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향곡스님의 선 법문과 고우스님 화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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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11:09 / 조회5,430회 / 댓글0건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⑤
고우스님은 29세에 기장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 향곡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참선을 시작한 이래 평생 선의 길을 갔다.
향곡스님 선 법문
향곡스님은 결제 중 초하루와 보름에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상당법문을 하시고, 수시로 하는 소참법문도 많이 하셨다. 향곡스님께서는 상당법문을 잘 하셨는데, 그 방식이 좀 거칠었다고 한다. 법문하시다 ‘할’하고 고함지르거나, 주장자를 던지기까지 하셨다. 임제스님도 ‘할喝’을 하셨고, 덕산스님은 ‘방棒’이라 하여 몽둥이질까지 하셨으니 향곡스님이 주장자를 치거나 던지는 법문은 전통적인 선 법문으로 전통을 그대로 하셨다고 볼 수 있다. 법문 내용도 조사 들의 전형적인 법문이었다. 도반 성철스님께서도 고준한 상당법문을 주로 하셨지만 “백일법문” 같은 방편설법도 하셨다. 하지만 향곡스님은 방편은 일체 배제하고 오직 법만 설하셨다.
“누구든지 홀연히 활연대오豁然大悟하면 대법안大法眼을 얻고 천하 노화상의 무궁무진한 법문이 자기 살림이 되어 자유자재하리라. 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이런 법문은 본분종사의 눈을 갖춘 이라야 비로소 바로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향곡스님께서는 현대 선사로는 드물게 본래성불의 선 법문만 하셨다. 부처님의 설법은 흔히 방편설이라 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한다. 그러나 선禪 법문은 손가락과 방편은 배제하고 오직 달과 법 그리고 깨달음의 세계만을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하고 어려워 불교교리를 깊이 공부한 이도 알기 어려운 법문이다. 고우스님도 강원에서 경전과 선어록 공부를 하고 갔지만 향곡스님의 선 법문을 알지 못하여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도인에게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을 듣고는 ‘노장께서 당신한테 공양 잘하라고 하시는 건가?’ 하고 오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뒷날 고우스님도 선에 대한 안목이 서니 향곡스님께서 참으로 고준한 선 법문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년에 고우스님은 향곡스님 법문을 회고하시며 지금은 이런 법문을 하시는 분이 없어 아쉽다고 하셨다.
고우스님의 화두와 화두선의 가치
“마음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이냐?”
갓 선원에 온 고우스님에게 향곡스님께서는 이 화두를 주셨다. 이 화두는 선禪을 천하에 알린 제일공로자인 마조(709~788)스님의 제자 남전(748~834)스님과 백장(720~814)스님 사이의 문답에서 유래하였다. 선종제일서라는 『벽암록』 제28칙에 이 화두가 실려 있다.
백장스님이 남전스님에게 물었다.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서 말하지 않고 간 진리가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인가요?” 하니, 남전스님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닙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화두로 준 것이다. 이 화두는 고우스님이 강원에서 공부한 불교 이론을 한마디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처님 말씀이나 불교교리는 다 옳다거나 그르다는 양변에서 분별심으로 공부하는 것이지만 화두는 그런 분별심을 끊고 삼매를 체험하여 깨달음으로 성취하는 공부다.
고우스님은 29세에 처음 화두를 받은 이래 평생 화두 참선을 하셨다. 중간에 잠깐 화두 공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화두를 바꾸기도 하고, 조사선 초기 회광반조回光返照 공부도 했다. 회광반조는 화두 없이 일종의 관법觀法(위빠사나) 수행으로 오직 내면을 반조하여 본래성불 자리를 관하는 공부다. 하지만 여러 수행 체험 끝에 결국 화두선이 최상승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2012년에 불교인재원이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백일법문』 대강좌를 열었을 때 고우스님은 화두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불교에 대한 정견을 세우고 한다면 어떤 수행법이라도 다 좋다. 꼭 화두 참선이 아니라도 염불, 간경, 위빠사나, 봉사, 보시 등 불교 수행이면 다 좋다. 그중에서도 화두 공부는 가장 빠르다는 특색이 있다. 본래부처가 중생이라는 착각만 깨면 부처로 돌아가는 공부다.
화두에 믿음이 가면 화두 참선이 가장 쉽고 빠르고 편리하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공부할 수 있으니 아주 좋다. 가령 경전 공부는 경전이 있어야 하는데 화두는 아무것이 없어도 집이나 직장에서도 길에서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화두에 대한 믿음이 나야 화두 공부가 된다. 화두가 무엇이고, 화두를 통해서 분별망상을 타파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공부가 된다.
또 화두에 대하여 의심이 나야 한다. 화두 의심이 간절할수록 공부가 잘 되고 빠르다.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불교를 바르게 공부하여 정견을 세우고 수행을 해야 한다. 불교가 무엇이고, 화두가 무엇인지 바른 안목을 갖추고 참선해야 한다. 그러면 화두 참선만큼 공부가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것이 없다. 앞으로 세계적으로 이 화두선이 주목받을 것이다.”
이것은 고우스님께서 평생 화두 참선을 한 끝에 도달한 간단명료한 결론이었다.
1966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하안거를 나다
기장 묘관음사에서 첫 안거를 잘 마친 고우스님은 1966년 봄에 오대산으로 갔다. 용주사 학인 때 월정사 정화를 도우러 처음 가본 뒤 오대산에서 한 철 정진하고 싶은 마음으로 상원사에 갔다. 그런데 뜻밖에 상원사 원주 스님이 양식이 없다며 방부를 받아 주지 않았다. 이때 상원사 선원에 지객으로 있던 법화스님을 처음 만났다(법화스님은 훗날 고우스님과 함께 봉암사 제2결사에 참여한 6비구 중 한 분이다).
방부를 거절당한 고우스님은 지객 법화스님 방에서 같이 자고 다음 날 상원사를 떠나려는데 법화스님도 같이 나가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도반이 된 두 스님은 낙산사로 가니 상원사 동안거 때 입승을 한 현봉스님이 홍련암에서 기도 중이었다. 세 스님은 서로 뜻이 맞아 함께 신흥사로 가서 설악산을 넘어 오세암을 거쳐 백담사로 갔다.
백담사는 지금이야 대찰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법당과 요사 두어 채 밖에 없었다. 주지는 대처승이었는데, 수좌 셋이 오자 대중방을 내어 주었다. 세 스님은 이렇게 백담사에서 며칠 있게 되었는데, 설악산 기운이 청량하고 수행하기 좋아 여름 안거를 백담사에서 정진하기로 했다. 다행히 주지가 양식은 대주었다. 새벽에 일어나 3시에 예불 모시고, 입선 죽비를 친 다음 정진을 시작하여 밤 9시가 되면 방선 죽비를 치고 잠을 자는 일과로 여름 90일 간의 정진을 잘 마쳤다.
오세암 복원을 도모하다 장애를 만나다
30세에 백담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고우스님은 설악산이 좋았다. 함께 안거 정진한 현봉스님이나 법화스님도 설악산에서 더 정진하고 싶어 했다. 직지사 수계 도반인 도윤스님도 설악산에서 다시 만났다. 그래서 오세암에 선원을 복원해서 같이 정진하자고 뜻을 모았다. 오세암은 근세 만해스님이 참선하다 오도한 빼어난 수행처였으나 폐허가 되어 있었다. 현봉스님은 이름 높은 수좌였던 석암스님의 상좌로 은사가 계신 부산으로 화주를 하러 갔다. 그 사이 고우스님과 법화스님은 오세암 복원을 위해 기둥이 될 나무 몇 개를 마을 사람들을 시켜 잘라 놓았다.
사진 5. 설악산 진전사지 3층석탑(국보 제122호)을 둘러보고 계신 고우스님(2013년).
그런데 어느 날 중년 남자들이 백담사에 놀러 와서는 법당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때 객으로 온 한 스님이 그것을 보고 뭐라고 야단을 치자 서로 시비가 붙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신문 기자였다. 이 기자는 그 일로 앙심을 품고는 백담사 주변을 탐문하여 신문에 “스님들이 국유림을 도벌 했다”는 기사를 냈다. 당시에는 산림 정책으로 나무 한 그루라도 손을 대면 큰 처벌을 받는 때였다.
이 일로 형사들이 백담사로 들이닥쳤다. 고우스님이 사태를 파악하고는 당시 군기피자였던 법화스님을 몰래 불러 “지금 경찰이 왔으니 즉시 도망가되, 부산의 현봉스님을 찾아가서 백담사로 오지 말라 해라. 나는 여기 남아서 수습하겠다.”고 말했다. 법화스님은 재빨리 설악산을 넘어 도망을 갔다. 혼자 남은 고우스님은 경찰서에 몇 번이나 불려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당신은 잘 모르는 일이고, 부산으로 간 현봉스님이 오세암을 복원하려는 좋은 뜻으로 한 일이니 선처해 달라고 부탁하여 사태가 수습되었다. 하지만 그 일로 오세암 복원 불사는 중단되고 다시 기장 묘관음사 선원으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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