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봉암사 수행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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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11:00 / 조회3,942회 / 댓글0건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⑩
1969년 33세의 고우스님은 김용사 총무 소임을 살면서 뜻이 같은 수좌 도반들과 봉암사를 정화해서 구산선문 참선 전통과 결사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가을에 봉암사에 들어갔다. 봉암사 제2결사 초기 참여 도반은 고우스님을 비롯해 법진, 법연, 법화, 무비, 정광, 청현, 혜규, 영명
스님 등 8~9명이었다.
난관에 처한 봉암사 주지 문제
법화스님의 도반인 백양사 천장스님도 봉암사를 좋아해서 왔다 갔다 했다. 이 중 지금 봉암사 백련암에 주석하는 법연스님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봉암사를 지키고 있다. 1969년 가을에 봉암사에 들어간 수좌들은 특정 문중을 떠나 오로지 수좌 도량의 원융 살림을 지향했다. 재정을 공개하고 함께 참선하고 탁마하며 대소사는 부처님의 승가공동체 정신을 살려 민주적으로 토의하여 합의로 진행하자고 뜻을 모았다. 한마디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봉암사를 명실상부한 참선 도량으로 복원하려면 그런 뜻을 가진 주지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제2결사 동참 수좌 중에는 주지하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수좌는 참선 수도가 본분사라는 인식이 강하여 주지 등 사찰 소임, 즉 사판事判은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고우스님을 비롯한 결사 수좌들은 아직 승납이 10년도 되지 않은 젊은 수좌들이었으니 더 그러했다.
그래서 의논한 끝에 선배 수좌를 모시기로 하였다. 먼저 서암스님을 봉암사로 오시라 하니 어찌된 영문인지 스님은 원적사에 계시면서 한사코 봉암사로 오시려 하지 않았다. 다음에 모시려 한 분이 범어사 지유스님이었다. 지금은 범어사 금정총림의 방장이 된 지유스님은 1931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귀국하여 범어사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참선 수도와 전법 교화에만 전념해 온 선승이었다.
고우스님과는 문경 운달산 금선대에서 서암스님을 모시고 살아 마치 사형사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결사 도반 법화스님과는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같이 지낸 인연이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고우스님과 법화스님 그리고 범어사 문중인 무비스님이 나서서 지유스님에게 봉암사 주지를 맡아 봉암사에서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지유스님은 봉암사에서 같이 정진하는 것은 좋지만 주지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노라고 한사코 거절하였다. 그래서 일단은 봉암사에서 같이 살기로 하고 지유스님을 봉암사로 모셨다. 그리고는 스님들이 지유스님을 적극 설득했다. 봉암사가 참선 도량이 되려면 수좌 중에 누가 주지를 맡아야 하는데, 맡을 분이 스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지유스님은 거절하였다. 대중들은 하는 수 없이 정 그러시면 이름만이라도 빌려 달라고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이름은 빌려주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다만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니 절 살림이나 사무는 일체 맡지 않는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봉암사 주지에 지유스님, 총무에 고우스님
지유스님이 봉암사 주지를 맡기로는 했지만 이름만 걸고 절 살림과 사무를 누군가 맡아야 했다. 결사 도반들은 자연스럽게 고우스님이 맡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미 김용사 총무 소임도 맡아 보았고, 또 봉암사에 들어오기까지 좌장 역할을 해 왔으니 봉암사 일도 고우스님이 맡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가 되었다. 고우스님도 사사로운 이해 관계를 떠나 대중을 위하는 일이고 수좌 도량의 봉암사를 위한 일이니 마음을 내었다.
이렇게 구산선문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봉암사를 참선 도량으로 복원하려는 수좌들의 뜻이 모아져 새 주지에 지유스님이 임명되고, 실질적인 주지 일은 총무를 맡은 고우스님이 맡게 되었다. 도량을 책임지는 도감都監은 법연스님이 맡았다.
당시 봉암사에는 놀랍게도 선방이 없었다. 지금이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참선 도량이자 대한불교조계종의 유일한 종립선원이지만 1969년 제2결사 당시 봉암사 사정은 그랬다. 참선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정진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각자 여러 전각에서 자유롭게 정진했다. 그러니 당시 봉암사 정진 분위기는 자유와 자율 그 자체였다. 예불과 공양 때는 한 곳에 모여 예불, 공양하고는 각자 전각에서 좌선할 사람은 좌선하고, 경을 볼 사람은 경을 보고, 포행할 사람은 포행하는 그런 정진 분위기였다.
봉암사 살림은 여전히 어려웠다. 양식이 떨어질 때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알아서 탁발 나가서 양식을 구해 오면 그것으로 같이 공양하고 정진했다.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 없었다. 봉암사에서는 원융살림을 한다고 했지만, 원융살림을 할 것도 없었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때 무비스님은 호걸처럼 키가 크고 유쾌하여 봉암사에서 늘 재밌게 정진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슬그머니 도망을 갔다고 한다. 고우스님 당신도 마음이 약했는데, 자기보다 무비스님이 덩치와 달리 더 약했다고 회고하셨다. 하지만 고우스님은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정면 대결했다며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걸 어른 스님들이 공심公心이라 하셨는데, 나는 그 공심에서는 양보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성질이 못됐다는 말도 들었지만 불교 공동체 일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어요. 봉암사 일이 특히 그랬습니다. 수좌계 전체를 위하는 일이고 조계선풍을 살리는 일이니 양보할 게 없었지요.”
봉암사 산판 일로 감옥에 간 고우스님
봉암사는 1947년 가을 성철스님과 자운스님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로 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949년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동안거를 마친 1950년 봄에 소개령이 내려 중단된 이후 당시까지 선원이 재건되지 못하고 도량만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전쟁이 나서 모두가 피난 갔을 때 만성스님은 홀로 남아 목숨을 걸고 봉암사를 지켰다. 전쟁이 끝나고 종단이 승단정화로 혼란할 때 어떤 주지는 절 땅을 팔아먹거나 화전민들과 숯을 구워 절 운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봉암사의 교구 본사였던 직지사에서 주지를 새로 임명하면서 정부의 산림수종개량사업과 연계하여 봉암사 사찰림을 10년 계획으로 벌목하고 유실수를 심는 산판을 추진한 것이다.
1969년 결사 도반들이 처음 봉암사에 들어왔을 때에도 큰 산판은 계속 되어 목재를 싣는 사륜구동 트럭(GMC)이 도량 안으로 오르내렸다. 겨울이 되어도 이 산판은 멈추지 않았다. 스님들이 보기에 산판업자들이 계약보다 나무를 과하게 베어내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봉암사 산이 민둥산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우스님과 대중들은 산판 현장에 가서 나무를 제대로 베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계약보다 더 많은 나무를 베면 제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니 산판업자들과 봉암사 수좌스님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거친 벌목 일꾼들이 스님의 멱살을 잡는 등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봉암사의 방대한 사찰림을 베어내어 돈을 벌려는 업자들과 이를 막고 산림을 지키려는 수좌스님들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이런 사태는 당시 벌목업자들과 결탁한 시청 산림 공무원들도 바로 알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수좌스님들은 방해꾼들로 보였다. 산판업자들은 봉암사 총무 고우스님을 회유하려고 했다. 고우스님은 그런 회유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산판업자들은 시청 산림 공무원들과 짜고는 봉암사 백련암에 장작이 쌓여 있는 것을 지서에 고발해서 봉암사 스님들을 괴롭히려 하였다. 당시에는 정부가 산림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여 산에 나무를 한 그루라도 허가 없이 베면 엄벌하던 시대였다.
당시 백련암에는 혜암慧菴(1920~2001)스님이 정진하고 있었다. 혜암스님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도량 주변 나무를 시원하게 베어내고 정진하였다. 그때는 겨울이라 암자에 겨울 땔감을 해서 장작을 넉넉하게 쌓아 두었는데, 이것을 산판업자들이 고발한 것이었다.
비록 암자에서 혜암스님이 한 일이지만 봉암사 일이니 경찰서에서 총무 소임을 맡고 있는 고우스님을 불렀다. 스님이 가보니 백련암 장작을 문제 삼았다. 고우스님은 어른인 혜암스님이 한 일이라 할 수 없이 자기 책임이라고 했다. 경찰은 그 자리에서 바로 기소하여 스님은 느닷없이 상주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다. 고우스님은 난생 처음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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