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30여일 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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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11:40 / 조회4,759회 / 댓글0건본문
다비 및 탑 건립비는 주고 가마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원융圓融 사형님은 성철스님의 상좌답게 “이오위칙以悟爲則을 명심하면서 절대로 화두話頭를 놓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세수 82세, 법랍 48년을 일기로 원적에 드셨습니다. 문도와 제자들은 물론 해인총림 대중스님들이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사형님의 영결식과 다비를 여법하게 잘 치뤘습니다. 그 후 제 맏상좌인 일봉日峰 스님이 해인총림 선원의 입승立繩 소임을 맡았다고 하며 인사차 백련암에 올라왔습니다. 맏상좌의 3배를 받으며 소납은 그동안 맘속으로만 생각해 오던것을 이참에 다짐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차 한 잔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너희 노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나에게 남겨 주신 것이라곤 장경각藏經閣의 책들과 검정 고무신 한 켤레, 주목 지팡이, 다 해질 대로 해진 누더기 한 벌뿐이었다, 어느 문중의 어른처럼 예금통장과 금고 열쇠는 흔적조차 없었다. 듣자 하니 이번에 원융 사형님의 영결식 및 다비, 사리탑과 탑비 건립에 솔찬히 비용이 들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나도 그 정도 비용만 주고 행여 남는 게 있다면 불사佛事에 다 쓰고 가련다. 모름지기 절의 재산은 신도들의 정성 어린 신심으로 이루어진 보시布施가 원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게다. 그걸 모아서 상좌들에게 주고 가면 불사는커녕 분란만 일어나 망신만 당하고 마는 게 흔한 일이 되고 있지 않느냐.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일봉스님은 나보다 더 신심 있고 기도도 잘 하니 백련암 신도들의 지지를 받아서 더 잘 살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스님, 스님이 떠나시면 당장 돈이 없으니 최소한 다비와 사리탑 건립비는 주고 가셔야 합니다.”
일봉스님은 다행히 성철 큰스님의 생애를 곁에서 직접 보고 들은 덕택으로 쉽게 승낙을 했습니다. 차를 나누며 맏상좌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한 가닥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오미크론에 걸리다
그런데 지난 3월 중순, 소납은 덜컥 오미크론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감기몸살이 온 것처럼 몸이 으스스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가진단을 해 보니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왔습니다. 부랴부랴 고령에 있는 영생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여기저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양성 판정을 받고 무척 놀랐습니다. 이미 세 번째 코로나 백신까지 맞은 상태여서 마음을 푹 놓고 지냈는데, 양성이라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때마침 백련암 관음전에서는 성철 큰스님 탄신 111주년을 맞이하여 보살님 몇몇 분이 3월 14일부터 일주일간 참선가행정진을 하고 있어서 더더욱 조심하며 자가격리에 들어갔는데, 증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끙끙 앓고 있는데, 21일 큰스님 탄신법회에 다녀간 사제들이 제 상태를 보고 걱정을 하자 상좌들이 나서서 병원으로 긴급 호송을 한 것입니다. 3월 22일 아침에 엠블런스를 타고 부산 동아대학교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상태는 단순한 ‘코로나 증세’가 아니라 이차변형인 오미크론에 감염되어 폐렴 증세가 심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주치의는 “오미크론 바이러스의 가장 치명타는 폐의 조직을 손상시키는 것인데 지금 스님의 폐 상태가 폐렴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초기가 아니라 벌써 2기로 진행되어 가고 있으니 항생제로 독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몸이 견뎌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정신없이 3일을 보내고 나서야 일반병실로 올라가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병실의 첫 일과는 매일 아침 6~7시 사이에 X-ray 촬영실로 가서 폐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입원한 뒤로는 목구멍으로 아무것도 넘기지 못하고 매일매일 주사바늘에 의지하여 영양분을 공급받는 시스템으로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몸에 필요한 자양분을 씹어 넘기는 게 아니라 의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보름 동안은 강한 항생제 때문인지 생각도 잘 정리되지 않고 매일매일 흐리멍덩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폐렴 증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니 차차 머릿속이 밝아지면서 입원하기 전에 벌여 놓은 바깥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종외사’의 헌정본 『우리 곁의 원택스님』
소납은 지난 2020년 8월에 대한불교조계종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를 품서받았습니다. 대종사 품서는 법랍 50년, 세수 70세 이상의 스님으로서 종회와 원로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한불교조계종 법계위원회에서 결정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19 펜데믹으로 품서식이 연기되어 오다가 2021년 10월 21일에 진제 종정 예하가 주석하시는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불을 모신 앞마당에서 비구 65분, 비구니 16분과 함께 품서를 받은 것입니다. 2021년 1월 종단에서 부여받은 마지막 소임인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에서 물러나 아무 직책 없이 편안히 쉬고 있다가 뒤늦게 대종사 품서식이 열리니 저 자신은 별 감흥이 없었는데 주위의 모든스님과 신도들이 저보다 더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그해 연말에 대종사 법계 품서를 축하한다며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각 일간지 전현직 종교 담당 기자들과 모처럼 덕담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종외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모임의 일원들이었는데, 그 이름은 2007년 3월 고우스님을 모시고 진행한 중국 선종 사찰 순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순례 후에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최고참인 현 경향신문 사장인 ‘김석종’에서 ‘종’ 자와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을 의미하는 ‘외’ 자에 결사는 뜻하는 ‘사社’ 자를 붙여서 만든 친목 단체 성격의 모임입니다. 종외사는 고우스님을 ‘조실祖室’로 모시고 모임을 가져 오다가 지난해 고우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로는 반농담조로 소납을 ‘회주會主’로 모셔야 한다고 하며, 길게는 30년 이상 짧게는 10여 년 가까이 지내 온 인연들입니다. 소납이 대종사 품서를 받자 종회사 기자님들이 노 개런티로 각자 그동안 ‘택스님을 보고 느낀 대로’ 원고를 쓰기로 하고 제 출가 50주년이 되는 다음해 1월 중순경에 헌정본을 만들어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기자들이 스스로 나서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런 말이 나온 지 10여 일이 지나 원고가 다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집 가제본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앞쪽에는 그동안 활동했던 사진들을 모아 40여 쪽에 걸쳐 화보를 실었고, 원철스님의 머리말에 이어 기자 열 분의 글과 인터뷰 두 꼭지를 포함해 『우리 곁의 원택스님』이라는 제목으로 200여 쪽에 이르는 단행본이 만들어졌습니다. 소납의 출가 50주년과 대종사 품서를 기념하며 종외사 일원과 제 상좌들이 힘을 모아 법공양(헌정본)으로 제작하여 3월 15일에 출간을 하였습니다. 그 귀한 책을 막 유포하려는 찰나에 오미크론에 걸려 병실에서 갇혀서 갑갑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산청 겁외사 통일기원비 설립
경남 산청군 단성면 성철 대종사 생가터에 세워진 겁외사와 성철스님기념관 사이에 직경 10여 미터의 원형 로터리가 진디밭으로 있었습니다. 어느해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뒤 통일신라의 무궁한 융성과 발전을 서원하며 사면불四面佛을 조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는 글을 읽고 “나도 저 로터리에 사면불을 조성하여 남북한 자유 왕래와 평화가 넘치는 한반도 통일의 원을 세워 보자.”는 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5년이 지나도 예전처럼 신도님들의 신심이 모이지 않아서 고민하던 차에 산청군에서 3억 원의 예산을 마련하여 사면불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터리 한복판에 사면불을 세우면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산청군 전문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간이 흐르고 결국 길 건너 지금의 자리에 사면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담당 실무자가 산청군 예산 중에 이월되지 않는 소멸분이 있는 줄 몰랐던 것을 겁외사에서 1억 원을 채우기로 하고 불사에 착수하여 2021년 11월 6일에야 사면불 낙성법회를 봉행하게 된 것입니다.
동방에는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여 모든 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고, 남방에는 미륵불을 봉안하여 다가오는 용화세계에서의 중생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며, 서방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고, 북방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煩惱에서 영원히 벗어나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새겼습니다. 그렇게 염원하던 사면불 불사를 회향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사면불 조성을 담당한 공주의 금강조각연구소 윤태중 석장은 “석불조성사石佛造成史에 있어서 단일 입상立像 사면불 조성으로는 조선시대 이후 처음 있는 불사라서 좋은 돌에 조각도 새롭게 하고 그동안 연마한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마음을 다하여 완성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자긍심을 펼쳐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면불을 완성하고 나니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았구나 싶었습니다. 제 내심內心엔 성철스님 생가터 불사의 회향回向은 바로 성철스님께서 1989년 3월 1일 종교인연합회의 요청으로 내리신 법어 “통일을 바라며”라는 글을 새긴 ‘통일기원비’ 건립에 있었습니다. 통일신라가 사면불을 세운 정신과 오늘날의 남북이 화합하여 전쟁 없는 불국정토가 되길 염원하셨던 성철 종정 예하의 원력을 이어받아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삼천리 강산이 하나되는 한반도를 이룩하자는 뜻으로 그 법어를 돌에 새겨 사면불 공간에 모셔 놓는 일이 겁외사 불사의 회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태중 석장에게 제 속내를 이야기하자 단박에 찬성하며 “산청군 이재근 군수님에게 산청의 좋은 돌을 찾아 선물해 주십사 하고 청을 할 테니 스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며 흔연히 약속하였습니다.
성철스님의 “통일을 바라며”라는 법어가 새겨진 ‘통일기원비’는 이렇게 시작되어 돌을 구하는 데만 5~6개월이 걸렸고, 윤 석장은 그 많은 돌 가운데 크고 작은 봉우리 둘이 있는 것을 골라서 산청군 골짜기에서 공주까지 옮겨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윤 석장에게 맡기고 올해 구정 지나 동안거 해제 후에 만나서는 “매년 음력 3월 6일에는 성철스님문도회 신도 1천여 명이 겁외사 경호강 방생터에 모여 전국방생법회를 개최합니다. 코로나로 미뤄 왔는데 올해는 양력 4월 6일에 개최하고자 하니 그날 제막식을 올렸으면 합니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밖으로 벌여 놓은 일이 한둘이 아닌데 목구멍으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병실에서 의료적 치료만 받고 있으려니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치료에 집중하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여가가 없었는데 입원한 지 20여 일이 지나 몸 상태가 안정권에 들자 정신도 맑아 오기 시작하는데, 병실에서 속절없이 24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또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 짐이 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급성 폐렴으로 이곳에 입원하셨을 때는 “똑같다 똑같다” 하시며 화두 삼매에 들어계셨다면 출가 후 이날 이때껏 큰스님을 가슴에 모시고 산 소납으로서는 큰스님 가르침을 현창顯彰하는 일이 화두인데 바깥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서 상의도 할 수 없고 지시도 할 수 없으니 속만 타들어 갔습니다. 답답함과 초조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윤 석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성철 종정 예하의 통일기원비가 완성되었는데 언제쯤 세울까요?”
그때는 병세에도 차도가 있고 ‘4월 20일쯤이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도 있어서 “20일에 세우고 21일에 스님들이 모여 회향합시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일 퇴원은 언감생심에 불과했습니다. 몸은 제 마음과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윤 석장은 약속대로 겁외사에 가서 기단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20일 비를 세웠고, 21일에는 소납 대신 맏상좌 일봉스님이 주관하여 간소하게 회향식을 하였습니다.
퇴원의 기쁨과 불佛 자 새김
퇴원 후 회복에 조금 속도가 붙자 5월 1일에는 용기를 내어 겁외사 행차를 결심했습니다. 서방 아미타불과 마주한 통일기원비를 처음으로 대하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높이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백두산과 한라산을 연상시키는 듯한 높고 낮은 두 봉우리가 큰스님 법어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져 참으로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앞면의 글귀는 잘 새겨졌는데 뒷면은 자연 상태 그대로라서 아쉬운 생각이 들어 윤 석장에게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우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윤 석장도 여백을 채우고 싶다는 궁리를 하고 있었는지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철 대종사께서 써 놓으신 ‘불佛’ 자가 있으면 그것을 확대해 옮기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납도 좋은 생각이라 여기고 옛날에 큰스님께서 큰 붓으로 써 주신 ‘불佛’ 자 하나를 보관해 둔 기억이 떠올라 얼른 “예”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심정사에서 찾아보니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옛날에 표구해 둔 것이 생각나 백련암 원주에게 찾아보게 하니 마침내 ‘불佛’ 자가 나왔습니다. ‘산청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후예와 제자들이 그 유훈을 이어가고 있는 선비의 고장이라 필력 좋은 분들이 많을 텐데 큰스님 글씨를 새겨 놓고 핀잔이라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윤 석장에게 ‘불佛’ 자를 보냈습니다.
5월 5~6일 이틀간 윤 석장은 통일기원비 뒷면에 큰스님의 ‘불佛’ 자를 새겨 넣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6일 2시쯤 ‘불佛’ 자 새김을 마친 윤 석장은 아버지를 이어 석수의 길을 가는 아들과 함께 ‘불佛’ 자에 먹물을 입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종이에 담긴 큰스님 글씨의 힘과 정신을 육중한 돌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왕 석수의 솜씨를 보니 마음속에 고마움이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내 할 일을 다 마쳤구나 싶은 생각이 들며 마음속까지 시원해졌습니다. 소납은 먹물이 다 입혀진 큰스님의 ‘불佛’ 자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습니다. 그동안 불사를 해 오면서 제가 꿈을 꾸어 왔듯이, 겁외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통일기원비’에 새겨진 법어를 읽고 ‘사면불’을 참배하며 겁외사와 큰스님 생가 율은고거栗隱故居 그리고 성철큰스님기념관을 둘러보며 가슴속에 영원한 자유와 행복한 삶을 이루는 꿈, 이 지구상에 더 이상 전쟁의 두려움이 없는 평화로운 공존과 남북 자유왕래의 꿈을 함께 이루어나가길 발원했습니다.
무량한 자비와 복덕이 가득하시길
어느 날 고심정사 신도 회장님과 몇 분의 노보살님들이 찾아오셔서 그간의 일에 대해 귀띔을 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들은 백련암에서 늘 해 오던 대로 함께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씩 여러 번 기도를 올렸고, 상좌스님들도 열심히 기도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상좌스님들께서는 은사스님의 조속한 완쾌를 기원하며 5~6번 바닷가로 겁외사 경호강으로 방생을 다녀와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도님들에게 걱정을 끼친 것이 미안하고 소납을 위해 기도에 동참해 주신 것이 감사하여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하여 무한한 자비심으로 나투신다더니 저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보살님들의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나는 듯하였습니다.
“보살님, 이번에 저도 병원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은 ‘내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한 적이 없습니다. 힘들고 지쳐도 하룻밤 자고 나면 거뜬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나의 없음에 대한 고민을 한 적 없는 어리석음’을 통감하며 반성하고 또 반성했습니다. 하여 차후를 후회 없이 정리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원기를 점차 회복하고 있는데 맏상좌 일봉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스님, 이번에 은사스님께서 한마디 말씀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시니 저야말로 앞이 캄캄했습니다. 최근에 해인사 선원에 들어와서 2년 동안 입승을 하였기에 망정이지 전처럼 백련암을 멀리하고 살았더라면 어찌할 뻔했을까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2년의 해인사 생활을 통해 방장 큰스님과 주지스님, 산중의 어른 스님들과 소임을 맡은 스님들과 내왕이 늘 있었기에 은사스님의 근황과 안부를 수월하게 전하고 그 어른 스님들께서 하시는 염려의 말씀도 잘 전달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해인사에 있어서 다행이었지 다른 산중에서 정진하고 있었더라면 백련암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 되어 주인 없는 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앞으로는 은사스님을 잘 살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일봉스님도 스님된 지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법랍 20년이 지나고부터 “봉암사는 너의 노스님께서 마음이 고향이라 하신 곳이니 수행처로서 그만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해인사에 들어와 나를 도우며 좀 살아야지!” 하고 권유할 때마다 “스님! 저는 소임 살려고 스님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 노스님처럼 도인 되려고 출가하였습니다. 스님! 저에게 소임 이야기는 하지도 마십시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안스럽게 늘 거절만 해 왔던 일봉스님의 입에서 이런 독백이 흘러나오다니…. 병원에서 30여일 간 고생은 했지만 이번 병원 생활은 스승과 상좌 간에 메꾸기 힘들었던 오랜 틈을 꽉 채워 준 듯하여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결제를 앞두고 원각 방장스님을 찾아뵙고 해인사 산중 전체가 저의 쾌유를 바라고 있었음에 감사를 드리려고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려 하는데, 방장 대종사께서 얼른 다가오셔서 “아직도 허약한 스님이 무슨 절을 하느냐?” 하시며 손목을 잡아 끄시는 바람에 절을 올리다가 좌복 위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마침 마스크를 벗고 존안을 마주 대하니 “한 달 동안 병실에 있었다 하더니만 얼굴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해졌네요! 그만하면 됐으니 앞으로 건강만 빨리 회복하소.” 하시며 흔연해 하셨습니다.
그동안 걱정해 주신 주위의 모든 사부대중 여러분에게 일일이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다만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고,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와 복덕이 늘 함께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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