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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선림원지에서 돌아보는 나말 고승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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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5 월 [통권 제109호]  /     /  작성일22-05-04 10:29  /   조회1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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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9 | 선림원지 ②

 

김의종은 문성왕의 7촌 숙부인데, 그는 당시 원성왕계의 왕자로서 희강왕이 되는 김제륭파金悌隆派와 신무왕神武王(재위 839. 4~7)이 되는 김우징파金祐徵派의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나 836년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11년 1월에 사은사를 겸한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강요된 외유생활을 하다가 이 때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귀국한 후 시중侍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욱화상은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불법을 펼쳐나갔는데, 민애왕閔哀王(재위 838~839), 신무왕,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으로부터 귀의를 받고 존경과 신망을 받아온 대덕大德이었다.

 

신라 왕실의 왕위쟁탈전과 장보고

 

이 당시 신라는 왕위쟁탈전으로 왕실 내에서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고, 임금이 늘 교체되는 혼란을 거듭하며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다. 나라가 망하면 자신들도 없어질 것인데 이런 것을 모르니 왕권을 놓고 사투를 벌인 것이다. 이런 장면은 비단 신라만이 아니라 동서양 역사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이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사진 1. 해상왕 장보고 영정. 

 

신라 42대 왕인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의 사촌 동생인 김균정金均貞과 다른 사촌 동생 김헌정金憲貞의 아들인 김제륭(김균정의 조카)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이 때 시중侍中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인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김제륭을 옹위하고, 아찬 김우징과 그의 조카 김예징金禮徵,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김양金陽은 김균정을 옹위하면서 서로 세력을 형성하여 대대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시기의 왕위쟁탈전은 「김제륭(희강왕)-김명(민애왕)」의 김제륭파와 「김균정-김우징(신무왕) 부자」의 김우징파 사이의 투쟁이었다. 이를 더 올라가면, 원성왕의 아들 중 인겸계仁謙系와 예영계禮英系의 다툼이 이어져 오는 것이고, 좁게는 김인겸의 아들인 김충공金忠恭(민애왕의 아버지), 김헌정, 김균정 가계 사이의 분쟁이었다.

 

이 권력투쟁에서 김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에 맞아 김우징 등과 함께 청해진淸海鎭의 궁복弓福 즉 장보고張保皐(?~846)에게로 도주하여 그에게 의탁하는 것으로 일단의 결말이 났다. 그때까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섬 출신의 사람, 장보고에게 진골세력들이 달려가 그에게 의탁한 것이 그의 군사력 때문이었으니, 이미 왕실의 기반이나 사회의 기반은 균열이 심하게 간 상황이었다. 이 왕위쟁탈전에서 김균정-김우징 세력이 타도된 이후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실질적인 정치의 주도권은 김명과 이홍에게 있었다. 그래서 희강왕에게 불만을 가진 김명은 이홍과 합세하여 다시 난을 일으키고 왕의 측근들을 죽이니 연약한 희강왕은 궁중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김충공의 아들 김명이 21살에 왕좌를 차지하였으니 그가 민애왕이다.

 

왕위를 둘러싼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애왕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김균정계 세력이 힘을 모아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였다. 청해진으로 도주한 김우징 등이 그간 왕실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드디어 이때다 하고는 나섰다. 838년에 그들은 장보고의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해 왕경으로 진격해 왔다. 장보고는 흥덕왕 3년 즉 828년에 해적海賊을 토벌하고자 한다는 청원을 하여 왕의 승낙을 받아내어 지금의 완도莞島인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해상 활동으로 키운 경제력과 함께 1만 명에 달하는 강력한 군사력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군사 단위인 진의 설치는 왕의 승낙은 받은 것이었지만, 그 군사들은 나라의 것이 아니고 장보고 개인의 사병私兵이었다(사진 1). 장보고는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 이후 중앙 왕실의 통제력이 약해진 신라의 국내 정황과 당나라의 안녹산安祿山(703?~757)의 난 이후 당나라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서해를 무대로 하여 신라와 당 사이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장악하면서 그의 개인적 해상세력을 키워 온 인물이다.

 

나중에야 어찌되건 우선 왕좌부터 뺏어야 하는 김우징으로서는 장보고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민애왕을 내쫓고 왕권을 차지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이때 청해진에서는 김양, 염장閻長(閻丈, 閻文 ?~?),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 장수들이 김우징을 옹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장보고는 섬 출신으로 미천한 신분이라 왕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에 왕위쟁탈전에서 내세울 인물은 김우징뿐이었다. 나중에 장보고가 이 한심한 난장판에 자기도 왕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밀어넣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도 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난을 일으켰다. 종당에는 염장에게 잡혀 죽어 황천길로 갔지만 이런 장면은 아직은 나중에 발생하는 일이다. 

 

사진 2. 신라말의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고원 최치원崔致遠 영정. 

 

아무튼 김우징의 세력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왕경을 향하여 쳐들어왔는데, 838년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출병시킨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지금의 나주 부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음 해 1월에 달벌達伐(지금의 대구) 전투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월유댁月遊宅으로 급하게 도망을 갔으나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즉위 3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 싸움으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였고,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왔던 세력들은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한 지 6개월도 못 되어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김경응金慶應이 즉위하여 문성왕이 되었다.

 

김부식金富軾(1075~1151)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민애왕,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된 신무왕이 모두 비운의 황천길을 간 것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북송北宋의 구양수歐陽脩(1007~1073)의 사론을 빌어 불의한 왕이 어떻게 되는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논하였다. 

 

사진 3.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의종을 시중에 각각 임명하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강한 군사력을 가진 장보고를 공신으로 봉하고,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 민애왕의 측근들을 사면한 것은 왕권에 큰 위험요소였다.

 

문성왕 때에도 반란이 그치질 않았다. 841년 문성왕 3에 홍필弘弼의 반란이 있었고, 846년에는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847년에는 양순良順과 흥종興宗이 반란을 일으켰고, 849년에는 사면을 받은 김식과 대흔이 민애왕 측 귀족들의 잔여세력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신무왕-문성왕으로 계승된 균정계의 왕권을 반대하고, 인겸계仁謙系의 왕위계승을 되찾고자 하였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에 청해진은 폐지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겨졌다.

 

도당 유학승과 문성왕의 불교진흥

 

이 당시 당나라에서는 무종武宗(재위 841~846)이 집권하여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말살시키는 ‘회창폐불會昌廢佛’(845~847)을 일으켰다. 중국 땅 전역에서 수많은 사찰의 전각들이 불타고 승려들은 환속되었다. 불경 등 전적들이 화마 속으로 사라지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법난이 자행되었다. 그 옛날 진리를 구하기 위해 인도로 목숨 걸고 가서 가져온 불경을 힘들여 번역한 전적들이 이렇게 사라진다. 미친놈이 왕좌에 앉아 광기의 권력을 휘두르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무종은 문종文宗(재위 827~840)의 이복동생인데 문종과 환관의 싸움에서 문종이 독살되는 와중에 환관宦官 구사량仇士良(781~843)의 책모에 얹혀 왕이 되어 구사량이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다가 겨우 4년 동안 친정을 하면서 도교의 도사들이 주는 불사의 단약丹藥을 받아먹다가 중독으로 5년 만에 33살로 죽었다. 미친놈인 것은 분명하다!! 귀와 눈 이외에 입도 씻어야겠지만, 이 말은 피해갈 수 없다. 불법佛法 이야기에 이런 장면이 끼어들다니…… 나무관세음보살!

 

그런데 이런 법난法亂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선종에 있어서는 사찰의 전각이나 전적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별로 없었다. 중국 전역의 선승들을 색출하여 잡아 죽이지 않는 한 불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대에 선의 황금시대를 열어간 임제의현臨濟義玄(?~867),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황벽희운黃蘗希雲(?~?), 위산영우潙山靈祐(771~853), 조주종심趙州從諗(778`~897), 덕산선감德山宣鑑(780~865), 앙산혜적仰山慧寂(814~890),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 운거도응雲居道膺(835?~902) 등 선풍을 드날린 선장禪匠들이 대거 배출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며’ 천하에 큰 바람을 일으키는 역사가 펼쳐졌다. 신라의 도의道義(?~?, 도당유학: 784~821), 혜철慧徹(785~861, 도당유학: 814~839), 현욱, 도윤道允(798~868, 도당유학: 825~847), 무염無染(800~888, 도당유학: 821?~845) 화상 등이 당나라에서 선법을 배워와 선풍을 펼쳐간 시기가 이때였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문성왕은 불교진흥에 관심을 가졌는데, 851년 당나라에 갔던 사신 아찬 원홍元弘이 불경佛經과 부처의 치아사리를 가지고 왔을 때 왕은 교외에 나가 이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857년 문성왕은 숙부이자 신무왕의 이복동생인 의정誼靖(祐靖)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사망하였다. 김균정의 아들인 의정이 곧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이 되면서 균정계의 왕위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사진 4. 홍각선사탑비 두전.

 

헌안왕도 병으로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희강왕의 손자이기도 한 맏사위 김응렴金膺廉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 김응렴이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이다. 헌안왕대에 와서 균정계에서 후손이 끊어져 제륭계가 왕이 된 셈이다. 제륭계이든 균정계이든 이들은 모두 원성왕계의 후손들인데, 원성왕계가 왕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것은 내물왕계인 선덕왕宣德王(재위 780~785)이 죽고 후사가 없는 상황을 이용하여 내물왕계이자 상대등上大等인 김경신金敬信이 무열왕계인 김주원金周元(오늘날 강릉김씨 시조)을 배제하고 원성왕에 즉위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왕위계승의 큰 그림에서 보면, 신라에서는 이로부터 무열왕계의 왕위계승은 종말을 고하였고, 내물왕계의 왕위가 이어졌다.

 

경문왕은 화랑花郞의 국선國仙 출신으로 낭도郎徒들의 지지가 강했고, 동생인 각간 위홍魏弘의 도움을 받아 불교와 국학에 열성을 가지고 나라를 제대로 통치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모반이 끊이지 않았고 진골귀족들 간의 고질적인 분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가 죽자 큰아들이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둘째아들이 정강왕에 즉위하고 딸이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으로 혈족들이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실의 혈통을 계속 지키려고 하였지만, 결국 신라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신라의 외로운 구름, 고운 최치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이 경문왕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헌강왕 때 귀국하여 신라를 살려보려고 진성여왕에게 국가개혁안을 올리는 등 고군분투하던 때가 이 시절이다. 결국 그는 진성여왕이 효공왕孝恭王(재위 897~912)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사태를 눈으로 보고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양위표讓位表」를 황제의 신하로 칭해야 하는 여왕을 대신하여 짓는 일을 당하고는 무너져 가는 신라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과 실의에 빠져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천하에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시절을 만나지 못하니 그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의 종적을 알 수 없어 후세 사람들은 그가 신선神仙이 되었다고 했다(사진 2). 

최치원 선생이 진성여왕을 대신하여 지은 장문의 「양위표」의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다. 

 

“신모는 아룁니다. 신이 듣건대, ‘원하되 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공문의 제자들에게 전한 가르침이고, ‘덕은 사양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라는 말은 진晉나라 사신이 전한 잠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구차하게 자리를 빼앗아 편안을 누리게 되면 현인의 길을 막은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臣某言. 臣聞欲而不貪. 駕說於孔門弟子. 德莫若讓. 騰規於晉國行人. 苟竊位自安. 則妨賢是責].”

 

그 마지막은 이렇다.

 

“신은 매번 저의 역량을 헤아려보며 행할 것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물러나기로 하였습니다. 아무 때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광화狂花 같아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깎을 수 없고 새길 수도 없는 말라빠진 나무[朽木]로나마 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황상의 은혜를 헛되이 받게 하지 말고, 자리가 적임자에게 돌아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동방을 살피시는 황상의 걱정을 나누어 지는 직을 이미 등졌기에 서쪽 중국으로 돌아가는 시를 속절없이 읊을 뿐입니다. 삼가 본국의 하정사賀正使 모관某官이 입조하는 편에 양위하는 표를 함께 보내 아뢰는 바입니다[臣每思量力而行. 輒遂奉身而退. 自開自落。竊媿狂花. 匪劉匪雕. 聊全朽木. 所顗恩無虛受. 位得實歸. 旣睽分東顧之憂. 空切咏西歸之什. 謹因當國賀正使某官入朝. 附表陳讓以聞.].”

 

젊어 타국 땅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공부하고 모국 신라로 돌아와 나라에 헌신하고자 한 것이 결국 망국의 황혼에 서서 이런 양위표를 짓는 것으로 끝난다는 말인가! 정녕 하늘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산 속 깊은 곳일지도 모르고 망망대해茫茫大海가 펼쳐진 바닷가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홀로 마지막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되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죽음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일 뿐[死也一片浮雲滅]’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외로운 구름孤雲’이 흩어지던 장면일지도…

 

898년 효공왕이 된 헌강왕의 서자인 김요金嶢는 궁예가 나라를 세우고 힘이 날로 강해 가는 와중에 비천한 첩 은영殷影에게 빠져 헤매다가 아들 없이 4년 만에 죽었다. 이어 망해 가는 신라 정치권의 실세인 예겸乂兼(銳謙)의 의붓아들이자 옛날 박씨 왕의 마지막 왕인 아달라왕阿達羅王(재위 154~184)의 후손이라고 하는 박경휘朴景暉가 신덕왕神德王(재위 912~917)이 되었다. 박씨가 다시 왕권을 차지했다. 예겸은 이미 딸을 효공왕의 왕비로 들여보냈다. 

 

사진 5. 홍각선사탑비 전면.
 

궁예弓裔(869?~918)와 견훤甄萱(867~936)이 세력 싸움을 하는 와중에 신라는 왕경 주변 지역을 유지하기에도 힘들었는데, 그도 5년 만에 죽었다.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朴昇英이 경명왕景明王(재위 917~924)이 되었지만 비틀거리는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없어 왕건과 우호관계를 맺고 명맥만 부지하다가 7년 만에 죽었다. 이때는 왕건이 세력권을 넓혀 가고 있었다.

경명왕의 동생인 박위응朴魏膺이 이어 왕이 되니 경애왕景哀王(재위 924~927)인데, 사실상 왕건에게 의존하여 왕좌를 유지하다가 남산 아래 포석정鮑石亭에서 견훤의 공격을 받고 3년 만에 저승길로 간 비운의 인물이다. 다시 왕의 모계 쪽 인물인 김부金傅가 왕이 되니,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이다. 

 

사진 6. 홍각선사탑비 후면. 

 

그 기간에 왕건이 견훤을 토벌하자 신라의 여러 주군들이 모두 왕건에게 항복하고 결국 경순왕도 임해전臨海殿에서 왕건을 만나 공식적으로 항복을 하였다. 그 후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상위로 예우하고 봉록도 주었으며, 그의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경순왕과 결혼시키고 신라의 관원들과 장수들도 등용하고 신라를 ‘경주慶州’로 고쳐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 꼴을 본 큰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는 피눈물을 흘리며 금강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고, 셋째 아들은 세상을 버리고 화엄사로 들어가 범공梵空이라는 이름으로 승려가 되었다. 이렇게 내리막을 달리던 신라의 달밤에 눈물 흩뿌리던 최치원 선생의 지팡이는 어디로 향하고 있었나? 그가 해인사로 들어갔다는 것이 문헌상 남아 있는 마지막 흔적이지만, 그 이후 고운사孤雲寺로 갔다든지, 쌍계사雙磎寺로 갔다든지 하며 구전으로만 전해 온다. 마침내는 고운선

생이 도교의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망국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던 가슴 아픈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이리라.

 

홍각선사와 억성사의 전성기

 

현욱대사는 이러한 왕위쟁탈이 벌어지던 신라 하대의 혼란한 시절에 살았는데, 840년(문성왕 2)에 왕의 요청으로 혜목산으로 거처를 옮겨 종풍을 크게 날리다가 경문왕 9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그에게 원감圓鑑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법을 이은 전법제자인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855~923) 화상이 창원에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선풍을 드높이니 바로 봉림산문이다(사진 3). 그리하여 원감대사는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되고 심희화상과 그 제자들이 펼친 종풍을 봉림산파鳳林山派라고 한다. 아마도 고달사 현욱화상 밑에서 홍각선사와 심희화상이 모두 공부하였지만 55세인 홍각선사보다는 15세인 심희화상에게로 법을 전하여 그 맥을 있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7. 저수량 「안탑성교서」. 

 

홍각선사는 이러한 시기에 활동을 하다가 873년(경문왕 13)에 다시 억성사로 와 법당과 당우들을 건립하고 불법을 전파하였다. 873년은 9층의 황룡사 탑이 완공된 해이기도 하다. 그가 억성사로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왕도 그의 높은 덕을 경모하여 왕경으로 초빙하였고, 선사는 궁궐로 가 열흘 동안 임금을 상대로 설법도 하고 마음도 나누었다. 왕의 귀한 전송을 받으며 절로 돌아왔다. 7년간 억성사에 주석하다가 880년(헌강왕 6)에 법납 50세로 입적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억성사의 전성기는 홍각선사가 주석하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현재 서 있는 홍각선사탑비는 비신을 새로 만들어 복원된 것인데,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비신은 조선시대 때 파손되어 파편만 남아 있어 현재 국립춘천박물관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귀부는 거북머리가 아니고 용의 머리로 되어 있고 이수에는 구름과 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탑비는 귀부의 조각이 손상됨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그 조각의 섬세함은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비문은 보림사寶林寺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를 쓴 수병부낭중守兵部郎中 김원金薳이 지었다. 두전頭篆에는 ‘홍각선사비명’이라고 새겨져 있고(사진 4), 비문은 운철雲徹 화상이 왕희지王羲之(307~365)의 글씨를 집자集子하고 보덕사報德寺 혜강慧江 화상이 새겼다(사진 5, 6). 

 


사진 8. 왕희지 「집자성교서」.

 

신라시대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비문의 글에 맞게 배치하여 새긴 것이 적지 않다. 사실 서성書聖이라고 부르는 왕희지이지만 그의 진적眞蹟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왕희지의 글씨는 그의 글씨를 보고 명필들이 다시 베껴 쓴 것이거나 아니면 왕희지의 글씨를 새긴 비를 탁본한 것이다.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고 하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도 왕희지의 글씨를 제일 좋아하여 모았다는 당 태종太宗(재위 626~649)이 죽으면서 무덤에 같이 묻었다는 설화가 있을 뿐이고, 지금 전하는 것은 우세남虞世南(558~638), 저수량, 풍승소馮承素, 조맹부趙孟頫(1254~1322) 등 명필들이 베껴 쓴 모본摹本이나 임본臨本이다. 왕희지 행서의 표준으로 삼는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이는 현장玄奘(602?~664) 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를 번역하여 태종에게 바치자 왕이 이를 치하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라는 글인데, 처음에는 저수량楮遂良(596~658)이 해서楷書로 이를 써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라고 하였다(사진 7). 

 

그 다음에 당 고종高宗(재위 649~683) 때에 장안의 홍복사弘福寺 승려인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비로 만들어 홍복사 경내에 세웠는데, 이를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라고 부른다(사진 8). 이 비는 현재 서안비림西安碑林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명필 김생金生(711~?)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으로 새긴 경우가 있다. 최치원 선생의 사촌 동생인 최인연崔仁渷(崔彦撝=崔愼之, 868~944) 선생이 지은 태자사太子寺의 「낭공대사백월서운지탑비명郎空大師白月栖雲之塔碑銘」을 단목端目 화상이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낭공대사비가 그 한 예이다(사진 9).

 


사진 9. 김생 글씨를 집자한 낭공대사비.

 

홍각선사의 제자로는 범룡梵龍 화상과 사의使義 화상 등이 있었다. 시호는 홍각이고 탑호는 선감지탑禪鑒之塔이다. 도의대사가 선법을 펼칠 때 중앙에서 워낙 반발이 심하여 설악산에서 조용히 제자들에게 전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염거대사가 억성사에 머물 때 많은 수행자들이 그를 찾아왔고, 홍각선사와 체징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그 문하에서 활동한 것과 홍각선사가 주석할 때 왕의 초청을 받은 일까지 고려해 보면 어쩌면 그 시절 억성사가 선법을 펼치는 중심지로 활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골짜기까지 찾아오면서 글로 남기는 것은 어느 시대나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인간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골짜기 바람이 실로 소쇄瀟灑하여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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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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