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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거사선]
조사선(祖師禪)은 생활선(生活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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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3 년 5 월 [통권 제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95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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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선(居士禪)이 뭐꼬?” “세간과 출세간이 둘 아닌 선(禪)에 거사선은 또 뭐람…” 

그렇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둘이 아니고,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선(禪)의 세계에서 굳이 출가와 재가를 나눠 ‘거사선’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자체가 분별망상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거사선’이 계속 회자되는 것은 재가의 선수행이 출가의 그것과 달라서가 아니라, 제반 수행여건이 부족하다 보니 현실에 맞는 방편이 꾸준히 요청되기 때문이리라. 재가자들은 무엇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력을 다해 일해도 가족을 부양하기가 쉽지 않거니와, 따로 시간을 내어 가까운 선방을 찾아 정진하기도 어렵다. 돈과 시간, 도량도 문제지만 훌륭한 도반과 선지식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거사선’이 회자되는 이유

 

그렇다면 번잡한 도심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재가자들은 선(禪)을 포기하고 염불이나 다라니 정진에만 몰두해야 할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선(禪)은 좌선만을 중시하는 유위법(有爲法)의 수행이 아니라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에 상관없이 일상 속에서 무념행(無念行)을 실천하는 무위법(無爲法)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이 무위법은 일체의 조작이나 치구심(馳求心), 구하는 마음 없이, 닦는 바 없이 닦는 무수지수(無修之修)의 공부이기에 고요한 산속과 같은 특별한 공간이나 좌선과 같은 고정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마음공부를 뜻한다. 

 

실제로 조사선(祖師禪)의 실질적인 확립자인 육조혜능 선사는 좌선을 한 적도 없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이란 말을 듣고 마음이 열렸으며, 이후 5조 홍인 대사 문하에 들어가서도 방앗간에서 방아만 찧다가 어느 날 밤, 비밀리에 홍인 대사의 『금강경』 법문을 듣는 와중에 크게 견성(見性)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좌선 위주의 참선에 매진할 수 없는 재가자들도 틀림없이 마음공부를 할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간과 장소를 탓하고 선지식의 부재를 말하는 것은 스스로가 아직 선(禪)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고 지혜와 정성, 노력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반증이 아닐까.

재가자들은 선수행자의 필독서인 『육조단경』에서 설하는 ‘좌선’과 ‘선정’의 정의를 반드시 되새겨보고 발심을 해보자.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無碍]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또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만약 밖으로 모양(相)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하다. 만약 경계에 부딪히면 어지러우니 모양을 여의고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이 ‘정’이다. 밖으로 모양을 여읜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는 것이 곧 선정이라 이름한다.”

 

혜능 대사는 좌선과 선정은 안과 밖의 모든 경계나 모양에 집착하거나 매이거나 걸림이 없이,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로 본래 성품을 깨닫는 마음공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혜능 대사는 좌선 위주의 형식에 치우친 공부보다는 “즉시 활연히 깨달아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고 하는 『유마경』을 인용하며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돈오선(頓悟禪)으로 “자기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단박에) 보라.”고 당부한 것이다.

 

이러한 법문은 육조 대사의 제자인 남악회양 선사를 거쳐 손자뻘인 마조 대사에 이르러 좌선간심(坐禪看心) 위주의 북종선을 꾸짖는 단계에 이른다. 회양 선사는 좌선에만 집착하는 것은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일과 같다는 ‘마전작경(磨磚作鏡)’ 법문을 통해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릴 것이 아니라 소(마음)를 때려야 한다고 가르침을 준다.

 

이에 마조 선사는 좌선과 같은 모양에 집착해서는 부처의 진면목을 볼 수 없으며, 진리가 일상의 삶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깨닫게 된다.

 

조사선은 재가자들에게 딱 맞는 수행법

 

이와 같이 혜능-회양-마조-백장-황벽-임제 선사에 이르는 정통 조사선은 좌선보다는 고함과 몽둥이질과 같은 법거량(선문답) 중심의 활달한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여기에 좌선하느니 안 하느니, 출가니 재가니, 남성이니 여성이니, 젊다느니 늙었다느니 하는 분별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중국의 거사선을 대표하는 방 거사가 당시 석두 선사와 마조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달아 법을 펼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조사선의 전통은 원래부터 일상생활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일상선(日常禪)이자 생활선(生活禪)이었으니, 산속이 아닌 세간에서 수행하는 재가불자들에게 딱 맞는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서장』에 등장하는 대혜종고 선사가 인정한 제자들의 대다수가 증시랑ㆍ강급사ㆍ부추밀ㆍ이참정 같은 재가자였음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일찍이 거사선의 원조인 인도의 유마 거사는 『유마경』에서 “정직한 마음이 도량(道場)이요, 자비한 마음이 도량이요, 보리의 마음이 도량이다.”라고 하였고, 방 거사는 “신통이니 묘용이니 무엇을 말하는가?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의 부설 거사는 “깨달음은 평등하게 깨닫고, 수행은 더할 나위 없이 행하고, 깨달음은 인연 없는 데에 계합하고, 제도는 인연 있는 데서 할지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깨달음을 증득한 거사들은 물론이요 역대 조사들은 한결같이 장작 패고 나물 캐고, 밥 먹고 세수하는 일상생활에 도(道)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거사선’은 동중선(動中禪)을 닦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좌선이 연습이라면 삶은 실전공부이다. 

 

좌선에서 얻은 선정의 힘을 복잡다단한 일상생활에서 자재(自在)하게 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지금 여기’ 눈 앞에 펼쳐진 삶은 공부거리 아님이 없을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역대 재가 선지식들의 삶과 어록을 통해 선(禪)에 대한 안목을 높이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불행수행(佛行修行)의 노하우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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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金聖祐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경북 안동 생(生).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취재부 기자 및 차장, 취재부장을 역임. 현재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와 넷선방 구도역정(http://cafe.daum.net/ kudoyukjung) 운영자로 활동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법음을 전하고 있다. 저서에『문없는 문, 빗장을 열다』,『선(禪)』,『선답(禪答)』등이 있다. 아호는 창해(蒼海ㆍ푸른바다), 본명은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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