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 불교민속학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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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09:17 / 조회3,270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0 | 고라이 시게루
고라이 시게루五来重(1908〜1993, 이하 고라이)는 근·현대 일본의 불교민속학자이다. 근·현대 불교학자를 소개하기에는 조금 이르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으나, 그는 여타의 불교학자들과는 달리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일본불교학의 다양성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일본 불교민속학의 태동
고라이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바라키현茨城縣 출신으로 도쿄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고야산대학高野山大学 조수로 근무하면서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재입학해 국사학을 배웠다. 이 시기 고라이는 자신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 민속학의 거두 야나기다 구니오와 조우한다. 1939년 교토제국대학 졸업 후, 고야산대학 조교수, 오타이대학 교수로 근무했다. 그는 「일본불교 민속학 논술」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일본종교민속학연구소’를 주재하며 많은 후진을 육성하는 등 일본 불교민속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고라이 시게루는 『불교와 민속을 말하다』(1995)에서 “어린 시절부터 불교는 사찰에 모신 조상 성묘나 서민의 실생활에 봉사하는 것”이 불교에 대한 이미지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불교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화한 시기는, 도쿄대학에 진학해서 기히라 타다요시紀平正美(1874~1949)의 강의를 들은 이후부터이다. 기히라는 일본주의적 철학자로 일본신화나 일본에 유입된 모든 종교의 근저에는 ‘일본정신’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학자이다. 기히라의 일본정신은 후일, 고라이가 “일본불교의 심층에는 일본인 고유의 신앙세계가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근간이 된다. 물론, 고라이의 이러한 주장에는 기히라 이외에도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国男(1875~1962)와의 접점 역시 포함된다.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재입학한 고라이는 우연히 대학에서 주최한 야나기다 구니오의 강연회에 참석했다. 야나기다 구니오는 근대일본민속학의 창시자로 아시아의 많은 민속학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현재에도 야나기다 문파는 학계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야나기다의 민속학 강연을 들은 고라이는 “내 고향에서의 생활이 갑자기 나의 학문을 덮어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불교와 민속』, 1972)라고 당시의 충격을 묘사했다. 야나기다의 일본민속학은 고라이의 불교관을 확정시킨 계기가 되었다.
“야나기다 구니오의 저서들을 읽은 후, 나의 학문 방향을 결정했다. 일본의 서민들은 문화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변용시키거나 버리고 재구성해서 스스로 문화를 만들었다. 일본의 서민불교는 이렇게 성립되었다. 지금까지 배워 온 교단 중심의 불교역사에서 느낀 공허함이 일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 『불교와 민속』 중 일부 -
고라이의 민속학적 불교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교민속학 연구의 첫 삽은 1951년 4월, 고야산대학에서 ‘일본 불교민속사’ 강의를 개설하면서부터이다. 이듬해 학술지 『불교민속』을 창간하면서 일본에서 ‘불교민속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의 창시자가 되었다.
고라이가 불교민속학에 발을 내딛은 데에는, 당시 민간에서 받아들이는 불교와 시대조류와의 괴리감이 컸기 때문이다. 메이지기 일본이 유럽의 실증적 원전 연구를 받아들인 이후, 일본 내에서 승려들의 학식은 상향했지만, 서민들의 생활 속에 스며든 종교로서의 불교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승려들이 종단의 대학에서 학문으로서의 불교를 배운 후 자신의 사찰로 돌아가면, 신도들의 법회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이와 관련한 신도들의 간단한 질문조차 답하지 못한다.”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고라이의 불교민속학이 시작되었다.
서민신앙으로서의 불교사, 『고야성高野聖』
고라이 시게루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고야성高野聖』(1965)일 것이다. 『고야성』은 정토진종 총본산으로 알려진 고야산高野山을 서민신앙의 관점에서 성聖을 재고했다. 고라이는 고야산이 염불과 정토신앙의 성지로 알려졌지만, 에도시대 막번체제의 영향과 종파의식이 강화되면서 이전의 역사가 잊혀졌다고 지적했다. 더해서 각 종파의 교리적 이해 방법만으로는 고야산이 왜 일본 최대의 보리처[성지]가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고라이는 모든 사물의 시점을 바꿔야만 진짜 일본불교의 역사를 볼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일례로 고야성이 개최하는 법회에서 행해지는 ‘관정灌頂’의례는 밀교적 교리로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관정의례가 갖는 실제적 의미는 망자에 대한 ‘생전의 죄업을 소멸’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해서, 쵸겐重源(1121~1206)이 고야산에서 정토신앙 그룹인 ‘영강迎講’을 조직한 목적도 염불을 위한 게 아니라 민속적 통과의례로서의 ‘의사擬死 재생의례’를 실시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일본인이 인생의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의례를 한다는 점과, “죽으면 25보살이 정토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 사바세계로 돌아온다.”는 정토사상이 결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고라이는 고야산에서 행해지는 불교문화에서 교리라는 겉껍질을 벗겨내면 그 내면에는 민속적 신앙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고라이는 고야산을 서민신앙의 성지로 재조명했다.
고라이는 불교는 서민을 구제하기 위해 존재하며, 불교가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폐기되어야 한다는 불교의 실천성을 중요시했다. 아울러 서민(민중)이 함께 행하는 신앙실천이야말로 부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이며, 이러한 실천불교의 역사가 바로 일본불교의 본류本流라고 주장했다.
민중을 중요시한 불교사는 고라이만 주장한 건 아니다. 핫토리 시소服部之総나 가사하라 카즈오笠原一男 등이 ‘신란親鸞과 같은 가마쿠라 승려들의 민중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패전 후의 일본불교의 역할론이 재고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라이는 특정 시기나 특정 사상 속의 민중성이 아닌,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이 만드는 불교가 본래 종교라고 보았다. 민중을 떠난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며 핫토리 등과는 결을 달리했다.
고라이는 “서민의 종교는 엘리트 종교를 이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특권층의 신앙이나 어려운 사상을 뽐내는 지식인들의 종교론보다 서민들의 소박한 신심이 종교의 본래 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고라이가 말하는 서민신앙과 일본불교사란 무엇일까. 간단하게나마 고라이가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겠다.
“서민신앙은 민중이 만든다고 생각한다. 개산조가 없으면 교리도 없고 교단도 없다. 이점에서 생각해 보면, 정행자淨行者가 작은 본존을 안치한 암자에 사람들이 모이고, 주술이나 방술로 기도나 점을 의뢰하는 것에서부터 종교는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사원이 건립되고 불상을 조영하고, 연기가 생기고 개산조가 기록된다. 당연히 종파 교단에 소속되고 장원을 가지고 강講을 조직하고 모든 법회가 화려해지고,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종교는 공동화되는 것이 대략적인 역사이다.” - 『에마키 모노繪卷와 민속』(1981) 중에서 -
일본종교(불교)의 본류는 주술이나 방술을 기대한 서민신앙에서 출발해서 사원이 건립되고 종파와 교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라이의 시각은 일반 불교사 연구자들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파격성과 극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교리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불교문화 현상을,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야나기다 구니오의 민속학을 채용해 고라이는 불교민속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했다. 더해서 민중을 떠나 특정 교리나 교단 조직만을 강조한 불교는 껍질뿐이라는 그의 불교관 역시 존중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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