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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서구 문헌학을 도입한 근대적 불교연구의 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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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09:10  /   조회2,38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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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8 | 난죠 분유南條文雄(1849~1927)

 

난죠 분유南條文雄(1849~1927)는 『대명삼장성교목록大明三藏聖敎目錄』, 일명 난죠 카탈로그를 남긴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의 막스 뮬러나 중국의 양문회楊文會 등의 학문적 성과를 논할 때, 난죠와의 관계성을 들어 소개하기도 한다. 난죠는 메이지 초기 영국에 유학해 범어불전 연구를 한, 이 분야의 선구자적 존재로 평가받는다. 

 

사진 1. 난죠 분유南條文雄(1849~1927). 일본의 근대적 불교학의 태두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 내에서 ‘근대적 불교연구의 태두’로 기억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근대적이란 말은 서구문헌학을 도입했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19세기 당시, 서구의 불교학은 산스크리트어나 빨리

어 등 인도 고전어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난죠는 영국 유학을 통해 이 분야의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구미 유학생을 파견했고, 자비 유학생이 등장하는 등 일본 불교학 연구의 큰 맥을 형성하는 시발점이 된 인물이다.  

 

사진 2. 난죠 분유가 태어난 세이운지誓運寺. 

 

난죠는 기후현 오가키시岐阜縣大垣市의 진종 오타니파 사찰인 세이운지誓運寺에서 태어났다. 6살부터 불교·유교·한시를 배우기 시작했고, 에도막부 말기에는 오가키번大垣藩의 승병이 되었다. 하지만, 몸담고 있던 승병대가 해산하자 1868년, 교토 동본원사의 다카쿠라 기숙사高倉学寮에 입학했다. 이후 다카쿠라 기숙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후쿠이현 오쿠넨지福井県憶念寺의 난죠 신코南条神興의 양자가 되어 난죠南条로 성을 바꾸었다. 난죠 분유의 학문세계를 이야기할 때, 크게 영국유학과 인도 체험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게나마 그의 영국 유학과 관련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국 유학과 막스 뮬러

 

1876년, 난죠는 오타니 코에이大谷光瑩의 명에 의해 가사하라 켄지笠原研寿와 함께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서구시찰단 파견은 이미 서본원사西本願寺에서 선점하여 2차 유학생을 파견한 상황으로 동본원사東本願寺 입장에서는 후발주자였다. 난죠 분유가 동본원사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을 때, 그는 불교학 연구자가 아닌 동본원사 사무소 직원에 불과했다. 당시 동본원사는 본산사무소를 새로 설치해 사무소의 역할을 강화하려던 시점으로 난죠 분유가 선택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난죠와 함께 선발된 가사하라 켄지 역시 동본원사 본산사무소 직원으로, 난죠 일행이 유럽으로 출발할 때까지의 약 80여 일 동안 종단 내에서도 이들의 유학은 극비사항이었다.  

 

사진 3. Thomas William Rhys Davids(1843년~1922년). Pāli 언어학자인 리스 데이비스는 Pāli Text Society의 창립자이다.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난죠 분유의 영국 유학이 평가받는 이유는 실제 근대 불교학 연구를 위해 유학한 최초 유학생이라는 점이다. 물론, 서본원사에서 이전에 파견한 아카마츠 렌조赤松連城,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우메가미 다쿠유梅上澤融 등이 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서구시찰단·불교견문단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진 4. Arthur Anthony Macdonel(1854년~1930년). 인도 비하르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대학 산스크리트어 교수로 재직하며 산스크리트어 텍스트를 편집하고 사전을 편찬했다. 

 

난죠는 1876년 6월 13일(난죠 28세), 일본을 떠나 두 달이 지난 8월 11일에 런던에 도착했다. 처음 3년간은 영어를 익힌 시기였다. 이후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1843~1922)를 만나 그로부터 빨리어 연구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하겠다는 처음 목표를 위해 거절한 후 1879년 2월, 웨스트민스터 사원 학장인 스탠리의 소개를 통해 막스 뮬러와 조우한다. 이 만남을 통해 난죠는 옥스퍼드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처음 1년간은 아서 맥도넬Arthur Macdannell에게 산스크리트어 기초를 배웠다. 이후 일본에서 범어 사본이 도착하면서 1880년 1월부터 뮬러 교수의 『무량수경』, 『아미타경』, 『금강경』 산스크리트 강의를 듣게 되었다. 

 

사진 5. 난죠 분유 탄생 160주년을 기념해 오타니대학大谷大学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터. (좌)난죠 분유, (중) 막스 뮬러, (우) 가사하라 켄지.

 

 

난죠 카탈로그 

 

이 시기 난죠는 뮬러, 가사하라와 함께 일본에서 보내온 범어(산스크리트어) 사본 번역에 진력을 다했다. 오래된 범어 사본을 보내준 이는 동본원사 내의 육영학교 교사 구리하라 시게휴栗原重冬로, 이는 뮬러의 요청으로 인해서였다. 이때 보내온 사본들은 고키지高貴寺의 패엽 『금강반야경』, 뇨간지如願寺의 패엽 「보현행원찬」, 호류지法隆寺의 패엽 「반야심경」, 「불정존승다라니」 등이었다. 이들 범어 사본은 1880년부터 1884년 사이에 영국 학계에 발표되고 Anecdota Oxoniensia 시리즈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0년 후(1894), 막스 뮬러의 대표 저서인 『동방성서 The Sacred Books of the East』에도 포함되었다.

진 6 난죠와 뮬러가 함께 출간한 <Anecdota Oxoniensia>(1883). 

 

난죠는 뮬러와 함께 산스크리트어 번역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연구도 진행했다. 런던 인도성 도서관에 있는 황벽대장경黃蘗大藏經의 교열과 목록 작성이 그것이다. 이 황벽대장경은 1872년 메이지정부의 구미사절단이 런던에 갔을 때 런던대학 교수이자 중국학 학자인 사뮤엘 비일Samuel Beal의 요청으로 기증한 한역 장경이다. 난죠가 이 황벽대장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비일이 황벽대장경을 『The Buddhist Tripiṭaka 불교삼장』(1876)이란 이름으로 출간했는데 오류가 많았다. 난죠는 자신의 저서 『회고록』(1927)에서 일본 외무성 직원이 실수로 순서를 뒤섞인 채 기증한 것이 목록화되었다고 설명했다.

 

난죠의 주요 작업은 황벽대장경을 다시 교열 정리한 후 목록화하는 작업이었다. 목록화 작업에는 한역경전에 대한 산스크리트 제목을 부여하고, 역자와 번역연대 등을 추가해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성립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했다. 대장경 내의 중국 찬술 문헌에 대한 해설과 함께, 인도와 중국의 불교 사상가와 역자에 대한 설명, 그리고 범어 색인, 저자와 역자 색인까지 수록했다. 이 지리한 작업은 1883년 황벽대장경 영문목록집으로 완성되어 옥스퍼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출판물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일명 ‘난죠 카탈로그’이다. 이 난죠 카탈로그는 그동안 한역불전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던 유럽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난죠는 이 저서가 학술적 인정을 받아 옥스퍼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이로 인해 유럽학계에 자신을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국에서의 학문적 교류

 

난죠의 영국 유학생활은 크게 산스크리트어 교정 작업과 함께 학문적 시각의 확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81년, 난죠와 그의 동료 가사하라는 뮬러의 제안으로 베를린에서 열리는 제5회 국제동양학대회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국제동양학대회는 1873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열린 이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헌학·고고학 연구가 중심이 되는 학회였다. 난죠가 이곳에서 여러 문헌학자들을 만났다는 점도 큰 소득이지만 그보다 더 큰 소득은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난죠 일행은 영국으로 귀국길에 프랑스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는데, 이때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산스크리트어 경전 사본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난죠와 가사하라는 빌린 사본들을 밤낮으로 필사했다. 난죠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만큼 바쁜 적이 없었다’라고 회고할 만큼 방대한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기간이었다. 이때 필사한 사본들은 ‘번역명의대집飜譯名義大集’과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이다. 이들이 유학시절에 주로 필사한 것은 대승경전류로, 여기에는 난죠와 가사하라의 의지와 함께 동본원사 측의 요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사하라가 폐결핵으로 일찍 귀국하게 되자 동본원사 측에서는 뮬러에게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난죠와 가사하라를 잘 지도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원전 필사본을 일본으로 가지고 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전하고 있다.

 

사진 7. 난죠 카탈로그(<A Catalogue of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Buddhist Tripitaka>, 1883)표지와 내지.

 

난죠와 양문회楊文會(1837~1911)의 교류 역시 난죠의 유학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성과이다. 난죠와 양문회의 만남과 교류에 대해서는 여러 글에서 소개된 만큼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이들의 첫 만남은 양문회가 산스크리트본의 『대승기신론』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난죠를 찾아오면서부터이다. 이후 난죠는 중국에서 없어진 불전들을 양문회에게 보내는 등 이들의 교류는 30여 년간 지속되었다.

 

7-1. 난죠 카탈로그(<A Catalogue of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Buddhist Tripitaka>, 1883)표지와 내지. 

가사와라와 달리 영국에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던 난죠에게 귀국은 그의 의도와 달리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친부의 사망과 양모의 병세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했다. 뮬러가 2~3년만 더 있으면 그동안 이룬 것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룰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결국 난죠는 일본을 떠난 지 8년 반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난죠 카탈로그로 대변되는 영국에서의 학문적 성과는 그 자체로 큰 성과이고 후학들에게 의의가 크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교정과 목록화 작업이었다. 물론 이는 난죠의 성과를 폄훼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성과이다. 다만 목록화 작업에서 한 발 나아간 연구의 진전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난죠는 귀국 후 일본에서의 활동과 인도 체험을 통해 성장을 이룬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 지면에서 난죠의 인도 체험이 그의 학문체계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변화시켰는지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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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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