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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마의태자의 전설이 깃든 태자산 태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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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10:29  /   조회2,60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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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0 | 태자사지 ①

 

추운 겨울 내내 얼어 있던 계곡에 얼음이 풀리며 물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아직은 연초록 새잎들이 나오기 전에 산은 옅은 보랏빛 자운紫雲으로 아스름하게 감싸인다. 물론 겨울을 이겨낸 매화가 먼저 봄이 오는 것을 알리기도 하지만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 보랏빛 기운이 감돌면 멀리서부터 봄의 생명소리가 들려온다.  

 

대현들의 발자취가 서린 청량산

 

경북 북부지역 청량동淸凉洞에서 들어가는 청량산淸凉山의 모습도 그렇다. 청량산이라고 하면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리기도 한 산인데, 신라시대 이래 원효元曉(617~686) 대사와 의상義湘(625~702) 대사와 관련한 사찰이 여럿 있었고, 최치원 선생이 글을 읽고 바둑을 즐기곤 했던 치원암致遠庵, 풍혈대風穴臺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 등의 학문과 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는 대현大賢의 산이다.

 


사진 1. 태자산 태자사터의 현재 모습.

 

일찍이 금강산金剛山,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 가야산伽倻山, 금산錦山 등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답사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 선생이 1544년에 이 산을 유람한 이후 그 유명한 유산록遊山錄을 남겼는데(『遊淸凉山錄』), 그 글이 워낙 명문이라 젊은 시절부터 이 산에서 공부하고 빈번히 다녔던 퇴계 선생도 신재 선생의 글에 발문(「周景遊淸凉山錄跋」)만 남겼을 뿐 따로 유산록을 남기지 않았을 정도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 대현의 산

을 성지 순례를 하듯이 찾았고, 많은 이들이 청량산과 도산陶山을 방문한 기행문을 남겼다.

 

마의태자가 지나간 태자산

 

이 청량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농암 선생과 퇴계 선생 그리고 그 집안의 사람들이 소시少時에 글공부를 하던 용수사龍壽寺가 터잡고 있던 용두산龍頭山이 있고, 그 산에 있는 용두고개[龍頭峴]를 넘어가면 태자사太子寺가 있었던 태자산太子山이 우뚝 서 있다.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태자산에 태자사가 있다.[太子寺在太子山]”고 한 그곳이다. 태자산에 세워져서 태자산사太子山寺로 불렸고, 나중에는 태자원太子院으로도 불렸다. 

 

사진 2. 태자사터에 있는 귀부와 이수.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 속해 있지만, 고려 초기부터는 길주吉州라고 하다가 명종明宗(1545~1567) 이후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면서 일본식민지시기까지도 봉화현奉化縣에 속했다. 1407년 태종 7년에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1338~1423) 선생이 전국의 사찰들 중 주요 사찰 지정을 왕에게 요청하며 태자사를 그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태자사는 중요한 가람이었던 것 같다.

 

이 태자사에 그 유명한 「낭공대사탑비朗空大師碑」가 서 있었다. 기울어져 가던 신라에서 법을 펼치며 굴산선문崛山禪門의 불꽃을 크게 일으킨 낭공대사 행적行寂(832~916, 도당유학: 870~885) 화상을 찾아 나선 발걸음이 마지막에 여기에 다다랐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태자사는 없고 동네의 이름에만 그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太子里가 그곳이다. 

 

‘태자리’나 ‘태자산’이나 그 이름에는 신라가 망하고 경순왕의 맏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태자사가 있었던 곳에는 폐교된 태자초등학교의 텅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사역에는 그 옛날 태자사에 있었던 어느 고승의 탑비에서 남은 귀부와 이수만 부근에 나뒹굴다가 수습되어 민가 옆에 있는데, 그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행적화상 낭공대사의 행적

 

행적화상의 일대기는 최인연崔仁渷(=崔愼之=崔彦撝, 868~944) 선생이 비문을 지은 「낭공대사탑비」에 전한다. 

행적화상의 성은 최崔씨로 신라 육부촌六部村을 형성한 이李, 최, 손孫, 정鄭, 배裴, 설薛씨 가운데 하나이다. 그 조상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스승인 강태공(姜呂尙, ?~?)이 세운 제齊나라의 정공丁公(BC 1014~976), 즉 강태공의 아들인 강여급姜呂伋(BC 1156?~1017?)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그 후손 중 한 사람이 한漢 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즉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眞蕃, 현도玄菟 가운데 현도군에 사신으로 왔다가 신라로 와서 머물러 살게 되면서 신라 사람이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무예를 익혀 군대에서 직을 맡았고 어머니는 설薛씨였다고 한다. 원효대사도 설씨이다.

 


사진 3. 낭공대사탑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한사군은 한의 전성기를 장식한 무제武帝(劉撤, BC 156?~141)가 기원전 108년에 동북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위만조선衛滿朝鮮, 즉 고조선을 공격하여 왕검성王儉城 전투로 멸망시키고, 그 점령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네 개로 분할한 지방 행정구역이었다. 이때는 이미 한무제가 흉노를 공격하여 서역 지역과 실크로드를 확보하고 남쪽으로 지금의 베트남 지역까지 정복한 후 마지막으로 남은 동쪽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고조선을 공격한 것이었다.

 

행적화상은 이렇게 중국 주나라 강씨의 후손으로 신라에서 최씨로 살아온 집단의 후손이었다. 이러한 신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대사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모든 것에 의문을 두고 탐구하다가 출가를 결심하고 여러 산문의 고승 대덕을 찾아 배움을 구하고,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경』 등 불경을 공부한 다음, 855년 문성왕文聖王(839~857) 17년에 복천사福泉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오늘날 강릉인 명주溟州에 있는 굴산사崛山寺의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梵日(810~889, 도당 유학: 831~847) 화상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년 동안 수행하고, 운수행각을 나서 진리 탐구에 진력을 하다가 드디어 870년 경문왕景文王(861~875) 10년에 조공사朝貢使로 당나라로 들어가는 김긴영金緊榮의 허락을 얻어 그를 따라 당나라로 건너갔다.

 

청원행사의 법을 신라에 처음 가져와

 

그는 당나라 서쪽 해안에 도착하여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곳에서 황제의 허락을 얻어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머물렀다. 얼마 뒤 당나라 의종毅宗(833~873)의 생일에 칙명을 받고 입궐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황제가 “멀리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은 필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받고 “대국을 두루 다니며 사람 사는 것을 보고 불도를 널리 공부한 후 신라로 가서 불법을 세우려고 합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를 계기로 황제는 행적화상을 좋게 보고 두터운 신임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뒤 오대산五臺山 화엄사華嚴寺로 가서 문수보살에게 감응을 구하고자 중대中臺에 올랐는데, 이때 홀연히 신인神人을 만나 “남방으로 가면 담마의 비[曇摩之雨]에 목욕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정례頂禮한 후 남쪽으로 갔다.

 

행적화상은 875년 헌강왕憲康王(875~886) 1년에 성도成都의 정중정사靜(淨)衆精舍 즉 정중사靜(淨)衆寺에 가서 신라 성덕왕聖德王(702`~737)의 아들로 출가한 무상無相(684~762) 대사의 영당影堂에 예배하고, 다시 청원행사靑原行思(?~740) 선사 문하의 석상경저石霜慶諸(807~888) 선사에게서 불법을 듣고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후 남악 형산衡山으로 내려가 그 일대를 주유하며 선지식善知識을 참방하였다. 신라 사람으로 청원선사의 법을 이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얼마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신라에서 온 도의道義(?~?, 도당 유학: 784~821), 홍척洪陟(=洪直, ?~?, 도당 유학: 810~826), 혜철惠哲(=慧徹, 785~861) 화상 등은 모두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선사 문하에서, 혜소慧昭(774~850, 도당 유학: 804~830) 화상은 창주신감滄州神鑑 선사 문하에서, 현욱玄昱(787~868 도당 유학: 824~837) 화상은 장경회휘章敬懷暉 선사 문하에서, 도윤道允(798~868, 도당 유학: 825~847) 화상은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선사 문하에서, 무염無染(800~888, 도당 유학: 821~845) 화상은 마곡보철麻谷寶徹(?~?) 선사 문하에서, 각각 선법을 공부하고 그 맥을 이어받아 신라로 돌아가 선문을 열었다. 이들이 배운 중국의 스승들은 모두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 선사의 뛰어난 전법 제자들이었다. 혜능대사의 양대 제자로는 청원선사와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 선사가 있었는데, 마조선사는 이 남악선사의 전법 제자이다.

 

무상대사는 속성俗姓이 김씨라서 김화상金和尙으로도 불렸는데, 홍인弘忍(601~674) 대사의 문하에서 혜능대사와 함께 사천四川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자주資州 덕순사德純寺의 지선智詵(609~702) 선사를 배알하고, 그의 법을 이은 처적處寂(665~732) 선사와 함께 이 지역에서 크게 선법을 펼치며 활동한 인물이다. 처적선사가 입적한 후에는 무상대사의 선맥이 정중종靜衆宗이라고 불릴 만큼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향을 피우고 염불과 좌선을 수행방법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의 선법禪法은 티벳에도 전파되었다. 마조선사도 젊었을 때 처적선사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행적화상은 그 뒤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고 조계산曹溪山에 들러 혜능慧能(638~713) 선사의 유골을 봉안한 육조탑六祖塔을 참배하였다. 이 당시에 수행하는 운수납자들은 어느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넓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사찰과 선원을 찾아다니며 선지식에게 법을 공부하고 법거량을 하였다. 중국에서 선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시기에 당나라로 간 적지 않은 신라의 도당유학승들은 이렇게 여러 지역을 찾아다닌 후 육조탑을 참배하고 돌아오고는 했는데, 중국 선가禪家에서는 무상대사의 명성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정중사를 참방하고 무상대사의 영당에 참배하는 것은 행각수행을 하던 도당유학승들에게는 필수 코스였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불경을 등에 지고 운수행각을 하며 수행하는 구법승의 그림이 있는데, 어쩌면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4. 불경을 짊어지고 있는 구법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당시에는 남종선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혜능선사가 남종선의 종주로 추앙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하택종荷澤宗으로 중원지역을 풍미한 하택신회荷澤神會(684~758) 선사의 영향권 내에서 재구성된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옥천신수玉泉神秀(?~706) 화상이 혜능선사에 비하여 수준 이하로 그려져 있지만, 신수대사는 5조 홍인대사 이후 4조 도신道信(580~651)과 5조의 법문인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이은 6조로 존숭되었고, 불교에 의탁하여 황제의 지위를 차지한 측천무후則天武后(684~705)의 황실과 귀족들로부터도 초빙이 되고 높은 존경을 받았다. 물론 이 시기 이후에 혜능선사는 그를 가해하려는 사람들을 피하여 사조원四祖院과 오조원五祖院이 있는 황매현黃梅縣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15년간 은거하며 지냈다고 전한다. 

 

귀국 후 굴산문 부활에 헌신

 

행적화상은 885년 헌강왕 11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굴산사를 찾아가 통효대사를 다시 뵙고 가까이에서 모시며 수행하기도 했고, 경주의 천주사天柱寺와 남쪽의 수정사水精寺에 주석하기도 했다. 통효대사가 병으로 눕자 다시 굴산사로 돌아와 입적할 때까지 병시중을 하고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런 후에 지금의 춘천인 삭주朔州에 있는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주석하며 띠집을 고쳐 산문을 여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진성여왕 시대를 거치면서 곳곳에 일어난 반란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암곡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경주에 머물기도 하다가 삭주로 돌아오곤 했다. 건녕乾寧(894~897) 초기에는 왕성에 머물렀고, 광화光化(898~900) 말에는 야군野郡으로 돌아갔다.

 

효공왕孝恭王(897~912)은 선종禪宗을 중시하여 승정僧正인 법현法賢 화상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초빙하였는데, 906년에 제자 행겸行謙, 수안邃安, 신종信宗, 양규讓規 화상 등과 함께 왕경으로 가서 법문을 하니 왕은 그를 국사國師의 예로 대우하였다. 신덕왕神德王(912~917)도 그를 국사로 삼고 915년에 남산에 있는 실제사實際寺에 주석하게 했다. 실제사는 진흥왕眞興

王(540~576) 22년인 566년에 창건되었는데, 신덕왕이 왕자로 있을 때 선방으로 사용한 적이 있어 이를 행적선사에게 주어 주석하도록 하고 왕도 법문을 듣고는 했다. 이처럼 낭공대사는 효공왕과 신덕왕에 이러 양조국사兩朝國師로 존숭되었다.

 

그 후 신라 명문 집안의 여제자인 명요부인明瑤夫人이 자신이 마련한 석남산사石南山寺로 가서 주지를 맡아 줄 것을 청하여 이를 허락하고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그곳으로 가서 주석하다가 916년에 85세로 입적하니 승납 61세였다. 석남산의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모셨다가 3년째인 918년 11월에 정식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 석남산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언양 석남사인지 아니면 경주와 가까운 다른 곳인지, 아니면 태자사를 말하는 것인지 등등 여러 의문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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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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