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만덕사지』의 구성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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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09:32 / 조회3,306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史書 20 | 만덕사지萬德寺誌 ②
『만덕사지』는 모두 6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맨 앞에는 연표年表를 수록했는데, 1144년(고려 인종仁宗 22)부터 1341년(고려 충혜왕忠惠王 1)까지로 고려가 멸망한 1392년까지 표기되었다. 이 기간은 고려의 중·후기에 해당된다. 사지의 찬자들이 이 시기를 연표화한 것은 만덕사의 역사에서 고려 후기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고려 중후기의 연표
예컨대 연표는 요세了世부터 무외無畏의 생몰과 행적을 언급하였다. 백련결사는 1216년(고종 3) 천태종의 승려인 요세가 중심이 되어 무인란 이후 변화한 사회와 불교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결사다.
요세는 12세 때인 1174년(명종 4)에 천태종 균정均定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였다. 23세 때인 1185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하고 그 뒤 1198년(신종 원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高峯寺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때 법회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서 개당하고 수행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知訥의 권유에 의해 수선修禪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천태교관天台敎觀을 확고한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다.
그가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1208년(희종 4) 봄에 영암의 약사암에서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천태묘해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지적한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수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특히 요세는 실천행을 강조했는데, 그 방향을 수참修懺과 미타정토彌陀淨土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에 바탕한 천태지자의 『천태지관天台止觀』·『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와 지례知禮의 『관무량수경초觀無量壽經鈔』에서 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요세는 1216년(고종 3) 전라도 강진의 토호인 최표·최홍·이인천 등의 지원을 받아 약사암에서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행하였다. 이러한 백련결사는 1232년(고종 19) 보현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그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받아 거국적으로 저항하였는데 보현도량 개설은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1230∼1240년대에는 최우崔瑀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밀착된 중앙 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 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1237년(고종 24) 여름에 이르러 왕이 75세의 고령인 요세에게 ‘선사禪師’의 직함과 함께 세찬歲饌을 내리기도 하고, 1240년(고종 27) 8월에는 최우가 직접 발문까지 지어 보현도량에서 계환이 해설을 붙인 『법화경』을 간행토록 지원하였다. 더욱이 최우 정권의 이러한 지원과 관심은 1240년대에 최자崔滋가 상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관내 공덕산에 동백련사를 중창한 것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중창에 지역 토호들보다 관의 지원이 우선하였다는 것은 당시 백련사가 최우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만년에 최씨 정권과 유대를 가지게 된 요세는 1245년(고종 32) 4월에 천인天因( 1205~1248)에게 주법을 계승시키고, 원효의 ‘징성가澄性歌’를 계속 며칠간 부른 뒤 입적하였다. 향년은 83세이고 승랍은 70이었는데, 고종이 유사에 명하여 원묘국사圓妙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중진中眞이라 하였다. 요세를 계승한 그의 문도들로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천인, 천책天頙(1206∼?)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지눌을 계승한 혜심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들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세속적인 출세의 길이 열려 있던 인물들이었다. 요컨대 백련결사는 불교의 실천성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백련결사의 사상적 경향은 서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몽고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팔국사와 팔대사의 생애 기술
한편 조선의 만덕사 입장에서는 고려시대 백련결사가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그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만덕사의 불교사적 가치를 강조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6권 가운데 권1부터 권3은 고려시대 백련결사를 결성한 요세부터 무외국사無畏國師까지 백련결사를 계승했던 8국사國師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권1은 먼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강진 만덕사에 이르기까지의 지형과 산세를 정리하였고, 만덕사의 창건을 고증을 통해 바로잡기도 하였다. 아울러 8국사 가운데 제1 원묘국사圓妙國師, 제2 정명국사靜明國師, 제3 원환국사圓睆國師의 생애를 비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는데, 찬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동문선』이나 교서敎書 등을 기초로 면밀한 고증을 시도했다.
권2는 제4 진정국사眞靜國師, 제5 원조국사圓照國師, 제6 원혜국사圓慧國師, 제7 진감국사眞鑑國師, 제8 목암국사牧菴國師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이 가운데 진정국사와 진감·무외국사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찬자들은 진정국사에 대해 탁월한 학문과 저술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동해전홍록東海傳弘錄』과 『실부록室簿錄』 등 천책의 저술이 전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동문선』 등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 천책의 시문詩文을 발견하여 사지에 수록하여 그 흔적이나마 보존하고자 하였다. 찬자들은 진감과 목암국사가 ‘무외無畏’라는 법호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하였다. 『불조원류』는 “무외국사無畏國師는 휘諱 혼기混其, 자字 진구珍丘, 호號 모암牧菴이며, 성姓은 조씨趙氏이고 숙공肅公 덕유德裕의 백부伯父이며, 원묘圓妙의 11세손이다.”라고 하였지만 다산은 『호산록』의 발문이나 『동문선』·『고려사』 등을 전거로 진감국사를 무외로 주장하였다.
권3은 『동문선』에 수록되어 오는 천인天因·천책天頙·무외無畏의 제문祭文, 소疏 등의 유문遺文을 소개하였고, 임계일林桂一·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 등 고려 문인들이 만덕사와 8국사에 대해서 지은 시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자료 수집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 산일散逸된 만덕사의 자료를 수집하여 보존하고자 한 의도 역시 지니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권4는 조선 전기 행호行乎의 중건 사실과 함께 조선 후기 만덕사의 대표적인 승려 8대사大師와 절에 주석했던 6인의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8대사는 청허휴정의 제자로 편양언기鞭羊彦機와 함께 한 계파를 형성한 소요태능逍遙太能과 그 법손들이다. 이들 가운데 취여삼우醉如三愚·화악문신華岳文信·설봉회정雪峰懷淨은 조선시대 대흥사를 선교禪敎의 종원宗院으로 격상시키는 데 공헌한 12종사이기도 하다.
연파헤장蓮坡惠藏 역시 조선후기 대흥사를 화엄학을 중심으로 한 교학의 요람으로 만든 대표적인 경사經師이기도 하다. 이 밖에 벽하대우碧霞大愚·나암승제懶菴勝濟·운담정일雲潭鼎馹·금주복혜錦洲福彗·낭암시연郎巖示演 등 대흥사의 12종사와 경사는 만덕사계의 승려들이기도 하다.
특히 12경사는 그 절반이 소요태능의 후예인 만덕사의 승려들이다. 이것은 조선 후기 만덕사와 대흥사의 승려들이 교류가 빈번했고, 만덕사의 승려들일지라도 교학에 탁월하면 대흥사에 머물면서 강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대흥사가 선교학의 종원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한 12경사로 추대된 것이다.
권5는 만덕사의 동서東西 2원院을 중심으로 한 전우殿宇와 방료房寮, 누각樓閣과 승당僧堂, 산내 암자와 고적古蹟 등을 기술하였다. 특히 찬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고려시대의 천인·천책·정오丁午가 주석했던 용혈암龍穴菴에 대해서는 다산의 기문記文을 소개하여 그 가치를 부각시켰다.
완도와 청산도 등 섬과 부속 암자
이 밖에 완도와 청산도 등 섬의 부속암자와 아름답고 기이한 나무까지 소개하였다. 또한 만덕사를 다녀간 문인들의 제영題詠을 소개하고 있는데, 약 20여 수 이상의 제영은 연담蓮潭과 아암兒菴뿐만 아니라 다산과 그의 아버지 정재원鄭載遠, 김창흡金昌翕 등 여러 문인들이 만덕사의 풍광과 역사에 대해 읊기도 하였다. 권6은 무외의 15편의 유문遺文과 이미 폐허가 된 사찰에 남아 있는 비문, 그리고 천책의 시문을 모은 『호산록湖山錄』의 일부분을 수록하였다.
“무외無畏의 유문遺文은 오히려 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 있고, 전고全藁는 없지만 호산록湖山錄은 있어 마땅히 권미卷尾에 덧붙여 오래 전하도록 한다.”(『만덕사지』 권6)
권 6은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아 산일散逸된 채 『동문선』에만 수록되어 있는 무외의 유문을 재수록하였고, 일부분만 남아 있는 『호산록』 역시 수록하였다. 이것은 『만덕사지』 찬자들의 불교사 자료 보존에 대한 수준과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사지 찬술을 통해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한 만덕사의 위상을 강조하고 격상시키는 것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지만, 산일된 채 사라질 위기에 처한 소중한 불교사의 흔적들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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