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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죽미기竹迷記』 비판批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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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5 월 [통권 제109호]  /     /  작성일22-05-04 09:55  /   조회3,89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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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사서史書 17 | 『대둔사지』의 찬술자와 정약용⑤ 

 

『대둔사지』 찬자들의 우리나라 고대불교사에 대한 관심은 당시 유행했던 역사인식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1636년 중관해안이 찬술한 대둔사 사적기인 『죽미기竹迷記』가 대둔사의 창건이나 중건의 사실을 막연한 추측이나 근거 없는 자료를 기초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불교사의 오류를 바로잡다 

 

『대둔사지』 찬자들의 우리나라 고대사와 불교사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는 매우 깊고 광범위했다. 이들은 우선 대흥사가 신라 법흥왕 13년(514)과 진흥왕 때 아도화상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죽미기』의 기록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흥사지』의 찬자 애암兒菴의 지적은 상당히 분석적이다. 

 

사진 1. 『대흥사지』의 『죽미기』부분. 『대흥사지』의 찬자는 『죽미기』의 내용을 비판하였다. 

 

a. “애암이 말하기를 해남은 옛날의 백제 땅으로 백제불교는 침류왕 원년(384)에 시작되었지만 그 후 200여 년 동안 불법이 끊겼다가 법왕 원년(599)에 살생을 금지하는 명을 내리고 현재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운 것이(무왕 35년, 634) 남쪽 땅의 불사佛寺로서는 처음이다. 그러므로 호남의 모든 사찰이 634년 이후에 건립되었다면 대둔사가 그 이전인 514년에 백제 땅에 건립된 것을 믿을 수 있는가?”

 

b. “양梁 천감天監 13년은 백제 무령왕 14년이다. 8량령八良嶺 대간용大幹龍의 서쪽 어느 곳 할 것 없이 신라의 땅이 된 적이 없는데 신라의 법흥왕이 어떻게 남의 나라인 두륜산頭輪山에 절을 지으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먼저 『죽미기』는 대둔사가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왕이 어머니 지소부인只召夫人을 위해 흥륜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둔사지』 찬자들의 주장은 백제불교가 비록 384년에 불법이 시작되었지만, 법왕 원년(599)에 국가적으로 살생을 금지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634년 즉 백제 무왕 35년에 왕흥사를 세운 것이 남쪽 땅의 불우佛宇로서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이때까지 해남은 백제의 영토였는데 514년에 신라 진흥왕이 이곳에 대둔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지적한 것이다.

 

대흥사의 창건주

 

애암은 창건주 아도화상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창건주 아도는 두 명으로,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파견한 아도는 374년에 고구려에 왔고, 또한 사람은 신라 비처왕毘處王(재위 479~499)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신라 모례毛禮의 집에 수년간 머무르다 병이 들어 죽은 고구려의 아도라는 것이다. 애암은 중국의 아도와 대둔사의 창건은 100여 년 이상의 차이가 나며, 비처왕 원년(479)부터 대둔사를 창건했다는 514년까지는 36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의 아도가 대둔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암은 고구려의 아도마저도 신라 모례의 집에 머물다 병들어 죽은 것으로 이해했다. 

 

사진 2. 『죽미기』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대흥사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법흥왕 때 아도 창건설에 대한 부정은 초의草衣에 의해 진흥왕 창건설마저도 부정되었다. 초의는 ‘법흥왕 때만 해도 아도의 뼈가 해를 지났는데 하물며 진흥왕 때까지 남아 있었을까’ 하는 강한 의심을 품는다. 결국 애암과 초의는 대둔사 창건에 대한 『죽미기』와 『여지승람』의 기록을 철저히 부정했다. 그들은 대둔사가 호남의 사찰이 대부분 신라가 통일을 이룩한 후에 창건되었음을 전제로, 660년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의 고을들이 점차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된 신라 말엽쯤 도선道詵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했다.

 

“자장법사가 당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여 원향圓香을 이별하고 신라에 돌아와 대둔大芚·황룡黃龍·태화太和·월정月精 등의 가람을 일시에 중건하였다. 그 후 도선이 당에 들어가 일행一行과 이별하고 신라에 돌아오니 대둔사는 그때 가져 온 동방산수도東方山水圖의 3,800개 비보소裨補所 가운데 점 찍혀진 것이다.”

 

한편 『죽미기』는 자장과 도선이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 대둔사를 중건한 것으로 적고 있다. 찬자 색성賾性은 이에 대해 “자장이 당에서 귀국한 선덕왕 12년(643)은 아직 백제가 멸망하기 전으로 신라승인 자장이 백제 땅에 있는 대둔사를 중건하지 못하며, 이미 신라에는 황룡사가 창건되어 신라의 큰 사찰이 되었고, 진평眞平·선덕왕善德王 때에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강경과 설법을 행했는데 대둔사를 중건했다는 것은 맹랑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초의 또한 도선의 대둔사 중건설에 대해 『불조통재佛祖通載』와 최유청崔惟淸이 찬한 도선의 비문을 기초로 『죽미기』뿐만 아니라 1653년 도갑사道岬寺에 세워진 이경석李景奭의 「도갑사도선비명道岬寺道詵碑銘」과 「도갑고기道岬古記」·『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비판했다. 초의는 일행선사는 725년에 입적했고, 도선은 827년에 태어났다. 일행이 도선에게 말한 ‘아들(왕건)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왕건은 876년에 태어났음을 거론하여 일행과 도선의 만남이나 일행의 왕건 출생에 대한 예언까지도 부정했다. 『대둔사지』 찬자들은 오히려 도선을 대둔사의 창건주로 인정하고 있다. 윤우尹佑는 “신라의 불교가 크게 흥성한 헌강왕憲康王 대에 도선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에 사찰을 건립케 하였을 것 같고, 대둔사도 이때에 창건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찬자들의 『죽미기』 비판은 대둔사가 원효나 의상과의 관련설에도 계속된다. 『죽미기』는 “원효가 대둔사 해회당海會堂에 머물렀으며, 의상은 당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신인神印 스님을 시켜 통도사·화엄사와 함께 대둔사에 밀단密壇을 설치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여 침략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에 대한 찬자들의 전반적인 인식은 “원효와 의상의 흔적이 대둔사에 미치지  않았고 증빙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둔사의 선덕先德으로 추대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초의는 원효와 의상은 문무왕 때의 인물로 이때는 백제가 이미 망했지만 유인궤劉仁軌와 유인원劉仁願이 군사를 이끌고 호남에 머물고 있어 신라 스님이 대둔사에 주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와 당이 군사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이후로, 당은 신라와의 맹약을 깨고 동방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로 660년 백제를 멸한 직후 그 옛 땅에 웅진도독을 두고, 그 밑에 7주 52현을 설치했다. 웅진도독은 유인궤가 임명되어 백제의 옛 땅을 당의 관할에 놓았던 것이다.

 

초의는 또한 『죽미기』에 나타난 원효암과 의상암이 “대둔사에 오랫동안 주석한 노승老僧조차도 모르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의상이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에 대둔사가 들어 있는 사실 또한 당시 해남현이 신라의 땅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죽미기』의 기록을 부정했다.

 

이러한 『대둔사지』 찬자들의 『죽미기』 기록에 대한 비판을 통한 불교사 이해는 권4 『대동선교고』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대동선교고』는 삼국불교의 시말始末에서 일차적으로 『삼국사기』를 기초로 찬술되었지만, 다산의 지적은 적지 않다. 고구려·백제불교 기사가 지나치게 소략함을 지적했고 “서토불사西土佛寺의 창사創寺에 대한 글과 승인僧人의 현화現化한 발자취가 모두 틀리고 어그러져(違舛) 전부를 믿기 어렵다.”고 하여 『삼국사기』 기록 자체에 대해 불신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밖에 다산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때는 『삼국사기』가 표기한 소량蕭梁 때가 아님을 밝혔으며, 374년 고구려로 온 중국의 아도가 479년에 신라로 왔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100여 년 이상의 차이가 있어 잘못되었다.”고 했다.

 

불교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인식

 

이상의 『대둔사지』 찬자들의 지적은 불교사 인식의 차원에서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 고대불교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꼽을 수 있다. 찬자들은 대둔사의 창건과 중건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죽미기』의 내용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해한 고대사와 불교사 지식을 활용한 것이다.

고대 삼국의 불교전래에 대한 사정과 삼국의 정세, 영토와 인물들의 생몰년에 이르기까지 불교사 전반에 걸쳐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찬자들의 이러한 고대사에 대한 폭 넓은 이해는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분석에서 이루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 고대불교사를 복원하고 체계화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둘째, 『삼국사기』의 신라 중심의 불교사 찬술을 비판한 것이다. 다산은 『삼국사기』 불교관계 기사를 기초로 찬술한 고구려·백제·신라 선교의 시말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사 기록이 소략함을 지적했다. 『삼국사기』는 393년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한 이후 100여 년 후인 497년 문자왕 7년에 금강사金剛寺를 처음으로 창건했음을 기록했다. 다산은 이에 대해 100여 년 사이에 사찰을 창건한 사실이 이보다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찬자 김부식이 이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백제도 마찬가지다. 

 

사진 3. 눈 내린 대흥사 풍경. 사진 대흥사. 

 

다산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의 사찰이 두 곳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보이는 삼국의 불교관계 기사는 양과 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객관성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신라는 고구려에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와 불교공인, 흥륜사나 황룡사 기록 그리고 승관제도僧官制度와 진흥왕 이후 중국의 교빙交聘을 통한 구법求法 활동을 기록했다. 다산이 비록 사찰 건립에 국한시켜 김부식의 찬술태도를 비판했지만, 이것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삼국사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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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한국근대불교사론』, 『석전영호대종사』(공저), 『신흥사』(공저)등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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