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선풍을 드날린 봉암사 고승들의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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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11:35 / 조회5,118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7 | 봉암사 ②
864년 신라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지증대사에게 귀의하고 옹주의 영지에 있는 현계산賢溪山(玄溪山) 안락사安樂寺로 옮길 것을 청하여 이에 대사는 안락사에 주석하면서 교화를 펼쳤다. 단의장옹주는 지증대사에게 귀의한 단월檀越로서 시주를 대대적으로 했을 뿐 아니라 남원 실상사實相寺의 수철秀澈화상의 단월이기도 했다. 지증대사는 나중에 불심이 높은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시주한 희양산 중턱에 있는 땅에 새로 절을 짓고 주석하였는데, 881년 헌강왕 7년에 왕이 절의 경계를 정하고 ‘봉암’鳳巖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사진 1】
신라 부도의 대표적 걸작 지증대사적조탑
헌강왕은 중국의 풍속으로 신라의 나쁜 풍속을 없애고 넓은 지혜로 나라를 올바로 다스렸는데, 대사의 높은 도력을 경모하여 왕경으로 간절히 초빙하였다. 대사도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왕경으로 가 월지궁月池宮에서 왕과 마주하고 문답을 주고받았는데, 이때 마음[心]에 관한 왕의 질문에 대하여 “연못에 비친 달[水月]이 바로 마음이니 더 드릴 말씀은 없다”고 하였다.
헌강왕도 이에 계합契合하는 바가 있어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전한 풍류가 실로 이에 합치하는 것이로다[金仙花目 所傳風流 固協於此].”라며 응답하였다. 왕의 곡진한 전송을 받으며 봉암사로 돌아왔다. 대사는 882년에 병으로 안락사로 되돌아갔는데,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증이고, 부도탑의 탑호는 적조寂照였다. 다비를 한 후 1년 뒤에 봉암사에서 장사를 지냈다.
신라의 대문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은 왕의 명을 받아 대사의 문도인 성견性蠲, 민휴敏休, 양부楊孚, 계휘繼徽 화상 등이 정리해 온 행장을 바탕으로 893년경에 탑비의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말미에 있는 사詞에서, 지증대사의 가르침을 두고 북종선이니 남종선이니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쓴 부분이 눈에 띈다.
莫把意樹誤栽植
莫把情田枉稼穡
莫把恒沙論億萬
莫把孤雲定南北
의념의 나무를 심고 기르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이며
욕망의 밭을 가는 헛수고도 하지 말 것이며
갠지즈강 모래를 놓고 억이니 만이니 하지 말 것이며
홀로 뜬 구름지증대사를 남선이니 북선이니 정하지 말 것이다
이 비는 30년 후인 경애왕景哀王(924〜927) 1년인 924년에 분황사芬皇寺 승려인 83세의 혜강慧江(842〜?) 화상이 글씨를 쓰고 새겨 봉암사에 세워졌다. 비신에는 다소의 손상이 있지만 귀부와 이수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2.73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비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비문에 의하여 중국에서 선禪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처음 전한 사람은 법랑화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지증대사가 봉암사에 주석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짧은 기간인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2】 북종선이 신라로 들어온 후에는 왕실과 상층 지배세력들의 지원을 받아 활발하게 번창하였다.
지증대사의 사리탑은 탑비와 나란히 서 있는데, 9세기경에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사각의 지대석 위에 부도탑은 3미터 넘는 장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탑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 신라시대 부도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사진 3】
지증대사의 법손 정진대사탑비
「정진대사탑비靜眞大師塔碑」에 의하면, 긍양화상은 그 족보상으로는 북종선을 이은 지증대사의 법손이 되고 지증대사의 법을 이은 전법제자인 서혈원西穴院의 양부陽孚(楊孚, 揚孚, ?〜917) 화상에게서 공부를 하였다. 효공왕孝恭王(897〜912) 4년(900년)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곡산도연谷山道緣 화상에게서 법을 얻고 25년 동안 운개雲蓋, 동산洞山, 조계산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불교를 공부한 후 경애왕 1년(924년)에 귀국하여 양부화상이 주지로 주석했던 경남 초계의 백엄사伯嚴寺(현 대동사大同寺 또는 백암사지伯巖寺址)를 중창하고 여기에 머물며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그 후 935년에 희양산으로 들어가서 허물어진 봉암사를 더 넓게 중건하고 제자들을 모아 붓다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태조와 혜종·정종·광종의 존경과 믿음을 받았으며, 형초逈超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희양산문의 선풍을 확립시켰다. 왕으로부터 받은 존호는 봉종奉宗 대사와 증공證空 대사로 둘이고 시호가 정진이다. 【사진 4】
그의 비문에는 법계가 밝혀져 있는데, 중국 남종선의 육조대사 혜능慧能(638〜713) 선사의 법손인 마조馬祖(709〜788) 대사의 제자 신감神鑑 선사로부터 법을 받아온 신라의 진감선사 혜소慧昭(774〜850) 화상이 귀국하여 오늘날의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인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한 이후에 지증대사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여기서 양부화상에게 전해지고 다시 양부화상이 긍양화상에게 법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즉 ‘당의 혜능-마조-신감-신라의 혜소-도헌-양부-긍양’의 계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봉암사에 같이 서 있는 「지증대사탑비」에 나와 있는 ‘당의 도신-신라의 법랑-신행지공-신행-준범-혜은-도헌’의 계맥과 다르다.
「정진대사비」의 내용을 평면적으로 보면, 지증대사도 남종선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고, 봉암사는 북종선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고 남종선의 선풍을 펼쳐간 도량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최치원 선생이 말했듯이, 지증대사의 법을 놓고 남종선이니 북종선이니 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보면, 신행화상 이후 남북선이 모두 융합되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진대사가 당나라로 건너가서 석상경저石霜慶諸(807〜888)의 제자인 곡산도연谷山道緣 화상을 찾아가 문답 중에 깨침을 얻고[言下大悟] 25년 동안 중국 전역을 주유하며 선사들을 만나고 온 것을 생각해 보면, 정진대사는 ‘혜능-청원행사靑原行思(?〜740)-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약산유엄藥山惟儼-도오원지道吾圓智-석상경저-곡산도연’ 등으로 이어지는 법을 이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기야 혜능의 전법제자라고 하는 남악회양과 청원행사가 과연 조계혜능의 법을 이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고 보면, 이런 계보를 엄격히 따지는 것도 부정확한 것을 붙잡고 있는 논의일 수 있고, 붓다의 가르침은 한 길인데 남북양종 어느 법을 따르더라도 역대 선사들이 이들의 말을 불변의 철칙鐵則으로 고수했을 리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아무튼 이런 정황을 놓고 보면 정진대사에 와서 남종선으로서의 색이 더 진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법계상으로 쌍계사에 육조영당까지 세운 진감선사 혜소화상을 지증대사 도헌화상 앞에 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증대사가 봉암사에 짧은 기간 주석하였지만, 법계상으로는 희양산문의 초조로 보고 양부화상, 정진대사를 각각 2조, 3조라고 보는 견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보인다.
정진대사의 뒤를 이은 형초선사의 제자 중에 법을 전해 받은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 (930〜1018) 화상이 있었는데, 그는 스승에게서 법을 받고 승과僧科에 합격한 후 955년 중국 오월吳越로 가서 항주杭州 영명사永明寺의 연수延壽(904〜975) 선사로부터 심인心印을 얻고,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 선사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962년에 귀국하여 삼중대사를 지내며 불법을 널리 떨치고 원주의 현계산 거돈사居頓寺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희양산인임을 자처하였다고 한다. 최충崔沖(984〜1068) 선생이 비문을 지은 그의 탑비는 거돈사지에 있고, 부도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사진 5】
영명연수 선사의 스승인 천태덕소天台德韶(891〜972) 선사는 중국에서 전란으로 흩어진 불경들을 고려와 일본에서 구해 오도록 한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훨씬 뒤에 선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보경사寶鏡寺의 원진국사圓眞國師(1171〜1221)도 봉암사에서 동순洞純 화상에게 공부하고 득도하였다. 이런 역사를 보건대, 봉암사는 정진대사 이후 선풍을 선양하며 지금까지 선종의 원천으로 종풍을 날리고 있다.
「정진대사탑비」는 고려 광종光宗(925〜975) 16년 (965년)에 세워졌는데, 「지증대사탑비」와 크기가 똑같다. 고려 성종成宗(981〜997) 때 좌집정左執政을 지낸 당대 문장가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경守兵部卿 이몽유李夢游(?〜?)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한림원翰林院 서박사書博士를 거친 고려의 명필 장단열張端說(?〜?) 선생이 당 태종에게 서법을 가르친 당대의 시인이자 문신인 우세남虞世南(558〜638)체로 썼다. 장단열의 글씨는 당나라의 해서楷書의 제1인자로 평가받는 우세남의 서법의 정수를 얻은 것으로 미려하고 엄정하다. 【사진 6】 「정진대사원오탑」은 탑비와는 떨어져 있는데,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이지만 신라시대의 기본형인 팔각원당형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의 구조는 「지증대사적조탑」을 그대로 따랐으며, 높이는 무려 5미터에 이르는 장중하고 위엄이 있는 부도탑이다.
대웅전이 있는 사역에는 금색전이 옮겨져 있고, 그 앞에 단층 기단 위에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다. 【사진 7】 지증대사탑과 탑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을 지나 옆으로 들어서면 태고선원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위엄 있게 지은 목조 단층건물이다. 좌선을 하다가 주기적으로 일어나 당우를 걸어서 돌 수 있게 처마가 넉넉하다. 수행승들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드문이 산중에서 화두를 잡고 치열하게 정진한다.
「정진대사비」가 서 있는 곳은 본전이 있는 사역과 따로 수행자들이 사는 공간이라 동암이라고 한다. 원래 작은 집 하나 정도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넓은 사역에 규모 있는 당우들이 서 있다. 본전 사역과 동암 사역 사이에는 밭이 있어 수행자들이 직접 채소를 키우고 과일 농사도 짓는다. 백장회해百丈懷海(720〜914) 선사가 청규에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하루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라고 노동을 중시했듯이, 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하지 않는 기간에는 모두 밭에서 노동을 한다.
밭 뒤쪽에 있는 휴휴암休休庵의 옆에는 당대 문장가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1673〜1744) 선생이 비문을 짓고, 조선의 명필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선생이 글씨를 쓴 「상봉대사정원탑비霜峯大師淨源塔碑」가 홀로 서 있다. 상봉대사는 편양파의 법계를 이었고, 박식강기博識强記하여 법을 묻는 자들이 항상 방에 가득 찼다고 한다. 부도는 사리를 나누어 대구 동화사桐華寺, 청주 보살사菩薩寺 등에 세워졌다.
백운계곡 옥석대 마애미륵여래좌상
봉암사 일주문을 지나 절 앞을 따라 뻗쳐 있는 백운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속에 숨겨져 있는 옥석대玉石臺에 이른다. 백운대라고도 하는 이곳은 계곡을 가득 채운 너럭바위 위로 물이 콸콸 흐르는 그 바위 위에 큰 바위들이 앉아 있다. 【사진 9】 여기에 높이가 540c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미륵여래좌상磨崖彌勒如來坐像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풍계명찰楓溪明察(1640〜1708) 화상의 『풍계집楓溪集』에 실려 있는 그의 스승 ‘환적당대사 행장幻寂堂大師 行狀’에 의하면, 환적당 의천義天(1603〜1690) 화상이 1662년에 봉암사에 들어와 수행할 때 발원하여 1663년 현종 4년에 백운대에 이 미륵불을 조성하고, 사적비도 세우고, 환적암幻寂庵도 지었다고 한다.
위에는 깊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얕아지는 부조浮彫로 새긴 것인데, 이 불상은 길상좌吉祥坐를 하고 앉아 있으며, 이마에는 옥이 박혀 있어 햇빛을 받으면 사방으로 반사되고, 미륵불은 수인 가운데 하나인 용화수인龍華手印을 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긴 다발의 꽃가지를 쥐고 있다. 전체 모습에서 구례 화엄사의 영산회괘불탱(1653년)과 같은 17세기 괘불掛佛의 표현 요소를 찾아볼 수 있어 불화와 연관성도 있어 보인다고 한다. 【사진 10】 의천대사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하였는데, 해인사, 용연사龍淵寺, 각화사覺華寺 등 일곱 군데 세워진 사리탑 중의 하나가 득통대사 부도탑 건너편에 있다.
중국 선종의 계보를 보면, 복잡하고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도 알기 어렵지만 혜능대사와 신수대사의 법맥이 갈라지고, 혜능대사가 강남으로 도피하여 15년간 은둔한 후에 조계산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짓고 비로소 입을 열어 선을 펼치기 시작한 때가 677년이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건너간 때가 혜능이 은둔을 시작한 시기이고, 신라로 귀국하여 671년에 낙산사를 창건하고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한 후 본격적으로 화엄종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라의 천재 원효元曉(617〜686) 대사는 그 많은 대승경전들을 재검토하여 정리하고 이에 대하여 연구·분석한 주석과 논문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었다. 그리고는 누구도 정수를 터득하지 못한 『금강경』을 황룡사에서 강론하고, 나중에 신라 유학의 대석학이 되는 설총薛聰(655〜?)을 낳고는 왕실불교를 벗어나 민중불교를 주창하고 온몸으로 무애자재無礙自在하게 실천해 갔다. 중생구제衆生救濟는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 잘 먹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무명無明에서 눈을 뜨게 하는 것이리라. 붓다가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나, 세속에 끌려다니며 욕망의 늪[淫]에서 헤매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이런 일이 벌어졌고, 그 후 수많은 신라의 승려들이 앞다투어 도당 유학의 길을 떠나 그 넓은 중국 땅을 다니며 불법을 공부하고 일부는 목숨을 걸고 인도로 건너가고, 일부는 귀국하여 명산마다 절을 짓고 법을 펼쳐나간 때가 200여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다. 중국에서는 역경에 근거한 교학敎學과 동시에 ‘선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방棒과 할喝이 창천蒼天에 울리고, 인간이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를 붙잡고 죽기 살기로 풀어보려고 한 때였다. 철학이 다시 만개하고, 분화구로 분출된 인간 정신이 이후 지식과 종교로 나누어 장강長江을 이루게 되는 지점이었다. 불교에서 철학과 지식의 부분과 종교의 부분이 있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백운계곡으로 난 산길을 걸으며 이런 생각들을 하였다. 간화선의 방법도 하나의 방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봉암사와 같이 문을 걸어 잠그고 납자들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도량이 전국에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한 사역을 걸어 나오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부신 희양산 백악 아래 태고선원의 장엄한 모습이 눈에 가득 찼다. 【사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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