼, 『팡세』, 1670.

3) 『李太白集』,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9.

5)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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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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