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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성철선은 화두 참구로 수미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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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12:19  /   조회3,26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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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모든 가르침은 화두 참구를 전제로 한다. 선승으로서 ‘폐업계를 낸 셈’이라는 선언까지 하면서 시작한 백일법문도 화두 참구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화두 없는 불교 공부는 헛일이므로 “화두 참구 안 하겠다고 하면 이 법문은 아무리 해 봤자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화두가 없다면 그 공부는 ‘신주 없는 헛 제사’이고, ‘배고픈 사람 밥 이야기하기’이며, ‘초상화에 대고 그 사람을 불러대는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간절함으로 들어가는 관문 3천배

 

그렇다면 어떤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 『선문정로』에는 그저 부지런히 화두를 들라는 한결같은 당부만 발견될 뿐이다. 그것이 이미 본격적인 화두 참구에 들어간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법문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스님의 다른 법문들에서 화두 드는 법에 대한 힘 있는 가르침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법문들을 원택스님이 모아 엮은 『성철스님 화두참선법』이라는 책이 나와 있으므로 편리하게 참고할 수 있다. 

 

그럼에도 화두 참구를 해본 경험이 없는 일반 독자들이 지금 당장 『선문정로』에 대한 이해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화두 참구를 바르게 이끄는 몇 가지 요건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성철스님은 화두를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에게 ‘절 돈 3천 원’이라고 표현하는 3천배의 실천을 요구했다. 화두 참구가 수행과 깨달음의 전체 여정을 이끄는 여의봉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화두를 쉽게 주지 않고 3천배의 관문을 설치한 것이다. 왜일까? 

 

모든 일이 그렇지만 불교의 입문과 수행에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죽음의 체험이다. 죽음이 당장 닥쳐온다고 생각해 보라. 육체가 무너지는 이 사건 앞에서 나, 혹은 나의 것이라 생각되던 이런저런 자산들이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과 맞선을 보는 자리에 나가 보면 그토록 중시해 왔던 모든 일이 예외 없이 부차적인 차원으로 물러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로 인해 죽음과 대적할 길을 모색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참선 수행에 투신할 뜻이 세워지는 것이다. 

 

사진 1. 성철대종사 좌상. 해인사 백련암 고심원. 

 

생각해 보면 불교의 성자들에게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목도하는 사건이 있었다. 싯달타 태자가 성 밖에 나갔다가 생사의 무상한 현장을 목격하고 보리심을 낸 일이 그렇고, 3조 승찬스님이 문둥병으로 매일매일 무너지는 자신의 육체를 보며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굳건히 한 일이 그렇다. 성철스님 역시 대원사에서 요양 생활을 하면서 죽음의 도래를 실감하는 시절이 있었다. 성철스님은 당시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들판의 저 화초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건마는, 오직 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아주 가서 몇 천 년의 세월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오는 이 없으니, 우주는 인생의 분묘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라.”

 

이처럼 죽음과 얼굴을 맞대보는 체험이 수행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죽음이 육박해 오는 장면, 혹은 죽음이 이미 나를 먹어버린 상황을 생각해 보는 일이 수행의 순도를 높이는 효과적인 처방이 되기도 한다. 빚쟁이처럼 찾아온 죽음을 맨몸으로 맞이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지금 이 한 번의 화두 참구만이 마지막으로 허락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수행에 임해 간절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다가와 있는 죽음에 눈을 감아 버리거나 자신과 무관한 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이로 인해 불교공부를 한다 해도 자기 숙제가 아니라 객관을 표방하는 공리공론의 놀음이 되고 만다. 오랜 세월 경전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 데도 존재를 전환시키는 신통한 체험이 좀체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참선이 아니라 다른 어떤 세속적 일이라 해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거는 일 없이 그 한계를 돌파하는 성취가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일함에 길든 삶에 갑자기 전 존재를 거는 절실함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천배가 필요하다. 성철스님이 ‘절 돈 3천 원’이라 부른 3천배는 죽음에 대한 절실한 체험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와 유사한 체험을 하는 계기가 된다.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거나, 머리가 좋거나, 용모가 훌륭하거나, 그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3천배를 하다 보면 자기 자존감의 근원이던 모든 것들이 전혀 소용이 없어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 남을 위해 기도하는 3천배가 된다면 자아의 성채를 허무는 효과는 배가 된다. 성철스님이 화두 참구에 들어가기 전에 ‘절 돈 3천 원’의 입장료를 요구했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뭣고?’라는 외마디 질문

 

이렇게 간절함이 마련되었다면 화두를 간택할 때가 온 것이다. 어떤 화두를 어떻게 받으면 좋을까? 가장 좋기로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선지식에게 화두를 받는 일이다. 그런데 6조 혜능스님이 강조한 것처럼 내면의 선지식이 더 영험 있는 법이므로 스스로 화두를 간택하지 못할 일도 없다. 더구나 화두를 드는 일 자체가 그 공안을 내놓은 조사스님과 맞대면하는 일이다. 따라서 화두의 간택에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그런데 마침 우리는 성철스님이라는 현존성 뚜렷한 선지식의 현재진행형 설법을 찾아 듣는 중이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제시한 화두를 받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성철스님은 일반 대중들이나 참선에 입문하는 스님들에게 다음과 같은 화두를 준 일이 있다.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不是心이요 不是物이요 不是佛이니 是甚麼요?

 

우리가 ‘이 뭣고?’라고 부르는 화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반적 화두이다. 성철스님은 이 화두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참구하면 ‘보고 듣는 이것’을 대상화시켜 집중하는 일이 있게 된다. 그런 식이 되면 혹 선정에 들 수는 있겠지만 그로 인해 성성한 화두 의심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스님이 제시하는 다른 또 하나의 ‘이 뭣고’ 화두는 화두를 대상화하는 병폐를 사전에 차단한다. ‘마음도 아니다, 물건도 아니다, 부처도 아니다’와 같이 모든 것을 ‘아니다’로 부정하므로 마음을 붙이거나 화두를 대상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란 말이야.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해야 들여다볼 수도 없고, 경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자꾸 따라갈 수도 없게 되는 거야.”

 

또한 공안의 전후 맥락을 내던지고 오로지 ‘어째서’, ‘이 뭣고?’의 외마디 질문만을 드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야 의심이 치열해져서 금방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요컨대 화두 참구는 외마디 질문을 들고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일이 아니다. 또 화두를 염불처럼 암송하거나 호흡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의심하는 일이어서도 안 된다.

 

당연히 화두를 대상화시켜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방식도 안 된다. 요컨대 논리적 이해, 신통한 해석, 단전호흡의 겸행, 하나에 대한 집중 등과 같은 것들은 성성한 의심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철스님은 제대로 된 화두 참구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어떤 경우라 해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한 성성한 의심이 없다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바른 공부의 길을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 2. 시심마[이뭣고]. 강경구 서. 

 

오직 중요한 것은 ‘어째서?’, ‘이 뭣고?’와 한 몸이 되어 의심을 밀고 나가는 일이다. 화두가 우리 몸의 360개 뼈마디에 맺히고, 8만4천 모공에 남김없이 밴다고 느끼는 것도 힘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두가 사무친 의심이 되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가다가 마침내 우주 법계 전체를 한 덩어리로 꽉 채우게 된다. 나와 대상이 한 덩어리 화두 속에 녹아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화두 참구다. 지금 당장 남김없이 알지 못하고서는 그만둘 수 없다는 마음으로 화두 의심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화두에 대한 묘사가 너무 엄숙한가?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화두 참구는 지금 당장 무심을 실천하여 궁극의 무심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하여 화두 참구는 매 순간 유심의 감옥을 부수는 혁명적 거사를 감행하는 일이 된다. 화두를 들 때마다 우리를 가둔 감옥에 그만큼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화두를 들 때 깨달음의 종자를 뿌리는 일이 일어나고, 화두를 들 때 그것의 배양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일은 지겨운 인내의 연속이 아니다. 진리를 닦는 즐거움에 근심이 사라지고[樂而忘憂], 밥 먹는 일조차 잊는 일[發憤忘食]이 바로 이것이다. 화두를 드는 바로 그 순간 진리와 한 몸으로 만나는 길[徑截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책 보지 말고 모든 경계 내려놓기

 

화두를 선택하여 참구에 들어간 입장이라면 이제 『선문정로』의 본격적인 길 안내를 따라갈 차례다. 그중 먼저 제시되는 길 안내가 “책 보지 마라.”이다. 참선 수행자라면 오로지 화두를 의심하는 길을 걸어 스스로 대답을 내놓아야지 이런저런 책자를 뒤적이며 남의 답을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답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설사 찾았다 해도 진짜 실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와 직접 씨름하여 답을 풀어낸 경우와 자습서를 보고 암기한 경우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습서에 의한 공부는 진짜 실력이 되지 못한다. 잠깐 참고하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그것을 공부의 핵심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참선이 그렇다. 자신의 생과 사를 대적하는 일이므로 스스로 풀어낸 답이라야 하는 것이다. 남의 답을 가지고 나의 생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성철스님이 제시한 또 하나의 요구는 모든 경계를 내려놓는 자세이다. 아무리 뛰어난 경계라 해도 그것에 머무는 일 없이 화두를 밀어붙여 나아가라는 것이다. 설사 숙면일여의 뛰어난 경계라 해도 아낌없이 내려놓고 나아가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가르침이다.

 

“숙면일여란 꿈 없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이다. 숙면일여의 경계가 나타나면 8지 이상의 자재보살인데, 이것조차도 제불 조사들께선 제8마계라 하여 머물고 집착하는 것을 극력 배척하셨다. 그러니 동정일여·몽중일여도 안 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졸음과 잡념은 초심 단계에서 체험하는 역경계다. 숙면일여는 오랜 수행 끝에 찾아오는 어마어마한 순경계다. 역경계는 막고 순경계는 유혹한다. 이 모든 역·순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것이  화두 참구다. 이때 우리의 손에 쥐어진 유일한 무기가 화두이다. 그것이 전체 여정을 뚫고 나가는 여의봉임을 믿고 하루 24시간 화두를 따라 앉고 화두를 따라 눕는 것이다. 망념 중에도 화두, 선정 중에도 화두로 나아가는 것이다. 살아도 화두와 같이 살고, 죽어도 화두와 같이 죽는다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가짐이다. 이렇게 최고의 간절함을 담아 은산철벽을 파고드는 기세로 화두를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 성철선이다. 그 과정에 성철스님의 설법에 감동하여 숙면일여를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망념을 제압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그 어떤 추구나 배제가 일어난다면 바로 그 순간 나와 대상, 망념과 선정을 둘로 나누는 분별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말한다.

 

“‘유무의 무가 아니다.’ 이래 버리면 이 화두가 깨져 버린다 그 말이야. 알겠어? 그러니 유무를 떠나서 조주가 분명히 무라 했는데 어째서 무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해. 조주가 무라 한 이유를 모르니 어떻게 했든지 ‘어째서 무라 했는가?’, ‘어째서 무라 했는가?’ 그렇게 자꾸 해 나가야지, 그 무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서 자꾸 분석하는 식으로 하는 건 좀 덜 좋은 것이야.”

 

확실히 그렇다. 초발심자나 8지보살이나 일체의 분별과 이해를 내려놓고 캄캄하게 모르는 자리에서 오로지 화두 의심으로 수미일관하는 일, 그것이 성철선을 실천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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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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