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조론오가해』 번역 완료 소식을 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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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11:42 / 조회4,405회 / 댓글0건본문
어느덧 2022년도 반환점을 돌아 7월로 접어들었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돌아보니 올 상반기에는 그래도 뜻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월에는 강경구 교수님이 10여 년의 연구 성과를 담아 『정독 선문정로』를 출판하는 경사가 있었고, 3월에는 종교 담당 일간지 기자님들의 친목 단체인 종외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모임에서 『우리 곁의 원택스님』이라는 제목으로 200여 쪽에 이르는 단행본을 출판하였고, 4월 20일에는 겁외사 사면불 공간에 「통일을 바라며」라는 성철 대종사의 통일 시비를 자연석에 새겨서 건립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큰일을 축하하는 자축 행사를 문도 스님들과 신도님들이 4월 6일 전국 방생회 때 겁외사에 모여서 올렸으면 하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월 22일 뜻하지 않게 병원에 입원하여,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모든 것들이 헝클어지고 말았습니다. 한 달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으로 넘기지 못하고 주사 바늘에 의지하고 살았으니, 살이 쏙 빠지고 팔·다리에 살이 빠지며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지고 말았습니다.
퇴원하고서도 30일 동안 텅 빈 위장 속을 달래기 위해 무염식에 가까운 자연식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조용하고 공기도 좋고, 산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외사로 처소를 옮기기로 마음먹고 해인사에서 하안거 결제식을 올리고 짐을 옮겼습니다. 매일 아침저녁 한 시간 가까이 겁외사 곁에 있는 성철공원이라 명명된 묵곡 생태숲을 걷고 있습니다.
조병활 박사가 전한 희소식
그러는 사이 지금은 체중도 좀 회복되고 있고,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스님의 음성에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라며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주니 저도 하루하루 기력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조병활 박사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동안 중국에서 11여 년간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지도 4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고경』 편집장도 내려놓고 스님께서 시간을 아껴서 불철주야 번역에만 전념하도록 하여 5년여 동안 번역해 오던 승조僧肇 선사님의 『조론오가해』 번역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원고가 1만 8천 장 분량이 될 것 같으니 만만한 분량이 아닙니다. 2023년 가을에 퇴옹성철 대종사 열반 30주년 기념으로 영전에 올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원택스님께서 그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심이 커서 오늘의 결실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큰 감사를 드립니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실로 얼마나 반갑고 반가우며 듣고 싶고 또 듣고 싶었던 소식이었는지 모릅니다. 북경대학교 철학부에서 4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귀국을 바라며 조 박사가 앞길을 물어 왔습니다. 그때 저는 “조 박사가 한국에 있을 때 대한불교조계종의 불교신문 편집장까지 역임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기자였다. 지금 북경대학 선학 박사학위를 갖고 귀국하면 ‘나를 도와 달라’는 큰스님들이 많을 텐데 그 거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박사 후 과정은 내가 책임질 테니 필요한 불교학 박사학위를 3년이면 마친다니 박사학위를 하나 더 가지고 귀국하면 그런 청들을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2~3개월 후 조 박사가 찾아와서 “티베트 불교를 새롭게 연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며 “티베트 불교 연구는 산스크리트어 연구만큼 어렵다고 하는데 3~4년의 세월로 가능한 일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조 박사는 “5~6년은 걸려야 이룰 수 있는 일인 듯합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티베트 출신인 지도 교수가 “나는 티베트어를 익혀서 티베트어로 불교 논문을 쓰는 제자를 바라지 한문으로 티베트 불교를 연구해서 한문으로 박사 논문을 쓰는 제자는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여 지도교수의 뜻대로 하기로 약속하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5~6개월이 지나자 “지도 교수께서 북경에 있으면 티베트어가 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며 중관과 유식에 실력 있는 큰스님들이 계시는 청해성의 절을 소개해 줄 터이니 북경을 떠나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큰 절에 가서 큰스님들에게 지도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셔서 가족들은 북경에 두고 혼자서 청해성으로 공부하러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춥고 더워 몸에 맞지 않은 기후를 견디며 6년 만에 티베트어로 불교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외국인이 와서 티베트어를 익혀서 학위를 받은 학자가 생기게 되었다며 떠들썩하게 축하를 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6월에 두 개의 박사학위를 어깨에 얹고 한국으로 11년 만에 조병활 박사가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조론오가해』를 번역하게 된 기연
그즈음, 백련암에서는 이전에 무가지로 발행해 오다 사정상 휴간하고 있던 『고경古鏡』 계간지를 속간하여 월간지로 전환하고 60여 호 이상을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귀국한 조 박사가 이 잡지의 편집장을 맡으면 학술과 관련한 좋은 활동공간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병활 박사가 편집장으로 취임하니 『고경』을 통해 티베트 불교 연구가 결실을 이루고, 세월을 거치며 『고경』 잡지도 나날이 새로워지고, 논문 발표도 쉼 없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 박사가 지나가는 말로 “원택스님! 이제 제가 어떤 불교를 공부하여 논문을 발표하면 좋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날은 저에게도 어떤 영상이 떠올랐는지 “성철 큰스님께서 승조의 『조론』 연구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시던 말씀이 문뜩 떠오르면서, 승조스님의 『조론』을 연구해 보면 어떨까 싶네. 지금 우리 불교에서는 반야사상 연구가 부족하다고 큰스님께서 더러 말씀하셨거든. 『조론』 연구와 『대지도론』 연구는 반야사상 이해에는 최고라고 하셨는데 『조론』 연구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4년 동안 조병활 박사는 『고경』 월간지와 불교논문 전문 학술지에 『조론』에 관한 연구논문을 꾸준히 발표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10월경부터 일체 외부 활동을 끊고 『조론』 번역에 심혈을 기울여오면서 오늘 이렇게 『조론오가해』의 원고가 마무리되어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6월 말이면 각 해제가 끝나고, 11월이면 10권의 책이 한 질이 되어 『조론오가해』가 출판될 것입니다. 원택스님! 이번에 『조론오가해』를 번역하면서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의 한문 구조를 통달하게 되어 제 한문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게 되었습니다. 시대별 『조론』에 대한 평가가 격렬하여 수많은 주가 필요하게 되어 일일이 연구하여 기록하게 되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매 시대의 불교학 발전을 이해하고 한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철 종정 예하님의 바람대로 『조론』 공부가 저의 불교학과 선적 이해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오늘까지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백련암 스님들과 신도님들에게 참으로 깊은 마음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라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한 사람의 불교학자를 육성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설사 지원을 한다고 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를 하여 훌륭한 성과를 내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니 실로 반갑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캐나다 선교 130주년과 불교의 한글화
지난해 신문 지상을 통해 캐나다 기독교 선교회가 한국에 기독교를 선교한 지가 130주년이 되는 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한글과 조선예수교서회 간행물’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캐나다 선교사들은 한글에 크게 주목했다고 합니다.
“우리 캐나다 기독교가 한국선교에 성공한 제일 요령은 조선 사회에서 활용성이 전혀 없던 언문인 훈민정음을 연구하여 성경을 번역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선교에 빠른 길이라고 결정하였다. 『성경』의 한글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 백성들에게 쉽고 빠르게 다가간 것이 선교 대성공의 지름길이었다.”라는 취지의 글을 읽고 보니 용성 대종사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용성스님은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선언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죄수의 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앞을 보니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누가 보았는지 책이 너덜너덜한데 한쪽의 책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나중에 보니 너덜너덜한 책은 한글 『성경』 책이었고, 먼지 덮인 책은 한문 불경 책이었다. 여기서 내가 출옥하면 불경의 한글 번역 사업에 평생을 바쳐야겠다고 결심했다.”라고 회고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한문 세대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불교경전이 아직도 눈에 띄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불전의 한글화는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대웅전만 크게 지을 것이 아니라 조병활 박사와 같은 우수한 학자들을 종단에서 우대하여 ‘불경의 한글화’에 초미의 관심을 가질 때라 생각합니다.
승조스님의 『조론』은 「물불천론」 · 「부진공론」 · 「반야무지론」 · 「열반무명론」 등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번에 조 박사는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혜달스님이 지은 『조론소』, 당나라의 원강스님의 『조론소』, 북송의 비사스님이 강설하고 정원스님이 집해한 『조론중오집해』, 원나라 문재스님이 펴낸 『조론신소』, 명나라 감산스님이 기술한 『조론약주』 등 다섯 권의 주석서를 『조론오가해』라는 이름으로 우리말로 번역하여 처음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사진 3. 『조론중오집해』에 수록된 「물불천론」.
『조론오가해』의 책 이름은 소납과 조 박사의 의논이 합의되고 난 뒤 범어사에 계시는 무비 대종사 큰스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조 박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조론』과 위진남북조시대의 진나라, 당나라, 북송, 원, 명 시대의 뛰어난 주석서를 선별하여 책을 출간하고자 합니다.”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무비 대종사 큰스님께서 “그럼 내가 그 책 전집 이름을 당장 지어주지. 『조론오가해』로 하면 좋겠다.”며 즉석에서 이름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성철 종정예하께서 아쉬워하셨던 부분을 30여 년이 지나서나마 채워 드릴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준 조병활 박사에게 저 원택은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론오가해』의 출판으로 조병활 박사의 학문적 역량이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지고, 앞으로 더 큰 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학자로 성장하도록 강호제현의 관심과 격려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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