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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미완의 범어 연구, 인도기행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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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09:08  /   조회2,0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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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9 | 난죠 분유南條文雄(1849~1927) ②

 

지난 글에서는 난죠 분유南條文雄(1849~1927)의 영국 유학 시기와 『대명삼장성교목록大明三藏聖敎目錄』이라 불리는 난죠 카탈로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난죠의 영국 시절에 대한 소개는 한국에서도 몇몇 글에서 찾을 수 있지만, 영국 유학 이후의 난죠의 활동에 대해 다루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본 글이 아마도 그에 대해 한국에 소개하는 첫 번째 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 1. 청년시절의 난죠 분유. 

 

1884년(36세), 영국에서 귀국한 난죠는 오타니교고大谷敎校의 교수를 시작으로 1885년에는 도쿄제국대학문학부 강사로 부임해 범어를 가르쳤다. 이 시기의 난죠는 정토진종 본산本山의 요구대로 포교에 동분서주하며 보냈다. 난죠와 함께 『법화경』을 새롭게 번역한 이즈미 호케이泉芳璟(1884~1947)는 난죠의 추도식에서 이 시기의 난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도했다.

 

“참으로 유감인 것은 선생님의 연구가 영국 유학 기간에 절정에 달해, 귀국 후에는 그 이상의 전진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일상은 범어 연구보다도 포교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포교로 선생님을 몰아대는 본산도 본산이었지만, 그것을 시키는 대로 다 응했던 선생님도 선생님이셨다고 나는 생각했다.” 

 

난죠의 포교활동은 인도 기행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야마베 슈가쿠山辺習学(1882~1944)는 “40세 이후 약 35년간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사이도 없이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하루 수 시간을 강단에 섰고, 등과 발이 땀에 흥건히 젖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당시의 난죠를 회상했다.

난죠가 영국 유학 전부터 진종 본산 사무소의 교육과에서 근무했다지만 영국 유학을 통해 ‘연구’에 발을 들인 그가 다시 ‘포교와 교육’으로 전환한 데에는 인도 기행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인도에 대한 동경

 

난죠가 인도의 불적佛蹟을 방문해 참배하고 싶다는 동경은 영국 유학을 떠날 때부터 있었다. 그는 함께 유학을 떠났던 가사하라 켄지笠原研寿와 함께 영국에 가기 전 인도에 들려 불적을 참배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시 두 사람은 귀국 시 인도에 들려 석가의 유적지에 참예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가사하라가 병으로 먼저 귀국하고, 난죠 역시 친부의 사망과 양모의 병환 때문에 인도가 아닌 보다 빠른 미국을 경유한 루트로 귀국했다. 따라서 인도는 난죠에게 있어 여전히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 2. 『영지회잡지令知會雜誌』. 

 

귀국 후 난죠는 포교와 더불어 『영지회잡지令知會雜誌』에 인도와 관련한 저작물들을 적극적으로 발표했다. 모두 타인의 저작물들로 난죠는 이들 저서에 첨언을 하거나 일부 번역을 했다. 내용은 인도의 불교 쇠퇴 인식이나 새로운 자료 발견에 대한 기대 등이 주를 이루었다. 난죠가 『영지회잡지』에 집중적으로 투고한 시기는 1885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 정도의 시기였지만, 독자들은 난죠가 영국 유학도 갔다 오고, 현지에 인맥도 가진 ‘인도통’으로 인식했다.

 

이와 관련해 메이지유신에 활약한 정토종 승려 후쿠다 교카이福田行誡가 난죠에게 인도에서의 범어 보급이나 불교현황, 승려와 신자 등 인도불교에 관한 15개의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난죠가 인도에서 유학했다고 오해를 한 후쿠다의 질문에 난죠는 『문대잡기問對雜記』라는 책자를 간행해 직접 ‘인도 유학을 하지 않았다’, ‘인도의 지리는 영국의 인도 관련 저서들에 의지해 답을 했다’라고 고백한 에피소드도 있다. 더해서 스승인 막스 뮬러는 편지를 보내 불전 수집을 재촉했다. 난죠는 가사하라와의 약속, 인도의 역사적 의미, 막스 뮬러의 기대, 세간의 오해 등이 결합해 인도에 대한 동경이 더욱 강해졌다.

 

3개월간의 인도기행

 

난죠의 인도행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성사되었다. 1887년 1월 난죠는 샤쿠 운쇼釋雲照 율사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정부 관료인 아오키 테이조우靑木貞三를 만났다. 마침 아오키는 스리랑카를 경유해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난죠의 인도에 대한 동경을 들은 아오키는 그 자리에서 난죠에게 동행하기를 권유하고 여비를 기부했다. 이에 난죠는 곧바로 도쿄제국대학과 오타니교고에 사임을 표하고 이틀 뒤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난죠의 여정은 단순히 인도를 유람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인도-중국-티베트를 방문해 유학하면서 불전을 찾을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은 『영지회잡지』(46호)를 통해 “상해에서 천진 북경을 거쳐 오대산에 올라가거나, 바로 서장西藏(티베트)으로 들어가 라싸拉薩에서 유학하면서 산스크리트 경전을 찾을 계획이다.”라고 발표했다. 난죠가 티베트까지 건너가 유학을 결심한 데에는 막스 뮬러의 영향이 크다. 뮬러는 난죠에게 편지를 보내 티베트로 건너가 자료를 찾아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내비쳤다. 

 

사진 3. 세실 벤달이 편찬을 담당한 『Catalogue of Buddhist Sanscrit Manuscripts in the University Library Cambridge』(1883).

 

“케임브리지대학의 세실 벤달이 범본梵本을 찾으러 네팔로 출발했네. 제군도 티베트로 건너가거나, 혹은 다른 이를 파견해 범본을 찾아야 하네.” -1884년 12월 21일 막스 뮬러로부터의 편지 중

 

당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 강좌를 담당하던 세실 벤달Cecil Bendall(1856~1906)은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 수납할 자료 수집을 위해 네팔과 북인도를 방문해 500여 점의 산스크리트 문헌을 입수했다.(1884~1885년) 이 자료들은 이후 『케임브리지대학도서관소장 불교범어사본목록Catalogue of Buddhist Sanscrit Manuscripts in the University Library Cambridge』(1883)에 포함되었다. 이에 막스 뮬러는 경쟁 대학이 불전 수집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에 직면해 난죠에게 자료 수집을 요구하게 되었다. 

 

사진 4. 세실 벤달이 찍은 네팔, 북인도의 사원(1884~1885, 겨울). 

 

1887년 2월 13일, 인도 캘거타에 도착한 난죠는 이후 다질링, 부다가야, 녹야원을 참배하고 박물관 등을 방문했다. 난죠는 인도에서 귀국 후 간행한 『인도기행』에서 당시의 소회를 발표했다. 인도 체류 중 가장 큰 목표인 범본(산스크리트본)을 찾기 위해 아시아학회도서관을 방문해서 범본 『무량수경』 교정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원하던 성과를 얻지 못했는지 “이 사본은 영국이 인도의 리차비尼波羅國에서 수집한 5부경의 사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라고 언급했다. 더해서 “질문에 대답할 스승도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실망감을 표시했다.  

 

난죠의 실망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베나레스 범어전문학교를 방문해 인도 유학을 희망했으나 관계자로부터 ‘이곳은 청결하지 못하다’, ‘바라문족의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난죠 자신도 체류할 숙박지를 찾지 못해 유학을 단념했다. 인도 유학이 좌절되고 불교가 쇠퇴한 인도의 현실을 직면한 난죠는 티베트행에 더욱 기대를 걸었다. 

 

사진 5. 난죠분유가 유학하려고 했던 베나레스 힌두대학 도서관. 

 

티베트행은 중국을 경유하는 여정으로 봄베이-콜롬보페낭-싱가폴-홍콩을 거쳐 3월 27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중국에서는 가흥嘉興 항주를 거쳐 사이쵸最澄가 수행한 천태산 원청사園淸寺 방문, 고명사高明寺에서 패엽경 필사, 진각사眞覺寺에서 지자智者 법사의 진신탑 참배, 보안사普安寺에서 패엽경을 필사하는 등 범본 수집과 함께 티베트행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결론을 말하자면 난죠의 티베트행은 무산되었다. 양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일본으로의 귀국을 선택함으로써 난죠의 인도 기행은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다시 일본으로: 포교와 교육

 

난죠가 인도 기행을 통해 얻은 첫 번째 소회는 인도불교가 황폐화된 데에 대한 실망이었을 것이다. 난죠는 인도로 건너가기 전 기고문을 통해 인도에서 불교는 여전히 건재하고 불교가 인도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녹야원을 방문한 후 쓴 감상에는 ‘커다란 불탑이 황폐해진 채 뒹굴고 있다’, ‘녹야원은 황량해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없다’(『인도기행』)고 기술할 만큼 난죠의 실망감을 컸다. 두 번째는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범본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고, 가르쳐 줄 교사도 없었고, 인도 유학과 티베트행이 좌절되었다.  

 

사진 6. 『인도기행』.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디지털자료. 

 

일련의 상황들은 난죠에게 일본불교가 인도불교처럼 쇠퇴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일본불교를 융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했다. 이 점이 난죠가 귀국 후 범어 연구보다 포교와 교육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귀국 후 난죠의 행보는 먼저 나고야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888년(40세) 문부성으로부터 문학박사학위를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받았다. 1901년, 오타니대학의 교수로 취임해서 일본 내 근대적 불교연구를 위한 교육기관 창설에 주력하였다.

 

1903년 키요자와 만시清沢満之의 뒤를 이어 오타니대학 제2대 학감에 취임(~1911년)했고, 1914년부터 1923년까지 18년간 오타니대학 총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진종 오타니파의 학사체제를 정비하고 불교학과 동양학계의 근대적 불교교육과 보급에 힘썼다. 학계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집필활동을 계속해 일본불교의 대중화

에 앞장섰다. 

 

사진 7. 오타니대학 전경(1949년경). 

 

티베트에서 불전을 수집하고자 했던 난죠의 계획은 멈췄지만 강단에서 산스크리트와 티베트 불전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후학들에게 티베트 탐험의 중요성을 일깨워 난죠의 영향을 받은 노우미 유타카能海寛(1868~1903)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1866~1945) 등이 티베트를 방문해 불전을 수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난죠 분유에게는 산스크리트(범어) 연구가 

미완으로 전진하지 못했지만 후학을 양성해 일본 내 불전 연구를 지속시키고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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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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