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추구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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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09:40 / 조회4,330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16 | 김경주金敬注
김경주金敬注(1896~?)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까지 지낸 학승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불교를 연구하는 한편 학문의 대중화를 지향했으며, 〈조선불교와 문화〉 등의 글을 통해 한국불교의 독특한 특성을 발굴해 널리 알렸다.
김경주의 집필활동과 주요활동
다만 193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의 식민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는 등 친일행보를 걷기도 했다. 이처럼 그에게는 분명한 과오도 있었지만, 불교학을 바로 세우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마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김경주는 1896년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어났고 10대 초반인 1908년에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서울에 유학하여 휘문의숙에서 수학했고, 일본 도쿄에 있는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도요대학은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인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가 1887년에 세운 철학관이 그 전신이다. 도요대 재학 시절 조선불교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1921년 여름 방학 때는 청년회에서 조직한 전조선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남 진주의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종교와 문화적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가 불온사상 선전 혐의로 적발되어 구금되는 일을 당했다. 이때 도쿄제대 학생이었던 이영재李英宰와 함께 공판에 붙여졌고, 공산주의 사상을 소개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3년에 김경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범어사 부설 명정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잡지와 신문에 활발히 글을 기고했다. 불교계의 대표적 잡지였던 『불교』에 게재한 글들을 소개하면, 「화엄철학의 내용」(40·42·45호, 1927), 「현하 세계의 불교 대세와 불타 일생의 연대 고찰」(75·77·78호, 1930), 「불타의 성탄을 추억함」(84호, 1931), 「종교의 본질과 철학의 극치」(86호, 1931), 「세계 종교의 정수」(87·88호, 1931), 「불타의 처세훈」(91·93호, 1932), 「불타의 세계관」(96호, 1932), 「승려의 생활 문제」(100호, 1932), 「아육왕과 그의 제자 상부후의 공적」(103호, 1932) 등 다수이다.
또 『신불교』에는 「지나불교의 법난」(22호, 1940), 『금강산』에는 「불교의 특색」(4호, 1935), 「불교의 여성관」(9-10호, 1935)이 실렸다. 이 밖에도 《동아일보》에 〈수송동 각황사: 아육왕과 그의 불교상의 불후의 공적〉(1932. 11. 6), 〈각황사: 불교의 근본 교의〉(1934. 3. 11) 등이 게재되었다.
김경주는 1931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강사가 되었고, 1934년에는 학감을 거쳐 1938년 말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 시기에 중앙불전 교우회에서 내는 『일광』의 발행에도 관여했다. 이 잡지는 1928년 12월 창간호가 나온 이래 1940년 1월의 통권 10호까지 간행되었는데, 편집 겸 발행인은 교장이자 교우회 회장을 맡은 송종헌, 김영수, 박한영, 김경주가 차례로 담당했다.
그런데 총독부의 방침에 의해 중앙불전은 1940년에 혜화 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6월 경성제대 교수 출신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앞서 5월에 열린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임시 이사회에서는 중앙불전 교장 추천과 교명 변경 및 학과 증설에 관한 건을 논의했다. 이때 다카하시가 교장으로 추대되고, 교명은 혜화전문학교로 정했으며, 흥아과를 증설하기로 했다. 다카하시는 교장이 되자마자 박한영, 권상로, 김영수 등 한국인 교수와 강사 상당수를 파면했다. 이때 김경주도 교장을 그만두고 교수직에서도 물러나, 경북 5본산이 공동으로 설립한 5산 불교학교의 교장으로 갔다. 이후 해방을 5개월 앞둔 1945년 3월에 범어사 주지가 되었지만 이후 특기할 만한 행적이 없다.
앞서 1935년 조선총독부가 심전개발운동을 정책적으로 펼치자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심전개발운동은 총독부가 주도해 시작한 정신개조운동으로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한 정신 수양과 계도가 주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김태흡 등 일본 유학생 출신과 중앙불전 학생들도 참여했고, 김경주는 심전개발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매일신보》에 관련 글을 싣기도 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8월 5일에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서울 개운사에서 일본군의 무운과 안전을 기원하는 시국강연회를 열었을 때도,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이 밖에도 여러 시국행사에서 ‘동양 평화와 부동의 정신’, ‘황국 정신 발양에 대하여’ 등의 특강을 했다.
김경주의 불교연구와 내용
그의 불교연구 내용과 성과를 간단히 소개한다. 먼저 일본 유학 시기에 쓰고 1927년 『불교』 잡지에 발표한 「화엄철학의 내용」이다. 도요대학에서 철학과 불교를 공부한 김경주는 화엄학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해석했다. 그는 불교는 마음의 철학이고 화엄은 관념론이라고 규정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 법장의 5교판을 관념론의 발전단계로 이해했다. 또 현상과 실재의 구분을 벗어나 현상이 곧 실재라는 ‘현상즉실재론’을 화엄, 그 중에서도 ‘성기性起’ 사상에 적용했다. 이에 대해 “전통 불교의 일부였던 화엄 사유를 ‘근대적 보편철학’으로 재해석했다.”고 평가한 논문도 있다.
다음으로는 1934년 7월 8일부터 7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불교와 문화〉에 대해 살펴본다. 그는 서론에서 “문화란 것은 주어진 자연의 사실을 일정한 표준에 비추어 지배하고 형성하며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 이상을 실현하려는 과정의 총칭이다.”라고 정의했다. 이어서 “불교는 조선문화의 태양으로 생명과 발전을 주었다. 삼국 이래 조선까지 사회와 문화에서는 불교가 중심이었다.”고 주장하며, 예술과 전적, 한글과 문학, 사상, 음악 풍속 언어 등 일반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불교가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고 보고 있다.
1장 ‘문화유통의 인물과 불교도’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중국과 서역에 유학한 승려들을 기술했다. 고구려의 승랑, 신라의 의상과 원측, 고려의 의천은 물론이고 각훈의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아리야발마, 혜업, 현태 등 인도에 간 유학승들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선진 문화의 유입 통로였던 외국으로의 유학은 승려가 그 효시라고 하면서, 고구려에서 승려 의연을 중국에 파견하여 석존의 일생의 행적을 묻고 배우게 했음을 들었다. 이는 고구려 평원왕이 576년 의연을 중국에 보내 법상에게 부처의 열반과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해가 언제인지 등을 배워오게 한 일을 말한다.
2장 ‘조선의 예술에 대한 불교의 지위’는 주로 석굴암을 다룬 것으로 동서고금의 불교예술이 집대성된 공간이라고 평했다. 3장 ‘조선의 전적과 불교’에서는 원효의 저술, 고려대장경과 활판 기술에 주목했고, 4장 ‘한글과 불교’에서는 가장 완전한 표음문자인 한글의 기원을 실담자, 범서, 이두 등에서 찾고 있다. 5장 ‘조선문학과 불교의 관계’는 불교적 관념을 담은 향가, 본생담이나 불교개념에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 등을 대상으로 문학에 미친 불교의 영향을 간추렸다.
6장 ‘사상, 음악, 풍속, 언어 등과 불교의 관계’는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삶에 불교가 큰 발자취를 남겼다는 내용이다. 7장 ‘불교는 조선에서 완성’에서는 해동종의 개조 원효의 통불교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어 결론에서는 숭불과 배불시대를 구분하여, 불교가 성하면 나라가 영화롭고 문화가 빛나며 황금시대를 열어왔지만, 조선의 경우는 유교적 심리가 사회를 지배하여 활발 미려한 작품이 없고 자유롭고 독창적인 개척적 이상이 결여되었다고 하여 대비시켰다.
1930년에 쓴 「현하 세계의 불교 대세와 불타 일생의 연대 고찰」에서는 한국불교가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원효를 대표로 하는 통일적 불교, 결론적 불교가 완성되었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대승과 소승불교를 관통하는 철학적 조직과 불교학의 대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원효의 통불교와 결론적 불교를 내세운 것은 최남선이 주장한 내용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최남선은 한국의 통불교 전통의 기원으로 원효의 해동종을 내세우면서 인도와 서역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와는 다른 최후의 결론적 불교를 건립하여 종합불교, 통일불교를 구현했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김영수도 원효의 화쟁, 의천과 지눌의 선교융섭, 조선시대의 선과 강경, 염불을 함께 연마하는 통불교 전통을 강조했다. 이처럼 1930년을 전후로 하여 김경주를 비롯한 한국인 학자들 사이에서 통불교 전통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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